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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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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문>

 바울의 속죄론 비판에서 느끼는 것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골 2:6-8)

 

 필자는 최근에 동양철학에 의해 기독교를 이해하려 하여 기독교에 관한 나름의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고, 또한 대단히 경건하고 금욕주의적 삶에 의해 주목을 받고 있는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에 관한 책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 소감은 매우 미진한 형태로마나마 성서신애지(7월호)에 올린 바가 있다.
 그런데 다석 선생의 수제자로서 다석 사상의 전도사라 할 만큼 다석에 관한 많은 저술을 한 박영호 선생의 글들 중 필자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흔히 진보주의 신학 계통에서 많이 보아 온 바울의 속죄신앙 관련 비판들이었다. 예전에 한 일간지에서 민중신학 계통의 문 모 목사분의 바울 신학 비판과 매우 흡사한 논리를 펴고 있어 잠시 이 분도 그 계통인가 생각되었으나 반복되는 심한 비판들을 읽으면서 일단 의도에 있어 문 목사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 목사는 그 신문 기자와의 대담 기사에서,

 

“로마 문화를 잘 알면서도 골수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유대인들의 예수를 메시아로 만들고, 황제신학체계를 이용해 기독교 신학체계를 만들었다. 아우구스투스를 이기기 위해 죽지 않는 부활과 심판론을 만들었다 그때 ‘속죄’니 ‘중죄’니 하는 황제신학이 기독교에 들어왔는데, ‘대속 제물’이란 예수의 언행과는 맞지 않는다. 예수는 제물을 못 바쳐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유대인들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며 마음을 편케 해주었다"
                                                                                                                (2015, 5. 18 한겨레신문과의 대담)

 

 박영호 선생도 그의 여러 글들에서 거의 인신공격에 가깝게 바울의 속죄 교의를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원죄의 속죄를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원죄를 저질렀다. 인류는 그 원죄로 말미암아 멸망의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류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몸을 입고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죽었다. 이 교리를 믿으면 그 원죄에서 구속되어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 마치 옛날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신화 같은 얘기가 2천년이나 권위를 가지고 인류의 정신계를 지배하여 왔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의 속죄교리는 창세기의 신화에 이어지는 속편 신화이다. 이를 귀중한 기독교 도그마(교리)로 믿는 이들에게는 대단히 죄송스런 이야기지만 사도 바울의 속죄이론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속죄이론을 믿는 이는 자신이 바울교 신자이지 예수교 신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영모의 기독교 사상, 76쪽>

 

“스스로 예수의 사도라고 칭한 바울로는 예수의 모습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예수의 사도일 수 없다. 그런데도 스스로 사도라 칭하였으니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은 참아줄 수 있다. 바울로는 스스로 예수의 영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며 자기는 죽고 자기 속에 예수가 산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로의 생각이 핵심에서는 하나로 이어져야 할 텐데 전혀 다르다. 예수는 얼나(영적 존재)의 깨달음 신앙인데 바울로는 기복신앙이다. 예수는 스스로 깨달으라는 자율신앙인데 바울로는 이것을 믿으라는 타율 신앙이다. 그런데도 바울로의 편지에만 예수 이름이 268번이나 나온다. 바울로가 예수를 독점한 듯하다. 양식 있는 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사특함의 표본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석 마지막 강의, 395쪽>

 

 “바울로는 탐(貪). 진(瞋). 치(癡)의 삼독(三毒)의 수성(默性)(**불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근본적 번뇌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의미함-필자) 가운데 놀랍게도 진성(분노)이 가장 세었다. 진성은 권(력)욕으로 나타난다. 바울로는 종교적인 자신의 왕국을 개척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반대되는 종교 세력을 용인할 수 없었다. 거기에 예수도 포함되었다. 권욕은 물욕 색욕보다 더 두렵고 더 추악한 것이다. 기독교의 죄악사는 바울로의 권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석 마지막 강의, 91 쪽>

 

 읽으면서의 느낌은 우선 이의 사실관계를 떠나 이것이 다석 선생 관련 가장 많은 저서들을 냈으며 한학, 동서양철학과 성서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은 박학한 학자의 인상을 주는 인물의 글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의 신앙입장과 다르다고 해도 신약 27권 중 13권을 저술하고 어거스틴, 루터, 웨슬레를비롯하여 기독교사의 셀 수도 없는 기라성 같은 대 신앙가들을 회심시키거나 혹은 깊은 영감을 준 사람을 한낱 세속주의 종교권력 추구자 정도로 폄하하면서 저주 수준의 거친 비난들을 퍼부은 글들이 읽기 민망할 정도였다. 

 그는 이 인용문 외에도 ‘다석 마지막 강의’ 한 권에만 세 번을 더 바울의 주로 속죄 교의, 그리고 사도신경도 바울의 교의에 근거하고 있다면서 공격하고 있어 틈만 있으면 비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 들게 했다. 이분은 자신의 이러한 논리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주로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하여 전통적 기독교 교의에 비판적인 톨스토이, 간디, 토인비, 슈바이쳐 등 사상가들의 발언을 인용하고, 희랍어 지식까지 동원된 많은 성서구절들에 의해 바울의 교의를 반박하고 있었다.

 

 읽으면서 민중 신학 혹은 해방 신학 계통의 진보 신학이 주로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공평이나, 사랑, 자유 등에 초점을 맞춰 이를 강조하려는 과정에서 근본주의 신앙은 현실의 사회 부조리를 외면하고 개인구원에만 매달린다면서 바울의 속죄, 부활 교리와 기적 등을 무시내지 상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으로 변경시키려는데 반해 박영호 선생의 경우는 바울의 속죄 교리와 믿음만이라는 타율신앙 논리가 스승 다석의 자율 신앙의 가르침과 정면 배치된다고 해서, 그리고 속죄, 부활신앙은 계속 종교 갈등을 야기하는 근본주의 신앙이라는 점에서 다원주의 입장인 박 선생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나 생각되었다. 그 외에 대 사도 바울에 대한 그토록 유례없는 인신공격은 정통으로 불리며 속죄를 믿는 기독교인들 중에서 유영모 선생의 기독교 사상을 이단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대한 어떤 감정적인 반감 아니냐는 것 외에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 분이 이토록 분노하는 바울의 속죄교리 비난 논리, 말하자면 허구적인 창세기 창조신화에 근거했을 뿐 예수 자신도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음에도 오직 바울 자신이 종교적 권력욕에서 창안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그 교리 비난에 대해 이 글에서 일일이 사실관계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지면의 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속죄의 문제는 바울이 “아, 나는 비참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고 절규한 데서 알 수 있듯, 그것은 근본적으로 논쟁으로 될 수 없는, 기독교 신자 각자의 죄에 대한 인식의 크기와 그에서 비롯되는 그의 내적 체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석 선생의 기독교 사상을 읽고 박영호 선생의 속죄교리 비난을 읽으면서, 또 그와 함께 이전에 읽었던, 사회참여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민중, 해방 신학 등 진보주의 신학을 떠올리면서 새삼 느낀 것은 기독교의 속죄문제 자체를 떠나 기독교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기독교를 생각하는 두 가지 관점이었다. 즉 ‘예수 사건’에 의해 성립된 기독교 신앙 문제에 인간이 어떻게 판단하며 접근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역시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즉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들어온 후에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갈림길에 직면하게 되며, 나중에 생각을 바꿀 수도 있겠으나 일단 그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나 생각되었다. 그것은 ‘이끌려가는 길’과 ‘따라가는 길’이다.

 

 전자는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내맡기는 길, 노예의 길이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내가 없는 것이 특정이다. 나는 철저히 거지다. 이제 나는 벌어먹는 자가 아니라 얻어먹는 자이다. 밥상 밑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사육되는 자이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그리스도다. 이제 내 생각이라는 것도, 내 말이라는 것도, 사실상 없다. 성경말씀이 그대로 내 생각이며 내 말이다. 그것은 내 이성에 비추어 이성에 맞게 해석된 것이 아니다. 진리의 판단이 내게 있지 않고 성서 자체 안에 있다. 그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가짐으로써 전부를 가진 것이다. 그의 전폭을 차지하는 것은 그리스도다.

이때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왜 믿음 믿음 하면서 실천이 없느냐?"고 그러나 이 입장에서는 사랑의 실천은 결과로 본다. 즉
실천을 신앙과 분리해 보지 않고 신앙의 결과이며, 열매로 본다. 그것을 ‘신앙 행위’라 하고 신자의 행위의 참 가치를 거기에 둔다. 그 신앙 있으면 그 행위는 나오는 것이다. 소리 나지 않게,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그러므로 왜 신앙 있다면서 그에 따른 행위 없느냐고 문제 삼는 것은 그 신앙과 행위의 상호관계의 특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 바탕이 되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은 더 옳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을 묻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 했다(요 6:29).

 

 한편, 후자에는 기본적으로 ‘나’가 있다. 그리스도는 본으로 삼고 따라가야 하는 대상이다. 나도 명색이 주체적 존재이므로 따라가되 나는 없는 자 같이 다 맡기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 따라가야 한다. 실행은 내게 있다. 본은 나를 없이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목표로 해서 실행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실천행동이 중요하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때 성서의 말씀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의 허구적인 신화와 기록자의 사실 오인 등이 많이 반영되어있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황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죄’ 패러다임은 구약, 특히 유대교 랍비인 바울의 오해에서 온 논리이지 신약 예수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그 본질은 용서와 사랑이다. 예수는 그것을 체현하여 본을 보이신 분이다. 그는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궁핍과 억압과 다툼과 불평등으로부터 해방시켜 모두 다 동등한 하나님의 자손으로 평화롭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바울이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인간 죄 문제의 유일한 해결방식으로 믿고, 예수를 자기의 속죄주로 받아들여 그에게 자기를 맡기는 신앙의 길을 택한 사람은 세상적으로 미련하게 보인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고 했으므로 세상적 기준에서는 실제로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있다. 나를 비움으로써 갈라디아서 2:20의,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한 대로다.

 

 한편, 죄 문제를 앞의 박영호 선생의 경우처럼 신화에서 탄생된 문제로 보고 속죄의 교리를 무시 내지 배척하면서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려는 신앙의 길, 내어맡기는 타율신앙의 길이 아닌 자율신앙의 길을 가기로 선택한 사람은 자연히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이성이요 지혜다. 그러나 속죄를 부정하고 ‘내’가 살아있는한 이미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없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지혜와 지식을 갖추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철학, 사상 등을 섭렵하고 그래서 그 심오함에 매료되면, 말이야 뭐라 하든, 벌써 실질적으로 그의 사상을 지배하는 것은 철학, 사상인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벌써 기독교 안에 그런 폐단은 나타났던 것이다. 잘 알려진 영지주의였다.

 

기독교 신앙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또 어떤 필요에 따라 성서로부터 끌어다 자기의 사상을 전개하고자 할 때에도, 서 있어야 할 기본 토대와 중심이 있음을 성서는 강조한다. 그것이 ‘속죄’의 교의다. 그것은 인간과 그리스도를 연결시키는,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유일한 끈임을 강조한다. 기독교 신앙은 ‘미련한 것’을 버리고 ‘지혜’를 택하는 순간 철학자, 사상가 지혜자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와의 내적 관계는 단절되는 자라는 것이 성서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속죄의 교의를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무수한 주장, 논리들을 막아내는 굳건히 서 있는 확고한 증거요 방패로서 시대를 초월하여 그것들을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 제 50호  권두문

주필 한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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