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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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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사건이 주는 중요 교훈: 인류구원의 필요성
 [2013년 전국 동계집회(2014. 1)에서 말씀한 것] (창11: 1-9)

 

 창세기 11장의 이 유명한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창조주와 단절되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큰 틀에서는 그것을 무신문명(無神文明)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바벨탑 사건은 이 무신문명의 구체적인 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서가 전하는 인간관은 ‘인간의 자기 창조주와의 바른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창조주와 단절된 인간, 자기 창조주를 잃어버린 인간은 필연적으로 제 나름의 다양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상을 나타낼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인간 자체의 행동방식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궁극적 의미에서 헛된 것 나아가서는 인간의 교만이라는 것이 성서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그 한 가지 행동양상을 우리가 아는대로, ‘위희(碼歡)’로 규정하면서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사냥’ 이라든가 ‘내기’ 등 권태를 피할 갖가지 놀이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매달리는 심리를 결국 인간 내면 깊이에 공허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고, 그 공허를 잊기 위한 심리상태의 표출이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고 갈파했던 것입니다. 몇 시간씩 토끼를 몰아대거나 내기노름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이 사냥한 토끼를 거저 준다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기해서 딸 수 있는 돈을 아침마다 거저 준다고 해도 역시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그들의 목적은 오직 따분함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있지 그 죽은 동물이나 금전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공허감, 권태,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상이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파스칼은 지적하고 있는것입니다.

 

 본질에서 떨어져 나온 것, 본래는 그렇게 되어있어야 할 존재가 그렇지 못한 상태가 된 것과 관련하여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소외 (疎外)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19세기 독일의 포이에르바하를 비롯한 일군의 철학자들은 이른바 “인간 소외론”을 주창했습니다. 포이에르바하, 에리히프롬, 마르크스와 앵겔스가 그들인데, 철저히 무신론적 관점에서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을 앞세우고 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인간 심리내지 인간 본질론에서 있어 거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현재까지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대체로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고 본질과 유리되어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소외(流外)라고 해도 주장하는 각자의 철학에 따라서 그 근원을 조금씩 달리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앞에서 파스칼이 지적한 인간비참, 인간불행의 주요인으로 보는 데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사상은 무신론적 관점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과 맞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만 소외(疎外)와 그로부터 초래되는 심리상태 자체는 바벨탑 건설자들의 심리와도 상통하지 않나 생각되는 면이 있습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왜 인간소외상태가 발생하느냐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이라는 대상을 만들어가지고 그것을 숭배하고 그것에 매몰된 결과 자기가 만든 것에 오히려 노예가 되어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 진정한 자기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게 됨으로써 소외가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심리학자 에리히프롬은 인간소외현상을 인간이 자연이나 타인과의 불통, 즉 대 자연관계, 대 인간관계에서 격리되어 물질에 집착하는데서 느끼는 고독감이 인간소외현상을 낳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유명한, “소유냐 존재냐”라는 글에서, 그는 현대 사회가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데 바로 거기에 인간소외현상이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즉 현대 산업사회 문제의 근본에는 끝없이 더 많은 물질적 가치에 집착하고 타인과 과도한 경쟁을 일삼게 되는데 그렇게 하는 한 본질적으로 그는 소외될 수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소외되지 않고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소유’가 아닌 ’ 존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맞는데 맘몬의 노예가 된 인간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한 노예상태는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현상만 제시했지 탈출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외 이론으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시다시피 공산주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이론입니다. 이들의 것은 포이에르바하의 것을 살짝 바꾼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이들은 주로 노동과 생산의 관점에서 이 인간 소외 문제를 보았습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앵겔스의 인간 소외론의 본질은 간단히 말하면 노동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이란 노동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맺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은 자유로운, 얽매이지 않는, 노동활동을 인간 삶의 본질로 본 것입니다.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흔히 생각 하는 것처럼 노동자는 노동을 해주고 그 대신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 있어 노동의 개념은 인간 삶의 본질과 불가분의 문제로 보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노동은 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의 것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실현하고 그때 노통 자체가 기쁨이 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인데, 자본주의체제에서는 개인 소유자가 노동의 생산물을 독점함으로써 노동에 참여하는 노동자는 그 노동이 자기의 자아실현이 아니라 단순한 생활수단이 되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체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러면 본래의 의미에서 노동 자체의 의미는 변질되고 그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가 생산한 노동의 결괴물에서 소외되고 비참해진다는 것입니다. 즉,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기계나 공장과 같은 생산 수단이나 그 밖의 소유물들은 원래 노동자가 생산한 생산물들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생산물들이 자본가의 착취에 의해서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적인 소유가 노통 소외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 노동 생산물에서 소외되는 것은 자기의 참다운 본질과 가치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으로부터의 소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 내가 없어진다는 것이고 그러한 인간의 ‘자기로부터의 소외’가 인간관계에서도 적용되어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악순환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 앵겔스의 이 노동의 결과물에서의 노동 당사자인 인간의 소외이론은 기본적으로 물질이 그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이론에서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앵겔스 뿐 아니라 앞에서 예를 든 근대 소외이론의 주창자들이 모두 철저한 무신론자들이라고 밝혔습니다만 그러므로 그들의 인간 소외론이 말하는 인간의 비인간화,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성이라는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그들은 중심을 잘못짚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비참성의 본질은 자본가의 착취에서 오는 소외감도 아니고, 자기가 만든 신에 의해 노예가 됨으로써 불가피하게 진정한 자기의 삶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데서 오는 소외도 아닐 것입니다. 인간소외의 근원적 원인, 그것은 인간영혼의 공허감에서 오는 것이고, 그 공허감은 바로 파스칼의 진단과 같이 자기 창조주로부터의 단절에 서 오는 것, 에덴에서 추방당함으로부터 오는 소외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소외된 존재라는 견해는 옳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소외론을 주장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 소외를 해소할 대책도 또한 내놓고 있습니다. 그 소외감들이 해소되는 것이 결국 그들에게 있어 인간문제의 해결인 것인데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경우 사적 소유를 없애고 공산주의를 실행하면 소외는 해소되는 것입니다. 그 해소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계급에 의한 공산혁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차원에서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인간문제라면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그런 것은 인간문제도 아닙니다. 진정한 소외란, 방금 밀한 근원적 소외로서, 단절시킨 존재가 그 단절을 해소시켜주기 전에는 절대 해소 불가능한 소외라 할 것입니다.
 
 이제 이와 관련해서 위에서 읽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본질을 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인간소외란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자의 소외, 버림받은 자의 소외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사고방식과 그에 따른 행동양식은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필연적으로 자기 의존적으로, 제 좋은 생각대로 갈 것입니다. 일종의 ‘고아(孤兒)’심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의존적 정신”은 인간사회 같으면 자립정신과 통하니까 장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죄로 인해서 버림받은 후 지향 (指向)해 가는 인간들의 자기 의존적 행태는 창조주께서 보실 때는 무익하고, 문명이라면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불신, 반신 문명으로 갈 수 밖에 없어 매를 더 버는 일밖에 되지 못하는 것, 그 행동 자체도 죄로 인정되어 징벌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 결국 멸망의 길이라는 것이 성서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해석상의 다른 견해들도 있습니다만 전통적으로는 바벨탑 사건이 방금 든 신을 배제한 자기의존, 교만의 생활방식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 잘 아시는 바벨탑 사건의 얘기를 조금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이 사건의 구성은 1-4절이 바벨인들의 탑 건축의 야심, 5-8절이 하나님의 조치, 9절이 인간계획의 좌절과 그들의 분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서는 홍수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인류의 씨앗으로 보존시키신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고 축복하시고 그 축복이 실현된 사실을 그들 후손들의 족보를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창세기 기자는 단순히 그 후손들의 목록과 그들이 확산되고 정착한 사실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노아-셈- 아르박삿-벨렉… -아브라함으로 점차 특정인이 선택되고 그의 계보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즉, 노아후손의 족보는 창세기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아브라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인류구원계획은 가시권에 들어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10장 전체에서 창세기 기자는 노아의 후손들의 족보와, 이들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에 따라 그들이 퍼져나간 지역들을 기록하다가 이를 멈추고 11장 앞부분에 이 바벨탑 이야기를 삽입하고 다시 노아의 큰 아들로 생각되는 셈의 후손들의 족보 소개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바벨탑 사건이 인류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주해자 모두가 동의하는 명백한 해석은 없습니다. 대체로는 이 사건은 “탑을 하늘에 닿게 하자”는 그들의 계획으로부터 특히 옛날부터 인간의 교만, 즉, 하나님과 대등하게 되려고 하는 교만죄라는 해석이 많습니다만 또 주해자에 따라서는 그렇게까지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바 있는데, 이들은 “흩어짐을 면하자”고 해서, 하나님의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그 뜻을 어긴 것이고, 잘못은 그 점에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뜻은 노아의 아들들이 현재는 적은 수효지만 앞으로 온 세상을 차지할 만큼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지 억지로 세상의 빈 터를 채우듯이 분산되어 살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번성과 땅에 충만함은 인구 증가에 의한 자연적인 확산으로 여기에는 강제성이 없고, 원한다면 모여 살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바벨탑 건설자들이 “흩어짐을 면하자”고 다짐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계획과는 달리 흩어지게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강권을 행사해서 하신 것은 아니지만 언어불통으로 결과적으로는 흩어지지 않을 수 없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제성이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적 성격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리를 지어 흩어지지 말자고 했으면 그것 자체도 일단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른 것이지만 특히 흩어지지 않을 방법이라는 것이, 굉장한 도시를 건설하고 하늘까지 닿을 탑을 쌓아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단결을 도모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신문명에 더하여 하나님 앞에 교만의 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징벌적 개입을 초래한 것이라 할것입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도 문제가 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만 그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 이름 ‘바벨’에서 기원하는 ‘바빌론’이라는 고대 국가가 역사상 실존했고 그 탑의 재료인 벽돌을 이을 수 있는 역청이 그 지역에 무수히 존재하고, 학자들이 바벨탑 모형일 것으로 보는 동일유형의 소규모 탑들이 유독 그 이라크지방에 매우 많다는 것을 들어 이 이야기는 이를테면 에덴동산의 실존 여부 같은 것보다 훨씬 실제적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과 탑의 건축시기에 대해서는 노아 홍수 후 100 년 이전으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합니다.

 

다음, 시간상 내용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만을 말씀하면, 바벨탑 건설자들은 4절에서,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다는 것인데, 대단히 야심차 있고 그대로 나가면 분명 뭔가 될 것 같은,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폰라트라는 학자는 여기에 논평하여, “그들은 힘의 집약과 명성의 획득, 곧 위대한 존재이고자 하는 욕망을 바벨탑 건축의 동기로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 여기 그들의 밑바닥에는 불안의 동기가 깔려있다는 다른 학자의 해석도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동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영웅주의가 감추어져 있다고 할 것입 니다.

 

 기원전 460년경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바빌론을 방문하여 당시 재건해놓은 바벨탑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고합니다.
“성역(聖域)안에는 가로 세로 모두 약 200m의 견고한 탑을 쌓았으며 탑 위에는 제2의 탑이 세워져 있다. 이런 식으로 여덟 개의 탑을 겹쳐 쌓아 올렸다. 외측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최상층 탑에는 거대한 신전이 자리잡고 있다. 신전 안에는 황금으로 만든 대형 침대와 아름다운 황금 탁자가 놓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의 바벨 탑이라기보다는 바벨탑을 본 뜬 탑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바벨론에 있는 탑들을 오늘날 학술용어로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높은 봉우리’를 의미하는데, 지금까지 발견 된 지구라트들은 모두 30기 정도라고 합니다. 이 중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티그리스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사마라의 지구라트’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구라트들은 기본적으로 바벨탑 을 본떠서 만들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이것으로 원형인 고대 바벨탑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근거로 보고 있습니다.

 

 이어서 5절 이하의 내용과 의미를 개략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5절이,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단독자로 서야 하는 자입니다. 그분을 떠나서 진정한 안전이라 할 안전, 행복이라 할 행복을 도모할 수 없게 창조된 자라는 것이 성서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에 바탕하지 않은 것은 인간주의이고 교만이어서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벨탑 건설에 깃들인 인간들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방관하실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6-7절은 하나님의 독백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입니다.
 인간끼리만 결합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고 방치하면 타락상은 심화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폰라트는 말합니다. “이들의 방종이 심화되면 하나님은 이들에게 혹독한 처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미리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들에게 취하시는 조치는 처벌인 동시에 예방조치다”라고 합니다. 인간들의 교만은 이 계획이 성공했을 때 더 기고만장하고 대담해져서 더욱 도전적인 계획에 나서고 불신문명이 심화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다치는 것은 인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을 저지하는 일은 언어혼란입니다. 어떤 직접적인 벌을 내리면 일시적인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계속적인 유사한 행위는 방지할 수 없을 것이어서 근본적인 해결로 그들을 단합시키는 수단인 언어를 혼잡시키는 것이라고 주해자들은 말합니다. 이야말로 저들의 신체 같은 것을 벌하지 않고서 그들이 모여서 이루려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끝으로 8-9절은 하나님의 개입의 결과입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언어가 혼잡되어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함께 이루어야 할 대 역사는 중단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탑을 세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동기가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어떤 자연의 위력을 동원해서 탑을 허물거나 이 공사를 중단시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탑은 곧 재건하거나 다른 탑을 건설하거나 유사한 다른 계획을 세워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해자 중에는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대로 본래 온 땅에 퍼져서 세상을 충만케 해야 할 자들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모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그 뜻을 거역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언어를 흔잡케 해서 본래의 뜻대로 흩 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본문의 근거는 희박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인간의 언어혼잡은 사도행전에 보면 일시적이나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그의 성령의 권능으로 다시 회복된다는 점입니다. 각 나라로 부터 온 여러 다른 나라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창세기의 언어의 혼잡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될 것이라는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것입니다.
 루터는 여기서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복음을 통하여 비록 언어가 다를지라도 모두를 한 믿음으로 모아 통일시키신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우리에게 새 언어로 말씀하실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일치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벽을 허무신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서로 다른 양떼가 한 목자 아래 모이고 한 우리에 모이게 되는 것이다"라고.

 

 결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여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고 만족을 얻으려고 하여 쌓아놓는 업적들을 문명이라 할 것인데 그것의 본질은 역시 인간주의입니다. 그것은 굉장한 것 같지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측면에서는 가치 없는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의 머리로 추구한 안전과 행복의 도구들은 결코 그 진정한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고 인생의 대 사실 이라고 봅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일을 계획하고 실행함에 있어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어디에 자신들의 일의 토대를 세워야 하는가를 교훈으로 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하늘까지’라고 하는 그들의 말을 성경에서 인용하는 것은 단순히 높이 짓자는 의미로만 볼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의 높이로 하면 저들이 아무리 미련해도 하늘까지 닿게 하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성서 기자도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웬햄이라는 주해자는, 저들이 바벨탑 건설의 목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말에 대해, “이미 내적으로는 상실한 통일성을 외적인 수단으로 유지하고 위로를 받으려는 교만”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왜 저들은 여기서 또 ‘흩어짐’을 그토록 꺼려하는가? 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에 있어서는 스스로 무력함을 느끼고 두렵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무력하면 불안하고, 불안하니 스스로 안전을 도모하려고 작당하려 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힘도 거기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악은 작당을 할 때 그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 자체가 그의 능력이요, 하나의 산성이 되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데 비하여,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 능력만으로는 무력하고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한정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주위에 하나님 대신 동료들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불신 인간들이 뭉쳐져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대체로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이요, 반신적 행태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성읍을 세워 하나님 필요 없이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인간의 헛된 시도의 한 사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의 명성이나 연합, 독자적 세력 확대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 되는가를 보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빠진 인간적 일치와 단합을 추구했던 그들이 더 이상 서로 소통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는 교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죄성의 뿌리 같은 것을 엿보게 해주는 면이 강합니다. 의인 노아의 후손들조차도, 그것도 창세기 기자의 기록대로 하면 노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손도 아니어서 홍수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노아의 아들인 자신의 할아버지 정도가 겪었을 생생한 일로 들었을 것인데, 또 노아의 후손이라면 하나님에 대해 많이 들었고, 전해오는 에덴동산의 이야기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이렇게 반신내지 불신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 죄성의 끈질긴 뿌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무리를 지어 그 힘으로 스스로 높아지고 창조주 없이 독립하려 하고 나아가 창조주와 대등해지려고 하는 교만의 영에 이끌리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흩어짐을 면하고 우리의 이름을 떨치자’는 표현 속에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이러한 심령의 바탕이 엿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존재 근거와 의미를 자기 창조주 안에 두어야 할 인간이 창조주로부터 단절되어 소외되었을 때 그가 생각하고 취할 수 있는 행동이란 그것 외에 무엇을 하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앞에 인간들의 위희(委戱)의 예를 들고 소외에 관한 철학사상을 간단하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바벨탑 건설자들의 마인드 및 행동양식과 통합니다. 그렇게 갈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인간의 비참상인 것입니다. 하나님편의 긍흘과 은혜에 의한 구원 아니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원히 바벨탑 건설을 시도하고 징벌당하는 악순환 속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이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우리는 창세기 기자가 노아후손들의 족보를 기록하다가 갑자기 이 일화를 끼워 넣은 의도를 매우 의미심장하게 주목하게 됩니다. 창세기 기자는 10장에서 노아의 세 아들들의 후손들의 계보를 일단 끝낸 후에 11장에서 이제 본격 메시아의 조상과 관련되는 셈계의 후손들만을 부각시키기에 앞서 의인 노아 이후세대에도, 악인들은 다 청소했다고 생각 될 수 있는 노아시대 이후에도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인간의 불신, 교만 등 창조주 앞에서의 죄성이 여전함을 보였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결국 이후에 오실 메시아에 의해서 구원되어야 할 자라는 것, 거기에만 소망이 있다는 메시아 대망사상 같은 것을 성령은 창세기 기자를 통해 인간들에게 암시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창세기 기자는 그러한 메시지를 담아서 이 바벨탑 일화를 여기에 삽입해 넣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떨어져 계시고 상관 않으시는 것 같지만 항상 함께 하시고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항상 죄 된 인간에 대한 형벌의 역사지만 동시에 은혜로운 보존의 역사인 것이고 구원을 향한 역사인 것을 바벨탑 이야기와 이어서 나오는 셈계의 족보는 말해 주고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제37호 p69-82 한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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