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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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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긍정의 세계에서
                                                     김 유 곤


 내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릴 4: 13)

 황재환씨는 피아니스트다. 그런데 그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귀도 한쪽이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한쪽 손이 없다. 신문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서 인터뷰를 했다.“아니, 한 손으로, 한쪽 눈만으로, 한쪽 귀만으로 어떻게 피아노를 그토록 잘 연주하십니까?"  그 때 황재환씨의 대답은 이랬다 : ”  한 손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한쪽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악보를 볼 수 있습니다. 한쪽 귀가 들리기 때문에 얼마든지 연주가 가능합니다."  기자는, 없는 쪽에 초점을 맞춰서 물었다. 하지만 황씨는, 있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다. 똑같은 상황을 놓고 사람은 얼마든지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한없이 감사할 수도 있다.

 
 불평과 원망과 탄식은 부정적 인생관에서 나오는 이파리들이다. 그 깊숙한 구석에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 감사와 만족과 찬송은 긍정적 세계관에서 맺는 열매들이다. 그 배경에 성삼위 하나님이 좌정 해 계신다. 하나님은 절대 긍정의 최정점(最頂点)에 서 계신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긍정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최대의 부정(不定)이다. 악마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에게 임하는 은복을 도둑질하며, 사람을 멸망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류 세계에 파견되신 절대 긍정의 대왕 (大王) 예수 그리스도님은, 양(羊)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단정적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참이요, 생명이요, 또 거기에 이르는 길이다. 그 어느 누구든지 나를 통하기만 하면 하늘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요 14: 6). 이것은 절대적인 긍정 진리(Affirmative Truth)다. 촌보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독단적(독보적· 독선적)진리다. 예수님만은 이렇게 말씀하실 자격이 충분히 있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가장 위험한 순간에 양(씨 알)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 자신의 목숨을 가장 참혹한 죽음인, 십자가 위에서 내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인류의 지도자라느니 구원자라느니 하는 타종교의 교주들은 어느 하나도 인류를 살려내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도리어 위급한 때엔 자기만 살려고 도망친 “삯군” 들이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사람을 살리려는 애정과 연민과, 희생의 실천을 모두 갖추신 분이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사랑이나 교훈은 한낱 구호(口號)에 그칠 뿐이다. 삯군은 원래 품삯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양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살려고 도망치고, 양을 돌아보지는 않는다 (요 l0: 13) .  

                       
 악마는 절대 부정의 왕초다. 예수님 외에도 인류의 구원자가 있을 수 있는 양, 인류를 자꾸만 헷갈리게 만든다. 그래서 인류는 영원한 죽음의 나락(奈落)으로 끌고 내려간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많은 그리스도들 중의 하나라고 그들은 가르친다. 종교 다원주의자가 그들이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 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람이 영원히 사는 구원이 있다(행 4: 12) > 그런데도 그들은 베드로의 이 정언(定言)을 무시한다. 그들은 부정(否定)의 명수(名手)들이다. 베드로의 이 단정적인 절대 긍정의 정언은 성령에 충만한 상태에서 나온 발언이요, 전 성경 기록의 중핵(中核)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자를 우리는 크리스찬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성경이야말로 절대 긍정의 서고(書庫)다. 성경 이외의 모든 책틀은 허무와 속박과 오탁(汚濁)의 기록물이다. 오직 성경만이 생명과 빛과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원 저자다. 성경 이외의 모든 책은 악마가 그 원류이거나, 먼지로 지음받은 아담의 자식이 머리를 짜내어 썼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인류에게 하사(下賜)하신 이유는, 절대 긍정자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주 만물· 만사를 간취(看取)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읽을 때 역사(歷史)의 경륜과 구원의 섭리가 훤히 보인다. 그런데 성경을 덮어둔 채 인간의 두뇌와 안구(眼球)로만 보고 생각하니까 털보 멍청이 영감 다윈처럼, 진화론을 주창하면서 사람은 아메바에서 잔나비를 거쳐 진화된 것이 라고 우긴다. 그리고 거기에 동조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복사판이다. 이 얼마나 절대 긍정의 사실적 적시(事實的摘示)인가. 그 반대로, 인간은 원숭이의 새끼다, 라고 하니 얼마나 절대부정적 자기 비하(卑下)인가.
 성경은 그 최초의 2장인 창세기 제l, 2장과, 최종의 2장인 요한계시록 제2l, 22장의 4개 장에는 부정적(否定的)인 단어와 글이 전혀 없는, 절대 긍정의 세계만이 전개되고 있다. 빛이 있다. 생명이 있다. 큰 사랑의 날개가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 4장을 제외한 다른 장에는 절대 부정의 두목인 사탄 또는 악마가 도량 (跳梁) 한다. 인류가 절대 긍정의 구세주님께로 귀순하는 모습을 배아파하는 모든 죄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대한 플러스(Plus· +)다. 플러스야말로 긍정의 표호(票號)다.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합치는 것이다. 헤치는 것이 아니라 모으는 것이다. 빼기가 아니라 더하는 것이다. 위로 하나님과 사람 과가 합일(合一)함이요, 옆으로 사람들과 사람들이 화합(和合)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十字架)다. 그래서 악마는 십자가를 싫어한다. 더구나 십자가에 나타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진리를 아주 혐오한다. 인류의 영원하고 유일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대속적 중보 기도가 기록되어 있는 요한복음서 제 l7장 전체를 찬찬히 음미하면 곧 하나님과 예수님과 온 인류 특히 온 성도가 〈 하나되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한결같이 영· 육의 치유가 있었다. 현대의 모든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적십자 “(赤十字)는 이것을 본딴 것이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용서와 구원과 부활이 있었다. 생명과 빛과 사랑과 섬김과 세움〔 建設〕과 겸비 가 있었다. 이 모든 명사는 다 절대 긍정적 명사다.


 그런데 악마 또는 사탄은 이와 정반대다. 악마는 마이너스(Minus· -)의 원조(元祖)다. 마이너스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부정(否定)의 표상이다. 합치는 게 아니라 분열시키자는 거다. 정치 행태 중에 "Divide and Ryle " 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방을 쪼개놓고 다스리자는 거다. 각개 격파 전략이다. 사탄도 이 전략으로 인간세계를 지배하러든다. 부부끼리 갈라놓고, 노· 사를 반목케 하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서로 앙숙처럼 만들고, 큰 나라와 약소국가끼리 서로 원수시하게 만든다. 그래놓고 뒤에서 해롱거린다. 악마는 연기와 같다. 악마가 들이닥치는 곳에 눈물이 나고, 슬픔과 한숨이 있다. 질병과 파멸이 있다. 잔인과 복수가 있다. 우울과 비관이 있다. 악마는 죽음과 어둠과 미움과 파괴와 교만의 총본산이다. 이 모든 명사는 다 절대 부정적 명사다. 우리는 긍정의 편에 서야하고, 부정을 배격해야한다.
 불교에서는 허무(虛無)를 강조한다. 선종(禪宗)에서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했다. 불교의 극치는 공허 (空虛) 요 적멸 (寂滅) 이다. 이야말로 부정적 (否定的) 사유의 철학이다.
 성경은 다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롬 4: 17).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눈앞에 보는 것 같이 여기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했다. 절대 긍정의 세계다. 부정적인 온갖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마라.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여겨지는 때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때다.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가 말· 생각· 행실을 부정적인 영역에서 긍정적인 영역으로 영구히 이전(移轉)해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 l2 정탐꾼 중에서 그 정탐꾼, 즉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긍정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을 했다. 그래서 이 두사람만이 젖과 꿀이 철철 흐르는 가나안 복지(福地)로 들어갔다. 나머지 l0명의 정탐꾼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절대 긍정의 하나님과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파장(波長 : Wave length)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할 수 있거든” 이 무슨 소리냐? 믿는 자들에겐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구주 예수님은 인류에게 가르치셨다(막 9: 23). 불평 대신에 감사를 해라. 원망 대신에 칭송을 해라. 절망 또는 낙망하는 대신에 소망을 가져라. 슬퍼하질 말고 언제나 기뻐해라. 탄식하질 말고 항상 기도해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요, 명령이다.
 기도하고 어떤 환경에서나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는 맞지 않는다. 공부를 안 하니까 자녀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고 타이르는 것이 부모다. 자식이 늘 공부만 하고 앉았으면 공부하라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이제 공부 그만하고 자거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좀처럼 웃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질 않기 때문에(안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성경 도처에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타이르고 계신다.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는 훈계에 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인간의 육과 혼은 원래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 자아인 영 (炅) 이, 육과 혼을 휘어잡아야 한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 부정적]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긍정적]이다(롬 8: 6).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얼마든지 억누를 수가 있다. 육과 혼에 질질 끌려다니면 영이 시들고 만다. 왕이 신하를 부리듯 인간의 영(성랑을 모신)이 육과 혼을 부려야 한다. 영이 주인이고 육은 종이기 때문이다.


  절대 긍정의 세계에서 살려면 예수님의 시각(視角)에서 만사를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손으로 내 손을 이끄시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발로 뛰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날마다 쌓아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보았던 때엔 넘실 거리는 파도 위를 쉽사리 걸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을 직시하기를 그치고 파도를 자기 시각으로 보았을 때 물 속에 빠져들었다. 즉각 입으로 주님을 불렀다. 손을 내밀어 주님의 손을 붙잡았다. 발로 바닷물을 밟고, 예수님이 타고계신 배 안으로 걸어 올라 갔다. 곧 부정적인 낭떠러지에서 절대 긍정의 함선으로 옮겨탔던 것이다.
 우리가 말과 글로 어떤 사상(事象)을 표현할 때에도, 이왕이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가령,“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정죄되어 멸망한다.” 고 무섭게, 협박조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지없이 기뻐하셔서 그 사람을 영원한 영광의 천국으로 끌어올리십니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말이다. 결국엔 동일한 사상이지만 이왕이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희망적으로 말하라는 것이다. 산상수훈에 나 오는 “황금률” 도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해주어라 “(마 7: 12)고 가르치셨다. 적극적· 긍정적으로 표현하셨다. 그런데 중국의 공자는 이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 “己所不欲勿施於人” 즉 “남들이 네게 해주기를 원치 않는 것을 너도 그들에게 하지 말아라” 소극적이요 부정적이다. 똑같은 말이라도 이왕이면 우리는 긍정적· 적극적으로 표현해 버릇하는 게 좋다.


  영국의 문학평론가요 역사학자인 토마스 칼라일(1995- 1881)은 그의 〈 옷 철학〉에서 인생의 의미를 이렇게 논했다 : “인생은 자기 판단에 의해 책임을 지고 행동하는 자유 의지의 주체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육적인 행복만을 무한히 추구하는 어리석은 꿈에도 깨어나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자기부정(自티否定)의 경지에서 벗어나, 영원한 긍정(EveHasting Yea)에 도달하게 된다. "
 그렇다. 하나님만이 영원한 긍정의 대주재요, 천국이야말로 절대 긍정의 세계다. 우리는 천국을 오늘, 여기서부터 살 수가 있다.

 


p32 (248)~p38 (254)
성서신애 333호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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