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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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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문

‘신앙과 행위’ 관련 내가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 재론 

 

(인터넷 한 그리스도교 사이트에 종종 공감되는 글을 쓰는 교회의 한 장로분이 그리스도교의 유명한 고전인 존 변연의 「천로역정」 에서 주인공이 세상을 버리고 천국에만 올인하는 신앙자세를 비판하며 올린 글을 읽고 소감 겸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서 내가 믿는 그리스도교를 다시 좀 정리하여 올린다. 먼저 그분의 주장의 요지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 은 개신교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신앙서적으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장차 망할 이 세상을 등지고 많은 유혹과 모진 고난을 극복하며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야기다. 전도자의 권고에 따라서 망할 세상의 명예나 부는 물론 처자식까지도 버리고 오직 천국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신앙인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천로역정」 에서는 이 땅에 이루어져 가는 천국은 외면하고 예수의 재림 때에 완성될 천국만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 왜 그 작품에서는 요단강을 건넌 후에 들어갈 하늘나라만을 강조하고 있는가? 그 답은 「천로역정」 의 작가 존 번연이 청교도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정교도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속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외면하면서 영적인 삶을 추구했다. 「천로역정」 에는 이러한 청교도주의가 잘 나타나 있다. 

 

 영적인 삶에 올인하는 그 주인공의 신앙은 본받을 만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세상을 외면하고 저 세상에만 몰두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천로역정」 의 주인공의 이름이 크리스천 인 것을 보면, 작가 번연은 그 주인공을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내세운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외면하는 그 크리스천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소극적으로 세상을 외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 악한 세상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로 만들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 분의 견해는 그리스도 신자는 저 세상, 하늘나라의 추구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 현실 세계를 하늘나라로 만들기 위해 진력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도 그것이 아니냐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헌신적 삶, 신앙행위의 강조이다. 그러므로 그 요점은 결국 그리스도교 이해에서 계속 부딪쳐오는 문제, 신앙만이냐,신앙과 행위의 병행이냐의 문제로 모아지며 이분의 주장은 이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분의 글에도 명확하지만 이 관점에 있는 분들은 예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 하셨고, 안식일에 대해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무엇보다 자신이 발 딛고 서있는 이 세상 현실을 외면하고 저 피안(彼岸)의 세계에만 매달릴 때 그 종교가 공허함 외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논리다. 

 

 그러나 나는 그 점에서 기본적으로 생각이 좀 다르다. 물론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 같은 내세주의 내지 신비주의 신앙이나 축자영감설 같은 문자주의적 성서이해 등은 불건전, 비성서적, 비복음적인 것으로 타기(唾棄)한다. 그런데 나는 우선 예수의 종교의 핵심을 신·인(神·人) 관계로 이해한다. 적어도 그리스도교는 ‘관계의 종교’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내게 결코 머리만으로 이해하는 교리가 아니며 내가 믿는 예수교의 실재다. 이 관점에서 내게 성서 전체는 다음 세 마디 말로 요약된다. 정상관계-관계의 이탈-관계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모든 이해는 이 토대 위에서 출발해야 되며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줄기이고 따라서 다른 문제들은 이에 비하면 다 곁가지들이라고 믿는 자이다. 그러므로 믿는다면서 상응하는 행위 소홀을 답답해 하는 이들 만큼이나 내게는 줄기에 올인하지 않고 곁가지 주위를 맴돌려는 사람들이 답답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셔서 희생시켰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라 할 때 그리스도교는 분명 인간을 위한 종교인 것은 맞다. 그러나 성서는 동시에 그 ‘인간을 위한 일’의 성격을 도덕적 인간, 이웃 사랑, 사회참여에 두지 않고 그 모든 것에 우선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에 둔다. 「천로역정」 의 주인공이 하늘나라를 향해 올인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나는 번연이 세상을 버리고 오직 천국만을 향하는 이른 바,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신앙인을 강조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인생이 추구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본다. 곧 본향을 향한 인간의 갈망이며 그것은 역시 이탈된 창조주의 관계의 회복을 묘사하고자 한 것이다. 번연은 거기서 단지 그 일을 위한 인간측면에,야고보의 시각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어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성서는 그 문제 해결의 본질, 그 중심은 역시 인간의 도덕적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인 점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으며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과정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신본주의에 의하며 인간 편에서는 감사, 순종이 있을 뿐임은 ‘탕자의 비유’가 보여주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행위는 결과이다. 

 

 거듭 생각해도 예수의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그것을 믿어서 세상 기준의 좋은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는 세상 기준의 좋은 사람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는 관심 없다. 세상적 관점의 좋은 시민, 선한 사람,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은 굳이 그리스도교 신앙인, 그리스도의 사람, 예수의 노예 아니라도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석가의 삶을 본받고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아우렐리우스의 명상에 감명 받고 공자, 노자의 도덕률을 처세훈으로 삼은 사람도 실천할 수 있고 그들의 최종 목적도 그것일 수 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은 그렇게 볼 수 없다. 내게는 믿음 타령 그만하고 사랑의 실천에 나서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이들은 실례이나, 분명 이 창조주-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전부인 예수의 종교를 기본적으로 아직 도덕교 차원의 인식에 머무르고 있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믿는다면 행동하라"는 말은 타당한 권면이다. 바울도 그의 편지들을 마치면서는 의례 행동을 말씀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 권면에 앞서 심혈을 기울여 신앙을 설명, 강조했고 그것을 위하여 삶을 바쳤던 것이다. 결국 그가 일생을 바쳐 전한 복음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서 예수께서 그 안에 내주하여 그를 이끌어가는 그런 인격들이 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권면하는 믿는 자의 '행위’도 엄밀하게는 자기를 예수께 넘겨 준 자들의 행위였다. 그런데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죄”(롬 14:23)라고 까지 하는데도 최소한 그리스도교의 행위의 관점에서는 신앙에 의해 발동되지 않는 행위는 별 의미 없다고 하는 데도,신자의 크리스천다운 삶을 촉구하는 분들 중에 먼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을 외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행위 없음에 비판이 없을 수 없으나 무엇보다 신앙의 강조가 먼저이어야 하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사실 이 땅에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문제도 행여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서 하늘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생각 같은 것은 아예 거두고 빈손 들고 그분께 나아가 매달리는 일에 전념할 때 그 분에 의해서 성취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먼저 신앙을 강조하지 않으면서 신앙을 행동과 병행하라는 요구는 일견 매우 당연하게 들리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모르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행위는 신앙양심의 발동에 의한 행위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령이 변화시킨 중생한 인격에서 나오는 것인데 단지 교회에 다니고 무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신앙에 따른 행위가 없다고 비판할 일이 아니다. 비판하려면 그에 앞서 신앙을 강조할 일이고 그보다는 더욱 스스로 자신의 삶으로서 그것을 보이는 일이다. 

 

 나는 우찌무라 간조가 그의 ‘종교좌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에서 성서에 근거하여 고백한 다음의 말씀을 또한 내가 믿는 기독교의 본질을 갈파하는 말씀으로, 그러므로 내가 추구해야 하는 문제로 삼고자하는자이다.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그 서명한 교리 여하에도 있지 않고,그 소속한 교회 여하나 유무에 의하지 않고 또 반드시 그 품행의 완전무결함에 의하는 것도 아니요, 무릇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믿으며,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의지한 사람은 여기 있다 ” 

 

 나의 크리스천다운 행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다. 오직 나의 전폭적 관심은 예수 믿는 일이다. 잡힌바 된 것,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일이다(빌 3:12-14). 

 

그리스도의 사람 제53호   한병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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