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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anchthon), 쉬트라우스(Jakob Strauβ) 같은 복음주의적 신학자들과 제후들, 시 정치가들을 재판관으로 지명하였다.75) 농민들의 호소를 받은 14명 중에서 오직 루터만 농민들에게 응답하며 평화를 호소하였다. 멜랑히톤, 브렌쯔(Brenz), 슈트라스부르크의 쩰(Zell)과 카피토(Capito), 부처(Bucer) 등이 글을 썼지만, 제후의 요청 등에 따라 특별한 사건과 "농민 12개조"의 일부에 대해 견해를 표명했을 뿐이었다. 루터만 "평화 권고"를 써서 농민들의 12개조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면서 평화를 호소한 것이다.76)
루터는 1525년 4월 15일 조금 전에 "농민 12개조"를 받았다. 그러나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남서부 독일의 반란에 관해 더 이상 소식을 알지 못했다.77) 루터는 작센의 선제후령에서 반란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없었다. 루터는 만스펠트의 알브레히트 백작(Graf Albrecht von Mansfeld)의 요청으로 아이슬레벤에 학교를 세우기 위해 멜랑히톤, 아그리콜라(Johann Agricola)와 함께 여행하기 바

75) 그러나 농민들은 뮌쩌나 칼슈타트는 지명하지 않았다. Brecht, op. cit., S.174. 이 점은 농민들이 처음에는 평화적인 해결을 생각하였으나, 3월말 경 성과 수도원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였고, 이 폭력은 4월 16일 바인스베르크(Weinsberg) 점령 후에 극에 달하였다는 사실과 연결시켜 고찰해 볼 수 있다. 즉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평화적 해결을 원해 루터 등을 재판관으로 지명하였지만, 루터가 "평화 권고"를 써서 답변을 한 것이 도착하기도 전에 폭력화하고 말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루터는 반란이 처음에는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며 반란을 반대하였다. Supra, pp.165-6.
76) Kirchner, op. cit., S.228.
77) 4월 초에농민들은 울름(Ulm) 부근 라이프하임(Leipheim)에서 슈바벤 동맹군(der Schwabische Bund)과 전투에서 처음 패배하였다. 투링엔-헤세 경게선 지역에서는 4월 중순경깢. 뮐하우젠 근처에서는 4월말까지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Ibi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