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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3 03:46

조선에 있어서의 무교회-김교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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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이 전] [다 음]



조선에 있어서의 무교회
(일본 '성서강의'지에 발표된 것)

김 교 신           



1. 서 언
전후 2회에 걸친 마쓰마에[松前重義(송전중의)] 씨의 '조선의 희망'이란 글은 참으로 동정에 넘치는 글이었다. 그 중에는 우리들을 과찬하는 데가 없지 않아 읽는 중에 얼굴이 붉어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참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에 의해 바뀌어진 심정을 가지고 볼 때에는 황폐한 조선반도에도 이와 같은 '희망'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여 깊이 놀랐다.
이에 대해서 야마모토 주필로부터 "그러면 이에 대해 여러분의 입장에서 장래의 포부, 우리들에 대한 희망, 과거 및 현재의 활동상황, 특히 하나님이 어떻게 조선에 있어서 섭리의 거룩한 손을 펴고 계시는지 등의 실상에 대하여 '성서강의' 4월호에 기고해 주시기 바란다."고 권유해 왔지만, 나는 다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응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1)과 (2)는 생략한다.

(3) 의견의 온건함을 보증하기 어렵다는 것
의견의 온건함이란 물론 정치상의 의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견이란 무교회에 대한 의견이다. 우치무라 선생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존의 무교회 여러 선생님들과 신진의 형제들에 대해서도 직접 간접으로 내가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므로 감사의 말씀은 있을지언정 불만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겠지만 근래의 무교회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러운 생각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그런 견해를 섣불리 발표하면 나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오해의 씨앗만 남길 수도 있기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은 이 글의 제목까지도 무교회라는 말을 쓰지 말고 '조선에 있어서의 참 복음의 진전'이라고나 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렇게 하면 다른 일반기독교와 혼동하기 쉽고, 따라서 교회신자에게 누를 끼칠 것도 염려되어 그대로 '무교회'라는 글자를 빌렸지만, 그 말의 뜻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혹시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필자 한 사람의 견해이지 조선 무교회신자의 총의가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우선 순서로써,
2. 우리들의 과거 및 현재의 활동상황
3. 조선에서의 섭리의 거룩한 손과 우리들의 장래의 포부로서의 사실을 말하고, 마지막에
4. 무교회 신자에 대한 희망
이 항목에서 평소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해 볼 생각이다.

2. 우리들의 과거 및 현재의 활동상황
조선에 있어서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무교회적 순복음을 가장 빨리 선전하기 시작한 사람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분명히 최태용 씨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최씨는 그후 심경의 변화를 가져와 "우치무라 선생의 감화를 받고 그 저서를 번역한 적은 있지만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는 아니다."라는 뜻의 말을 하기 시작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무교회 진영에 일대 문제를 일으킨 사실은 다음에 초역 소개할 교회 대 무교회의 논쟁문에도 명백하다.
더욱 최근 동경에서 일본신학교를 졸업한 후의 최씨는 1에도 신학, 2에도 신학, 3에도 신학이고, 한편 '조선복음교회'라는 새로운 교파를 일으켜 그 감독에 취임하는 동시에, 한편 "무교회주의는 주관적 신앙이다." 또는 "신학적으로 고찰하더라도 무교회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라고 논하며 가장 활발하게 가장 격력하게 무교회를 공격하는 사람으로 나타났다.
조선에 있어서의 무교회적 순수한 신앙이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하여는, 그와 같은 강렬한 논전의 상대를 준비하시는 바의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들은 감사하면서 때때로 격렬한 논전으로써 불꽃 튀기면서 마주 대하는 일도 있다.
1923년의 여름방학에 아사노[?野猶三郞(?야유삼랑)] 선생을 나는 고향인 북선 함흥에 맞이하여 전도집회를 열었지만, 무교회주의 총본산의 수제자가 왔다고 해서 교회측에서는 비상한 경계를 펴고 교회당은 물론이고 기독교청년회까지도 굳게 닫아버려서, 집회장소를 얻을 수가 없어서 당혹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보다 앞서 12년 전부터 이미 그 지방에, 주로 최태용 씨에 의해 무교회주의가 선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사노 선생은 그 후 1927년 여름까지 5년간 계속해서, 여름마다 북선을 방문해서 짧을 때는 3,4일간 길 때는 1주일 혹은 10일도 묵으면서, 함흥을 중심으로 삼평면, 문천, 원산, 안변 등 벽지까지 두루 다니셨다. 그러는 동안, 불편한 온돌방 생활, 불안한 조선식사, 진흙 시골길, 홍수의 재난, 발열 입원하는 등 갖은 고난과 싸웠다.
그 결과는 사람의 생각을 넘어선 현상이 나타났다. 처음 무렵에는 무교회의 탄압만을 일삼던 교회측 사람들도, 한번 두번 청강하는 동안에, 무교회 두려워할 것이 아닐뿐더러 이것이야말로 진짜 복음이라며, 개미가 단것에 꼬이듯이 평신도들이 모여들고 장로 목사까지 모여와서, 해를 거듭할수록 성황을 이룰뿐더러 나중에는 각 교회가 자잔해서 이 집회 유치운동을 할 정도였다.
이들 집회에는 주로 내가 통역을 했는데, 아사노 선생의 말을 빌면 '천하 일품의 통역'이라고 하였는데, 우선 대과 없었다는 것보다 변사가 열을 올리는 강조점에는 통역자도 같이 열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동경에서 내 하숙에는 우시코메에도 오쓰카[大塚(대총)]에도 소시가야[雜司케谷(잡사케곡)]에도,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아사노 선생이 오셔서 성서강의를 하셨다. 많을 때는 7,8명 친구와 같이, 적을 때에는 나 혼자서 배웠다. 비오는 날이나 눈오는 밤에도 빠짐없이 4, 5년간 이것이 계속되었다. 선생은 나 외에도 조선사람 한 사람씩 자택으로 불러서 매주 1회의 성서강의를 수년간에 걸쳐서 계속하셨는데, 이 같은 기초공사가 나로 하여금 '명 통역자'가 되게 했을 뿐더러,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내가 잡지편집에 피로할 때, 복음전도에 실망했을 때 나로 하여금 다시 용기를 얻게 해주었다.
나는 우치무라 선생에 의하여 신앙의 뼈대를 세웠고, 쓰카모토 선생에 의해서 성서의 학문적 연구의 실마리를 풀게 된 것인데, 더구나 또 아사노 선생의 조선사람 한 사람 상대의 강의와, 하숙집을 돌며 하신 전도에 실제로 접해서 전도자의 인내와 신종(信從)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실망 낙담해 버렸을 것이다. 결과를 계산하려는 나의 불신종과 초조에 대하여 하나님은 항상 아사노 선생을 통해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1930년 봄 우치무라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에 조선의 교회측에서 '우치무라 간조론'이라는 일대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우치무라 간조론에 답하여'라는 글을써서, 성서조선지 제19, 20호에 연재했다. 이것은 조선에 있어서 교회 대 무교회가 문서로써 행해진 최초의 논쟁이기도 하고, 또 조선에 있어서의 무교회의 유래를 아는 데 참고가 되는 것이니 다음에 그 필요한 부분만을 일역할까 한다.

(1) 나는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다
조선기독교 장로회 평양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 제 12권 제4호(7월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 씨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읽었다. 읽고 놀란 것은 첫째로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를 열거하는 중에 조선 사람으로서는 내 이름이 올라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까지 자진해서 "나는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다."라고 글자로건 말이건 발표한 기억이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치무라 선생은 좌우간 위대한 선생이다. 평양신학교의 기관지인 '신학지남'까지도 한 마디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만치 위대한 분이다. 위대한 선생에게는 사이비한 자까지 그 스승의 제자라고 자칭 광고해서, 선생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나는 감히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라고 공언하기를 주저했다.
둘째,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로서 일본에 아제가미[畔上賢三(반상현상), 쓰카모토[塚本虎二(총본호이)], 후지이[藤井 武(등정 무)], 아사노[?野猶三郞(?야유삼랑)] 제씨를 열기한 다음에 조선으 김교신을 나란히 쓰는 것은 마치 코끼리떼 행렬에 당나귀를 딸리는 것과 같고, 혹은 필숙, 삼숙, 천랑(天狼)에 앙숙(昻宿)이 참렬하는 것과 같다. 그 아비에 그 자식,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이라면 우치무라 선생의 경우도 마치 그와 같다.
김인서(金麟瑞, 문제의 논문 필자) 씨가 열기한 외에도, 가네자와[金澤常雄(금택상웅)], 야나이하라[矢內原忠雄(시내원충웅)], 미타니[三谷隆生(삼곡융생)], 구로사키[黑崎幸吉(흑기행길)] 씨가 지난 5월 28, 29일 우치무라 선생 기념강연회에 출강했는데, 이들 모두 일기당천(一騎當千)의 대가들이다. 또 이들은 최전선에 나타난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10년간 가까이 우치무라 선생의 성서연구회에 출석하는 동안 어떤 의미에서 우치무라 선생 자신보다도 그 제자들의 위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이다. 특히 선생이 떠나가신 후에 그런 느낌이 더욱 확실하다. 그래서 나는 장님과 같이 대담해질 수가 없고,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로서 자타 공히 인정할 인물은 조선에도 걸맞은 선배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나는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라고 한다든지 그에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것을 한 번도 공포한 적이 없는데, 다른 조선사람 사이에서는 일찍이 이런 종류의 의사표시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서지연구(聖書之硏究)'지의 '하루하루의 생애'[日日노生涯(일일노생애)]란에 기재된 중에서 한두 예를 들어본다.
연구지 351호('29년 10월호) 44쪽의 9월 9일 일기에는 조선 성진의 서창제(徐昌濟) 씨와 최태용(崔泰瑢) 씨에 대한 것이 있다(기사는 생략). 위와 같은 관계로 보아 나보다 훨씬 선배인 최태용 씨가 만일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임을 자인한다면 아마도 감히 논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김인서 씨가 '신학지남' 지상에서 거듭 거듭 변호한 바와 같이, 최씨 자신의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다.
다음에 연구지 제318호 이하에 연재된 '성서지연구' 조선 독자회기록에 의하면 출석자 25명 주에 김창제(金昶濟), 박승봉(朴勝鳳), 안학수(安鶴洙), 백남주(白南柱) 제씨 등 4명의 심원한 감상문이 실려있다. 특히 김창제 씨는 1916년 이래 '성서지연구'지의 독자가 되어 그 이듬해 8월에는 우치무라 선생을 친히 동경으로 방문했다고 되어 있으니, 나보다 우치무라 선생 및 그 저서에 접하기를 4, 5년 앞서고 있다. 그 밖의 3인도 상당히 오랜 기간 '성서지연구'를 읽음으로 해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는 것을 각자 고백하고 있다. 위 제씨가 친구 관계였는지 제자였는지 그 구별은 내가 논의할 일이 아니지만, 좌우간 우치무라 간조 선생을 조선에서 논하려고 하면, 내가 아는 범위만으로도 위 제씨를 무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배 제씨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나야말로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제자다."라고 자임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인서 시는 위에 열기한 제씨도 일괄해서 "이들은 논할 바가 못 된다."라고 일고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미약한 후진인 나를 끌어다 "조선사람으로서는 양정고보의 김교신 씨를 들 수 있다."라고, 피할 수도 없이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제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과연 이것이 김인서 씨의 의식적인 것인지 혹은 우연하게 이루어진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된 이상 나로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거니와,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로서 인정받는 그 명예를 한없이 감사하는 바이다.
일이 여기에 이르니, 조선기독교계의 최대 세력을 가지는 장로교회 평양신학교 기관지에까지 기재되어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나는 이제부터 대 선생의 명성을 이용하는 자라는 양심의 가책 없이, 일본에 있는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인 여러 대가들과 나란히 하는 당돌한 자라는 비난도 받을 염려없이, 또 조선에 있는 여러 선배에게 예양의 덕이 없다는 염려도 없이, 부득이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임을 자인하고 공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상은 반박문의 제1항의 초역이다. 제2항에서 사사하게 된 전말을 말하고, 제3항에서 논자의 사실의 오전 독단을 변박하고, 제4항에서 나는 우치무라 선생에게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논하고 매듭지은 것인데, 너무 길어져서 이만 줄인다.
위의 논쟁 이후는 잠시 무풍상태가 계속되고, 그는 그 나는 나로서의 궤도를 걸어왔다. 다만 최근에 와서 최태용 씨가 무교회의 토대부터 폭격하려는 기세로 "무교회는 주관적이다." 또는 "무교회주의란 교회와의 대립항쟁에만 그 존재이유가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해서 우리들의 시취(詩趣)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들이 현재 하고 있는 방법은, 논쟁보다도 적극적인 복음의 진리를 선전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소지(小誌) '성서조선'은 그도구로서 이번 4월에는 제99호에 이르렀다. 학생시절부터의 습관으로, 때를 정해서 동지들이 모여 윤강회(輪講會)를 매년 개최한다. 서울과 평북 오산에는 항상 성서연구회가 개최되고 있어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각자의 근무처나 학교에서는 야곱이 양을 치는 것 같은 흉내도 내고 있다.
(3. 생략)

4. 무교회 신도에 대한 희망
예정된 순서로 하면, '3. 조선에 있어서의 섭리의 거룩한 손과 우리들의 장래의 포부'를 우선 말씀드려야 할 것이고, 또 야마모토 주필께서도 이 점을 '특히' 부탁하신 것이지만 실제 펜을 잡고보니 그것은 대단히 큰 문제이고, 내 필력으로는 예정지수(豫定紙數) 내에 간단하게 말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게 되어, 필요하면 따로 쓰기로 한다.
또 함석헌 군이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전후 23회에 걸쳐서 '성서조선'에 연재된 '현대의 예언서'이다. 조선에 신교가 전래된 이래 50년간의 최대 수확 아니, 조선역사가 있은 이래 최대의 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조선에 있어서의 섭리의 거룩한 손'의 해석이다. 지금 군 자신의 손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 중이어서 가까운 장래에 단행본으로 나올 예정이니 그것을 보시기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은 무교회론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본 고장의 무교회 신도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말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한다. 단, 전번 호의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의 활동상황'에서 장황하게 나 개인에 대하여 말한 바를 기억하고서 이하를 읽어주시기 바란다. 과거 10년간 무교회주의자로서 비방을 받으며, '무교회지=성서조선'으로 통용되는 잡지를 많은 손실을 보면서 제100호까지 발행한 역사를 가졌다는 것과, 또 차후에도 생명이 계속되는 한은, 은혜가 멈추지 않는 한은 무교회 혼에 살기를 바라는 자임을 마음에 새기면서, 이하의 글과 행간을 읽어주기 바란다.
무교회 신도에 대한 희망은 적지 않다. 마쓰마에 씨에 의해 시사된 바와 같이, 조선의 여자교육사업도 그 외 산업에도 공무원도 무교회적 신앙으로써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동경 같은 데는 과포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무교회 선생의 한두 분 쯤은 조선에 오셔도 좋지 않을까 생각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실 일이고 이 편에서 희망할 일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꼭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교회 간판을 내립시다."라는 희망이다. 본 고장의 무교회 신도 여러분, 흥분하기 전에 나의 어리석은 말을 들어주는 친절과 여유를 가져주기 바란다.
우리들은 무교회 신도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성장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그대로 두고, 눈에 보이는 것, 조선과 같이 상당히 먼 곳에서도 현저하게 눈에 띄는 것 두셋에 대하여, 나는 평소의 미심스러웠던 생각을 그대로 말하려 한다.
그 첫째는, 신앙만의 파와 행위파, 바울파와 야고보파의 대립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신앙만의 신앙을 말할 때에 나는 "아멘!"으로 대답했다. 행위도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는 가르칠 때에도 대단히 유익한 가르침이라고 수긍했다. 그런데 처음의 조그만 균열이 점점 큰 도랑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는 분명히 천재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앙만'과 '행위 겸수'와의 구별을 그토록 분명하게 구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과연 특별히 발달한 종교가의 섬세하고 예민한 신경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경탄해싸. 언제까지나 크게 보아 신앙만을 주장하는 선생의 행함도 참으로 훌륭하다. 행위를 역설하시는 선생님 신앙도 참으로 부러운 믿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과 같은 우둔한 자는, 신앙이니 종교니 하고 논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비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스승보다 앞서려는 듯 너무 급하게 앞질러가지 말고 아직 '신앙만'이나 '행위도'라고 분리하지 않았던 우치무라 선생에까지 되돌아갈 수는 없을는지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둘째, 상당히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절대적 비전론과 상대적 비전론이다. 이 논쟁으로 인해서 신안상 중요한 점이 분명해진 바를 인식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론은 이론을 낳아서 드디어 걷잡을 수 없는 데까지 빠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를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제 이 문제를 둘러싸고 무교회가 둘로 갈라질뿐더러, 실은 관동 관서가 영구히 반목하게 되지나 않을까 성미가 급한 자는 걱정이다. 물론 단수난 기우에 틀림없을 것이고 또 기우이기를 바란다.
다만 "그럴 때에 너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라는 것 같은 논법에는 우리는 대단히 불쾌함을 느낀다. 오늘날의 비상시 일본제국 신민인 자에게 그런 것을 말하게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런 논쟁을 하는 사람들과 그리스도를 향해서 가이사에게 납세하는 것의 가부를 질문하는 도배와, 그 결과에 있어서 얼마나 거리가 있을 것이냐고 우리는 분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신앙으로서 이론으로서는 물론 절대 비전론 편에 서는 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람 자체로서 전인(全人)으로서의 상대적 비전론자를 알 때에, 우리들은 "세이브(옮긴 이: "Save"인 듯) 상대 비전론자!"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자이다. 상대 비전론자도 매장해서는 아니 된다고 보는 자이다.
이론으로서는 배격해야 할 상대적 비전론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으로서는 그 관서인(關西人)만큼 비전론을 위하여 동포에게 미움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손해를 본 사람이 9천만 일본사람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 것인가? 60만 인구의 서울시내에 살면서, 적막한 나머지 이야기를 나눌 친구를 교외 먼 곳에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1억에 가까운 일본사람 중에 저 관서사람과 같은 사람을 찾아내기는 하늘에 별 따기 같은 심정이다.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왜 그를 골리앗 취급을 하는가?
신앙에서 이론에서 볼 때에는 절대 비전론과 상대 비전론과는 천양지차가 있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탄 없이 말한다. 절대도 상대도 털 하나 더 있고 없는 정도의 것이라고. 작금의 세상형편으로 보면 절대도 상대도 따질게 못 된다. 우선 비전론을 위해서 박해를 받는 자, 그리스도를 위해서 미움을 받는 자는 모두 선택받은 귀한 존재가 아니냐? 친구보다도 진리를 보다 사랑한다 함은 누구의 말인지 모르겠으니,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특히 무교회자의 호전성을 조장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리와 같이 보이면서 실은 이 한마디만큼 이교적이고 사탄적인 말은 많지 않다. 무엇이라 해도 우리들 크리스천은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하신 사도 요한의 평생 두고 하신 설교를 들어야 하고, 주 예수의 새 계명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교회에 대한 공격이다. 나는 수 년 전에 오랜만에 동경 어느 무교회 집회에 출석한 일이 있다. 우연히 그날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무교회 또 무교회 또 무교회였다. 모 요양소의 소녀의 긴 편지를 낭독하는 중에 짜증이 날 정도로 많은 무교회 무교회가 되풀이되었다. 또 설교자도 무교회의 효험을 열심히 강조 연창 했다. 마치 교회에서 목사가 교회와 헌금 두 가지 말을 가지고 설교의 새끼 꼬기 하는 것과 같이, 또 불교도가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외우듯이 오로지 무교회 무교회였다. 나는 드디어 나를 굽히고 감탄했다. 무교회는 과연 종교적 천재들만이 할 일이로구나. 만주나 에티오피아가 어찌되거나, 동경 한가운데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국민전체를 향하여 분노를 발하는 것 같은 손해 될 만한 일은 하지 않고, 다만 소수의 무교회 팬을 향해서 "무교회, 무교회"라고 연창(連唱)하고 있으면,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가 이루어지는가 보다라고 억지로 납득 당했다.
신문지상에서 대대적으로 교회와 싸우고, 또 "나는 싸운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용감하게 일어서는 것을 보고, 나는 대단히 실례이지만 사실 우습기 짝이 없었다. 대체로 현대 일본사람은 약한 것과 싸우는 데 상당히 맛들인 듯 싶다. 그것은 장학량 군에 이겼을 때 이래 아주 심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교도 중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일본제국 판도내에서 두 사람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 사람은 히다카[日高善一(일고선일)] 씨고, 다른 한 사람은 최태용 씨. 이들 두 사람 다 교회관련 일로 의식(衣食)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 외에 존경할 만한 교회 신자는 예를 들면 요시키[由木康(유목강)] 목사가 신흥기독교 지상에 고백하고 있는 것같이 "가톨릭교회라면 혹시 모르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있어서 지금도 교회가입을 구원의 필요조건으로 인정하고 있는 교파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과문하여 아직 모르는 바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은총으로 신앙에 의한다고 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교회 전체에 통하는 근본적인 관념이다. '다만 믿음으로'라는 것이 무교회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또한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본질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 무교회 논전의 결론이다. 교회측의 인식이 이와 같을진대 구원은 이 편에 있다든가 저 편에 있다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은 추태가 아니겠는가? 가령 늦었다 하더라도 우치무라 선생을 내세우게 되었다면 새삼스럽게 의인의 묘를 장식한다느니 하며 심하게 추궁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지. 우치무라 선생은 교회사람의 선생이기도 하고 전 일본사람의 영구한 선생이기도 하다.
지금의 무교회에서는 "우리들은 모든 진리의 적에 대해서 새로운 선전포고를 한다."라고 말한 그들 속의 예언자의 말씀은 이미 잊어버린 것같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허덕허덕하는 일본기독교회에 대해서 무슨 싸움을 할 수 있는가, 교회는 우리에게 무슨 실질적인 위해를 줄 수 있는가? 어떤 분이 말한 것같이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일본적 기독교에 특수한 고난이 없으면 아니 된다. 일본에 있어서는 기독교도의 십자가의 현실성은 교회 공격에서는 오지 않는다. 외래의 가톨릭을 프로테스탄트가 공격하고, 또 외래 개신교회를 무교회가 공격해도 그로 인해서 받을 십자간느 심각한 현실일 수가 없다······"라고.
싸우겠으면 좀더 강하나 놈을 상대로 해서 싸워주기 바라는 바이다. 그것을 못한다면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차선'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무교회는 거포를 쏴서 적진을 침묵시키고, 또는 맹호노후(猛虎怒吼)하여 모든 짐승을 꼼짝못하게 하는 것 같은 품격이 있었다고 한다면,근래의 무교회의 집안싸움은 또는 대 교회싸움은 적의 머리를 몇을 해냈다고 자기 무훈을 자랑한다든지, 혹은 어린이의 손을 비틀고 큰소리를 치는 것같이만 보인다.
마지막으로 무교회에 대한 나의 견해, 따라서 우치무라 선생에 대한 나의 견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조금 덧붙여서, 여러분의 비판을 바라고자 한다. 그것은 "우치무라 선생에게서 만일 무교회주의를 빼버리면 그것은 거세(去勢)된 우치무라가 된다."라는 어떤 분의 논란에 대한 반박문으로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우치무라 선생은 무교회주의의 창도자이기 때문에 "우치무라 씨로부터 만일 무교회주의를 빼버리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거세된 우치무라가 된다."라며 무교회주의의 화신으로 보는 경향도 있으며, 우치무라 선생은 무사의 후손이기 때문에 기독교적 성도로 보기보다는 영계의 군국주의자였고 호시탐탐 조선반도의 영계에 침입하려는 자였다고 만평한 사람도 있고, 그 외에 귀족적 인물이라느니 난신국적(亂臣國賊)이라느니 위선자라느니 하여 보는 눈이 다르면 인식도 다르기 마련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이들의 관찰은 모두 장님의 코끼리 더듬기에 지나지 않는다. 관찰이 잘못돼다기보다는 다만 그 일부분만을 보았을 뿐이다.
우리가 본 대로의 우치무라 선생의 전모를 말한다면, 무엇보다 우선 우치무라 선생은 용감한 애국자였다. 기독교적 성도라기보다는 첫째 황실에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고 국민을 열애하는 표식적(標式的) 무사이고 대표적 일본제국 신민이었다. 그야말로 우치무라 선생에게서 애국자의 요소를 빼버리면 거세된 우치무라가 될 것이다. 우치무라 선생은 머리 끝에서 발톱 끝까지 전부가 진실한 애국자의 화신(化身)이었다고 우리는 본다.
우치무라 선생은 기독교를 본래의 복음대로 전했다. 무교회주의란 하나의 주의를 수립 창조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물론 우치무라 선생은 무교회주의를 제창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지엽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 근가은 항구불변의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선양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치무라 선생에게서 무교회주의를 빼버려도 넉넉히 성서의 중심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우리들은 단언한다.(중략)
우치무라 선생의 강의에는 매 일요일 600내지 800명의 청강자가 참석하고, 그가 주관하는 잡지 '성서지연구'가 3천 내지 5천의 독자를 가졌지만, 그 청강자와 구독자가 모두 무교회자였겠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지난달 서울에 와서 객사한 나가오[長尾半平(장미반평)] 장로 같은 이는 열심 있는 교회신자이면서 오데마치[大手町(대수정)] 집회의 중견이 되어 우치무라 선생에게서 배우고 불교도까지도 '연구지'를 통해서 배운 일이 있다. 각인각양으로 배울 것을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다.(중략)
우치무라 전집 기타의 선생 저서가 조선기독교계의 교역자와 교회원들에게까지 널리 읽혀지고 있는 것은 그 속에 성서의 진리가 주제로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소위 무교회주의자로서 열광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그들을 의심할 자가 있으리요.
이것이 나의 근래의 무교회론이고 우치무라 선생관이다. '무교회주의'와 '우치무라 간조'와는 동의이어(同意異語)라는 야마모토[山本泰次郞(산본태차랑)] 주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무교회주의란 교회와의 대립항쟁만에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조선뿐 아니라 얼마든지 있는 이대에 나는 굳이 말한다. 교회와의 항쟁은 우치무라 선생의 전업이 아니다. "무교회주의란 그러한 소극적인 천박한 것이 아니다"라고.
무교회주의란 "모든 진리의 적을 향해서 새로 선전포고를 한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시대와 그 나라의 특색에 따라 현대 일본국민으로서 진리의 최대의 적을 기독교의 교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자는 얼마나 행복한 자이냐! 이제야말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을 공공연히 거부당하고 있지 않는가?(이 문제에 대해선느 성서말씀[聖書노言(성서노언)] 4월호 이시하라[石原兵永(석원병영)] 주필의 논지 이상 이외로 말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교회의 내외를 불문하고 같이 화합하여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때가 아닌가? 무교회의 탈곡의 싸움에 몰두하지 말고 무교회의 혼으로써 하는 다른 전장에 새로운 싸움을 하지 않으려는가?
이제는 참으로 예배 받으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구하고 찾는 양떼는 일본 전 영토의 구석구석에서 미쳐 외치고 있다. "기독교도는 과연 일본사람이냐?"라고 하는 괴로운 외침은, 참으로 충량한 일본국민 가슴 깊이 퍼지고 있다. 규슈지방에서도 평양지방에서도 신교(信敎)의 자유가 공공연히 유린당한다는 보도가 벌써 몇 번이나 거듭 들려온다. 우리들은 순교까지 각오하지 않아도 아직 괜찮은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순교를 각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밖에 있느니 안에 있느니 하면서 싸우고 있을 여유가 있다는 말인가?
일본의 무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일본국민이 당면하고 있는 진리의 최대의 적을 향하여 남자답게 싸우면서 무교회의 적극적인 진리를 나타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조선을 위하는 것이 되고, 세계 구제의 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가 일본의 기독교도에게 기대해 마지않는 바 큰 싸움을 싸워주기 바란다. 그리고 일본 혼을 가진 바 일본의 기독교도는 교회의 내외를 막론하고 교파를 불문하고 하나가 되어서 이 어려운 싸움을 싸워내서 전 인류의 진리에의 약진에 일대 원동력을 기여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또 기원해 마지않는 바이다.

('37. 4. 5. 야마모토 주필 성서강의)           


[차 례] [이 전] [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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