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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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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문>
송두용 선생의 신앙특성
(송 선생님 기념회에서의 소감에 가필한 것)


 종교의 유익을 생각하는 분들 중에 어떤 종교든 그것이 인생에 유익한 것이 되지 못하면―물질적 의미 아닌 사랑, 윤리도덕, 정직, 근면 같은 인생이 추구해야할 가치에서―그것은 공허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당연하게 들린다.
 그런데 송두용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적어도 선생의 기독교신앙은 이와 결이 다른 것을 느끼게 된다. 즉 선생의 신앙에대한 입장은 하나님은 그냥 믿어야 할 분이라는 것이다. 유익, 불익 같은 문제조차도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판단시하는 것이니 우리는 그저 믿을 뿐이라는 것이다.

  신앙은 믿기만 하는 일이다. 이해득실, 희비애락, 흥망성쇠, 건강질병,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다. 죽어도 살아도 믿기만 하는 일이다. 처음도 나중도 언제 어디 무엇에고 그저 믿기만 하는 일이다.   ('기독교의 신앙', <성서인생>지 3호, '55. 8)
 

  그러면 믿음이란 어떤 것이며 무엇이라 할 것인가? 믿음은 있어서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글로도 말로도 도무지 형언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다만 믿음은 믿음이다. 그러니 믿으라. 믿기만 하라고 할 뿐이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 <성서인생> 25호, '57. 7)

 사람들은 '내가 이래서야 믿을 수 있나, 어지간해야 믿지'하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이 큰 잘못이다.... 인간은 자기의 잘못이나 부족을 고칠 수는 없다. 그것이 된다면 개인도 국가도 이모양 이 꼴이 될 리가 없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일이다. 항복한 이상 또 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오직 믿기만하면 된다. 잘잘못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과 회계하자는 참람하고 교만한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 '잘'이 있을 리 없다. ('믿음과 청산', <성서인생>지 6호, '55. 11)  

 믿음은 믿음만으로 족하다. 믿음에는 이유도 조건도 불필요하다, 믿기만 하면 된다.  ('할머니의 믿음', <성서인생> 통권 236호, '78. 5)    

 선생의 이러한, "이유도 조건도 따지지 않는" 신앙관은 기본적으로 이처럼 일생을 일관하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관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만이라는, 개신교의 교리이면서 선생이 추구한 또 다른 신앙입장인 "신앙만의 신앙주의"와도 의미가 다르다. 선생의 신앙은 위 "믿음은 믿음만으로 족하다"는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무계산, 무작정에 가깝다.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실재로 믿으면서 지상 아닌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는 소망을 간직한 채 일생을 타지에서 유리방황하다 마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이스라엘 족장들을 신앙위인으로 소개하면서 이런 요지의 설명을 했다.

 "....그들은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자임했다. 그들의 이 같은 자세는 자기들의 본향 찾는 자들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찾는 본향이 떠나온 본향이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으니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다. (히 11:13- 16)"

 그런데 송 선생님의 "무조건"의 신앙은 이스라엘 족장들의 그와 같은 소망신앙과도 좀 결이 다른, 한 단계 승화된 신앙형태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선생님도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강조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말씀하는 소망의 개념에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목적으로 삼는 천국이나 영생 같은 구체적 대상이 거의 없다. 구체적 대상이라 한다면 그것 역시 선생에게는 '믿기만 하라'로 대표되는 '무조건 신앙'일 뿐이다. 선생님의 '믿음'이라는 개념 속에는 그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의 '신앙과 인생'이라는 글의 일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신앙은 소망이다 암흑에서 광명을 보려는 소망이다. 부패한 뿌리에서 새싹을 얻으려는 절대의 소망이다"(성조 7호, '29. 1).
 '암흑', '부패한 뿌리'가 신생하지 못한 옛사람이라면 '광명', '새싹'은 믿음으로 얻는 '의', 혹은 새사람을 암시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의'나 '새사람', 혹은 '영생'을 말하지 않고 '절대의 소망'을 이루는 신앙을 말씀한다. 과연 선생님의 '일'은 "죽어도 살아도 믿기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절대다. 그리고 소망을 이루는 믿음이 절대라면 그 이외의 모든 다른 것은 상대화 되는 것이다. 선생은 매우 젊은 나이에 이 신앙관을 가지고 일생을 사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일생의 삶이 잘 말해준다.

 다음 한 가지 일화에서도 나는 세상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도 선생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는 모두 상대화 시키는, 그것에 다 종속시키는 신앙 절대화의 일면을 보게된다.

 박석현 선생이 한 번은 송 선생께, "고생 복을 타고났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는데 선생은 "아멘"으로 답했다고 있다. 그 '아멘'은 믿는자로서 기꺼이 걸어야 할 길로서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고생 복(福)을 타고 났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생의 일생과 관련해서 볼 때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말씀이다. 초기 송선생님 가정의 재산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들으면 박석현 선생의 말씀은 얼핏, "신앙생활을 해도 자기 살 길은 마련해놓고 좀 편안하게 살면서 믿을 것이지 왜 사서 고생을 하나?"라는 핀잔성 마음의 표출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박 선생님의 그 말씀 속에는 송 선생님의 고생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도 담겨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의 신앙을 아는 사람은 인정할 것이다. 선생의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송 선생님의 그 계산하지 않고 "신자는 오직 믿을 뿐, 처음도 나중도 언제 어디서 무엇에고 그저 믿기만 할 뿐"이라는 신앙관을, 말만이 아닌 자신의 일생의 삶으로서 실천하며 걸어오신 데 대한 깊은 존경의 말씀이라는 것을.

 내게는 송선생님을 움직이는 그와 같은 신앙관의 밑바탕에는 "믿는자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니까"라는 인식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분명 믿음에 따라 결단을 하여 실행하여버린 후에 뒷일은 돌아보지 않는 신앙이라 생각된다. 불신자가 볼 때는, 아니 가까이 있는 가족이 볼 때에도, 무책임하다고 할 것이고 송선생님도 그점을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는 이유도 조건도 불필요하다"는 선생의 관점에서는 신앙의 일로 확신이 들면 자신을 던져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 나중 일은 그때 어떻게 될 것이라는 신앙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웬만한 신앙인의 눈에도 일견 대책없는 신앙이요, 불신자의 눈에는 허상을 향해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하는 돈키호테 신앙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송 선생님에게 있어서 신앙은 그냥 하나님이니까, 아버지니까, 그러므로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당연히 믿어야 하는 것이니까 믿는 믿음이라는 신앙 특성 외에 다른 것이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쩌면 선생의 신앙을 '도리(道理)의 신앙"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같다. 물론 그 바탕에는 주 안에서 자기의 죄를 용서하시고 아들로 삼아주신데 대한 깊은 감사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선생의 신앙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소망도 내세우지 않는 신앙이라 했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분께 다 맡기는 것이 내가 내 유익을 찾는 것보다 내게 가장 유익하다는 생각일 것이다.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시지 않는 아버지, 아니,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르치신 신앙이 그대로 또 그것 아니냐?
 그렇게 보면 '송 선생님의 신앙특성'이라 했지만 사실은 선생의 신앙이 특별한 것이라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볼 때 그것은 그냥 정상일 뿐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신앙이, 아니 나의 신앙이, 그 수준에서 한참 멀어져 있는 사실을 보게된다.

 

  그리스도의 사람 제 47호  <권두문> 2-6페이지     주필 한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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