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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그리스도의 사람
2018.05.20 05:38

다시 부활절에 - 그리스도의 사람 제 49호

조회 수 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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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문>
다시 부활절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이사야 26:19)

 

 그리스도 부활의 사실과 이에 의한 신자들의 부활 확증은 우리의  신앙활기와 유지의 원동력이다.
 "바울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1)고 한 것은 초대교회 이래 기독교 신앙에 들어온 이들이 공유해온 한결같은 바램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라 해도 육을 가진 인간에게는 너무 경천동지할 일이어서 곧잘 상식에 가로막히고 이성에 잘릴 것이다. 기독교에 전혀 문외한이 아닌 르낭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구조(構造)의 허설(虛說)"이라 했고, 쉬트라우스는 부활을 "최면술을 건 것"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과연,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시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시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고전 1:21)"은 이 때문일 것이다.

 여기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우리 말 표현이 명확하지 않은데 그 의미는 전도 자체가 미련하다는 것이 아니다. 전도의 내용이 세상에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당시 사도들을 통한 전도의 핵심적 내용은 부활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12)"는 말씀에서 그의 확신과 함께 답답함이 묻어난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나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고,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으며 맨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전 15:  5-8)"는 말씀은 바울의 부활증언의 백미다.

 우리가 아는대로 사도행전은 결국 "예수는 부활하셨다"는 소식하나를 들고 목숨을 걸고 전 소아시아, 그리고 에게해를 넘어 그리스, 로마까지 누빈 기록이다. 그 과정에서 유대 총독 배스도로부터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아그립바 왕으로부터 자기에게 설교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행 26:24, 28). 당시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기 위해 체포된 상태였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자기 처지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 말도 안 되는(?) 소식을 가지고 그토록 목숨을 걸고 전하려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미쳤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이다. 이에 바울은 묶여있는 처지든, 재판을 받아 운명이 어떻게 되든 그런 문제는 안중에 없다는 듯, "묶여 있는 것 외에는 그들도 자기와 같이 되기를 기원한다"고 답했던 것이다. 바울의 부활증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부터는 이토록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과연 실성한 사람처럼 치열하게 보내다 끝내 순교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는 그런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타인의 증언이 반드시 내 이성을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성을 만족시켰다 해도 믿음은 또 다른 차원인 것이다. 그런 문제들은 귀로 들었다고 해서 들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라고 누누이 강조하시고 심지어 '오병이어'의 기적의 빵의 현장에도 있었던(요 6:5-7) 제자 빌립이 예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은 이제까지 듣고 보았어도 그는 듣고 보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더욱이 나의 부활이라 한다. "부활을 본 사람들 중에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있는데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했는데, 그리스도의 부활도 이처럼 믿기지 않는 것이다.하물며 한줌의 재로 사라질 것이 확실한 내 육체의 부활이랴!
 우찌무라는 믿는 자의 부활을 설명하여, "부활의 소망은 자기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는 것이다. 신자는 사람으로서 부활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그가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자의 부활은)그리스도가 신자에게서 부활을 되풀이하시는 것이다."고 했다. 즉 나의 부활은 먼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절대 의존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정되면 이 설명도 이해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해되었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요구하는 것, 즉 내 전인격으로 그것을 받는 일, 내 인생을 거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신앙의 문제가 그렇듯, 더욱이 이 이성이 배척하는 대표적이라 할 부활의 문제, 그러나 바울을 비롯한 신뢰할만한 성서증인들의 이 놀라운 증언은 이성에 맡기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 안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그랬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처럼 그렇게 했을 때 그들은 증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자세가 바로 바울이 말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부터 120년 전 우찌무라 간조는 부활주일에 한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연을 했다.

 지금의 세상은 실망의 소리로 가득 차있다. 신문이 외치는 것은 무엇이냐? 거리에서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대만의 관리가 부패했다. 절의 중이 부패했다. 부패 또 부패, 사회는 이제 끝장이다. 구제책이 없다. 아아, 들리는 것 모두 다 실망의 소리 아닌 것이 없다. 인간의 운명은 정영 그런 암담한 실망의 사회에서 죽어야 하는가? 혹은 그 이상의 사회가 있어 맑고 깨끗한 희망의 광명이 빛나는 곳이 있는가?
 기독교 신자는 당황하고 실망하여 의지가 꺾이고 원기를 상실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세력을 얻었다. 이렇게 부활문제는 현 사회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이상을 높이고 격려하고 이로서 도(道)를 행하게 하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내촌 '부활의 희망과 신앙' 중에서)

 1세기도 훨씬 더 지났으나 이는 또 오늘 우리 사회의 변함없는 절망적  실상이기도 하고 부활의 사실은 그런 가운데서도 믿는 자가 소망을 가질 근거이기도 하다. 시대는 변하지만 인간사회의 구제불능의 본질은 여기나 저기나 변함이 없다. 요새 속속 보도되는 국가 최고 지도자의 부패상, '미투운동'으로 대표되는 정치계, 학계, 예술계, 문학계, 종교계 등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광범위하게 드러나는 저 더러운 모습들, 일찍이 노평구 선생이 이 사회가 '음탕의 영'에 잡혀있다고 개탄했던 그 모습은 그동안 연령과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더욱더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는 경고를 받고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누구보다 어렵게 자신을 드러내면서까지 폭로하는 이들의 중요한 목적도 그것이겠으나 과연 바램만큼 사람들이 대오각성하고 그렇게 해서 도덕사회로 나아가게 되리라고는 성서적 인긴관에서 볼 때 내게는 기대난망이다. 들불처럼 번지는 저 현상을 보면서 내게 떠오르는 것은 예레미야의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램 13:23)"였다. 본성이 바뀌지 않고, 가치관이 현세에 국한된 인격,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사 22:13)하는 인격들에 있어서는 '미투 운동'도 '도덕 재무장운동'등처럼, 그 효과는 유효기간의 문제일 뿐 욕망은 곧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노예 잡는 악한 욕망은 결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일시적 후회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유대 총독으로부터 '미쳤다'고 비웃음 받던 부활신앙, 그 소망에 사는 신앙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상이 어리석다고 배척하는 죽은 자의 부활신앙은 그러나 초대교회 이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다(고전 1:25)"는 말씀을 진리로서 굳게 붙드는 변화된 인격의 신자들에게 신앙의 활기를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인격만이 또한 내 이웃을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머물다 갈 자리도 정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 제 49호  주필 한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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