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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그리스도의 사람
2014.05.03 17:26

2013년 전국 겨울집회(2014/1/3-5일)청강록-한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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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전국 겨울집회(2014/1/3-5일)청강록
(필자 개인의 기록, 요약으로서 전체적인 대의(大義)이며, 부분적으로는 강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음. 읽고서 의문점이 있으시면 저에게나 강사에게 문의 요함)

 

2014/1/3. 오후.
전준덕 선생. [성도의 세 가지 즐거움(살전 5:23-24)]
 모든 사람은 나름으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 해도 기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하나 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슬프고 괴로운 삶을 살라 하신 것은 아닐진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 이 문제를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구성 요소에 있어 성도는 혼과 육선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혼과 육과 영이 있는 존재이다. 진정한 즐거움은 이 세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셋이 있으니 본문에 언급된 ‘흠’, ‘거룩’, ‘믿음’이다.
 첫째, ‘흠’이란 곧 죄이다.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회개하고 이 ‘흠’을 없앤 사람이다. 과연 중한 죄짐 벗고 보면 초막도 즐거움을 방해하는 장벽이 될 수 없다.
 다음, ‘거룩’은 ‘흠 없음’과 비슷하지만 좀 더 차원이 높다. 거룩은 내 본질 안에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 성령세례를 통해 은혜를 받고 거룩하게 되면 아가페의 사랑이 발동하게 되고 영혼에 즐거움과 평안이 넘칠 것이다.
 셋째는 믿음이다. 믿고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것은 우리 안에 즐거움 을 앗아가는 근심, 걱정, 괴로움을 없애는 길이다. 본래 될 수 없는 것을 자기 지혜를 다 쓰고 노력을 쏟으니 근심걱정이 생기고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 세 가지 방법으로 즐거움을 얻게 됨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했던 것이다. 성도는 흠을 없애고 성령의 은혜로 거룩해지고 믿음으로 맡김으로 영도 혼도 몸도 함께 즐거움을 누려야한다.

 

1/3. 저녁. 
최병인 선생.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6-31)]
 예수께서 제자들을 전도를 위해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신 본문의 이 교훈은 많은 고난 중에 있던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결국 만일 복음전도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자들은 전도의 도상에서 맞게 될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데로 귀결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육체 이상의 존재로서 최악의 경우라도 박해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육체를 죽이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복종하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최후 심판자이신 하나님뿐이시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참새와 머리카락의 예로서 교훈하셨다.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하찮은 참새 두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계셔야 떨어진다. 히물며 제자들, 복음 전도자들은 그 존귀함에 있어 참새와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너희의 머리카락도 다 세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종들의 궁극적인 안녕을 돌보실 것이다. 설사 죽음이 있다 해도 사후의 삶은 심판의 실재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사실로 여겨진다.
 어려운 시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서 용기를 얻었다. 순교의 역사에서 그 엄청난 고통에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신앙을 인하여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더라도 일생 일사(一生一死)의 담력으로 주 예수를 믿고 그분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는 각오의 신앙이 내면화 되면 두려움도 은혜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1/4. 아침.
석진우 선생. [창세기 1장]
 창세기 1장의 만유 창조는 제사(P)문서 기자의 신앙고백이다. 특히 그 1절은 하나님 찬미시이다. 1장은 3장의 인간타락과 구별되는,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고백이다. 창조는 또 2장 4절을 기준으로 해서 그 전과 이후로 갈린다. 1장~2장 3절과 2장 4절~25절 끝까지는 전혀 다른 창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장 부터 2장 3절까지의 창조기사는 사제들 사이에 전승되어 오던 것을 주전 5세기경에 그들 중에서 기록한 것이며, 2장 4절 이하는 주전 10세기 솔로몬 치하 때 어떤 역사가가 야하웨 문서라는 다른 자료에 의해 기록했기 때문에 다르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렇게 해서 2장의 창조는 그 표현 방식이 이야기식으로 비교적 알기 쉬운 편이고, 3장은 죄에 떨어져 낙원에서 추방되는 이야기로서 인간을 매우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1장은 엄밀하고 또 시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가르치기 위한 기록이다.
(*석 선생님은 집접 작사한 찬송가 연습을 위해 시간을 쪼개어 쓴 관계로 창세기 강의는 다소 미완성으로 끝낸 짐이 있었음)

 

1/4. 오전.
(1) 길광웅 선생.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신 의미(마 3:13-17)]
 세례요한은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의미로 물세례를 받게 했다.
예수께서도 갈릴리에서 요단강까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세례를 마쳤을 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증하셨다. 예수는 12세 때 성전에 계실 때의 말씀으로 봐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이 세례 후의 성령강림으로 그 인식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께서, 오히려 죄 사하실 권세가 있는 예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셨나? 그분의 세례는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는 세례 주기를 사양히는 세례요한에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시게 하신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었다. 이때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세례를 받으셨으므로 이제 우리에게 물세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이다.

 

 1/4. 오전.

(2) 황연하 선생. [씨 뿌리는 비유(마 13:1-8,18-23)]
 농부는 좋은 밭에 씨를 뿌린 것이다. 그것들이 더러는 길가에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혹은 좋은 밭에 떨어졌다고 했다. 이때 얼핏 생각하면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석연치 않다. 본래 네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이라기보다 말씀을 받은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밭을 인간에 비유한다면 본래 좋은 밭이란 없다. 좋은 밭이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어서 된 것이며, 그렇게 보면 밭은 두 종류뿐이라 할 수 있다.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었던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 복음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 둘 뿐이다. 인간에게 좋은 밭은 없다. 첫째 아담의 밭은 다 나쁜 밭, 돌밭이다. 인간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짓거나 모래 위에 짓거나 둘 뿐이다. 모래위에 지으면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셨다. 농사는 잡초와의 싸움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믿는다 하면서 알곡인지 잡초인지 구별을 못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기독교신앙의 대부분이 실제로 그렇다.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다른 복음인지 구별을 못하는 것이다. 좋은 밭은 어떤 것인가? 공자나 석가가 좋은 밭은 아니다. 철학자, 지식인은 좋은 밭인가? 오늘날에도 복음은 지식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종교인에게는 거치는 돌이다. 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 빈 그릇,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회개가 많이 강조되기도 한다. 그러나 회개하는 것만으로도 다는 아니며 거기에 무슨 씨가 뿌려져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회개했으면 복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인데 씨 뿌리는 자,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선 내게 믿어져 야, 내게 실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음에 눈을 뜨지 못한 자, 진정한 복음을 모르는 자가 많다. 그러한 전도자, 씨 뿌리는 농부는 결국 나쁜 양식을 제공할 뿐임도 알아야 한다.

 

1/4. 오후.
(1) 손현섭 선생 [권세에 복종하라?(로마서 13:1-5)]
 바울은 거듭난 신자들은 지엽적인 문제에 휘둘리지 말라는 의미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로마서 13장 첫 부분에서는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지녀야 할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 이 말씀은 조심스럽다. ‘국가의 관헌에 복종하라’는 다소 과격한 말씀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 세상과 관계를 끊어야 하고, 천국에 속한 사람으로서 현세의 국가를 초월하여 산다는 생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인들은 아마 이런 말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로마황제는 신으로 추앙받았고 그 관리들은 신을 대행하는 권위를 가지고 군림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권세와 권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왕들, 출애굽기에서의 바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 등 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이다.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즉, 순응형, 중립형, 반항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적 관점에 서야 한다. 불의를 행하는 관헌이나 국가의 권위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사회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법이 있으므로 그 법에 어긋날 때는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아울러 같은 신앙의 형제들이 정치적 견해차이로 다투는 일 같은 것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늘에 국적을 둔 사람들인 것이다.

 

[*소감 로마서 이 부분은 참 논란이 끊이지 않는 구절들이다. 그런데 나는 머리가 단순해서 그런지 예전부터 여기 전혀 어려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우선 예수께서 ‘위에 있는 권세’에 어떻게 대처했나를 보면 거의 답이 나온다. 예수에게 위에 있는 권세는 당시 둘을 들 수 있다. 유대 종교 지도자 그룹이 그 하나요, 로마 정부 총독과 해당지역 분봉왕들이 그 둘이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와 많이 부딪친 권세는 실질적으로는 생사여 탈권도 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럼 안식일법 위반을 엄격히 금하는 저들에게 그는 어떻게 반응하셨나?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며 일언지하에 그들의 경고와 살해 위협을 무시해버렸다. 총독 빌라도에 대해서도 그의 심문에 대해 공관복음에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신 것으로 되어있다. 그 자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역시 위에 있는 인간적 권세는 무시해 버린 것이었다. 단지 그들도 하나님이 주신 임무는 있으니 그들의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말씀을 한 바울 자신은 과연 위에 있는 관헌들에게 복종했는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 로마황제의 명령에 복종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로마시민이고 그가 선교한 전 지역은 스페인까지 모두 로마지배지역이었다.

그럼 로마서 13장에 있는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서 이 지상의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철저히 복종하려 했으면 로마황제의 기독교 선교금지는 물론 신앙생활 금지에도 순응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순교당했다. 그가 처형당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손선생도 인용하신 사도행전 4장의 베드로와 요한의 당시 관헌이라 할 당국자들의 전도하지 말라는 경고도 명확한 시사점을 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 말씀 듣는 것 중에 어느 편이 옳은가 너희가 한 번 판단해보라”고 대놓고 그들의 경고를 걷어찼던 것이다. 또 기독교 금지의 황제칙령을 거부하고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으로 숨어들어간 그 수많은 신자들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지 않은 이런 행동은 어떻게 평가해야 되는가? 그러므로 이 문제 판단은 간단명료하다. 모든 지상의 ‘위에 있는 권세’도 하나님의 뜻 위에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사도 바울도 명백히 이 점에 동의할 것으로 확신한다. 그의 이 문제발언은 분명, ‘하나님의 뜻 안에서’가 전제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사고와 행동방향은 무엇이든 제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참 기독자는 그 존재방식 자체가 신앙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기독교인으로서 명심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해도 권력이 우리를 죽인다고 해서 같이 죽일 수는 없다는 것,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목숨을 걸고 히툴러에 맞선 신학자 본회퍼의 생각에는 동의하고 존경하면서도 그를 죽여서 끌어내리려 한 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산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한 ‘뱀같이 지혜로워야’ 할 상황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겠지만(이를테면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에 일제가 강요한 황국신민서사의 게재에 순응하느냐 폐간하느냐와 같은 경우) , 원칙에 있어서는 No라고 해야 할 상황에 분명히 No라고 해야 하고, Yes라고 해야 할 상황에는 Yes라고 해야 하며, 저항이 꼭 필요한 상황에는 생각만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비폭력적 행동으로 No를 표시함으로써 진리와 정의 편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고 바울을 비롯, 순교한 사도들이 다 그렇게 한 것이었다. ‘위에 있는 권세’라 할 북왕국 제도권인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선지자 아모스가 모반 한다면서 그를 고발하고, 아모스에 대해서는 그를 쳐서 말하기를,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여기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이에 아모스가 답변하여 말하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다"(암7:10-15).
드고아의 목자,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과연 조용히 들에서 양이나 치고 뽕나무나 재배하며 잠잠하면 일신이 편안할 것을 왜 그렇게 뜬금없이 나와서 겁도 없이, ‘위에 있는 권세들’을 폭격했던 것인가? 당시의 왕 여로보암은 분명히 하나님이 세우신 왕, ‘위에 있는 권세’였고, 그의 제사장 아마샤도 모두 아모스나 백성들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위에 있는 권세’였다. 그러나 아모스는 죽은 체제 순응인이 아니고 하나님만을 우러르는 산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위에 있고 아래 있고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신 것도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로마서13장의 말씀, 그것은 오직 성경말씀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거나 성경의 전체적 정신을 보지 않고 그 부분에 갇혀 문자해석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만 길을 잃는 말씀인 것이다.]

 

1/4. 오후.
(2) 장문강 선생.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녹 6:20-31)]
 독일 베를린 시에는 ’Holocaust Memorial’이라는 2차대전 중의 학살을 항상 기억하고 생각해 보기 위한 구조물이 있다. 철학이 있고 종교가 있고, 지식이 있고, 논리가 있는 독일인들이 역사상 저 유례가 없는 학살을 범하는 극악을 자행했다. 그런데 그런 철학과 종교와 논리가 없는 우리가 생각 없이 살면 어떻게 될까? 젊은이들은 대개 인생 그냥 열심히 살면 되지 인생 방향에 대해 그렇게 고민하고 살 필요 있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를린시의 이 구조물에서도 인생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인생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 끔찍한 범죄에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뭐했나? 독재를 반대했나? 독재의 중요한 기반이 된 면도 있었다. 중세에도 그랬다. 말로는 하나님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 믿었나? 이게 중요한거다.

 인생을 생각할 때는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은 욕망의 충족, 그걸 행복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좋은 물건 사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충족되면 행복한가? 설사 그런 욕구가 충족되었다 해도 잠깐 행복을 느끼고는 더 큰 욕심을 내게 된다. 욕구라는 것은 그 욕구가 충족되는 순간 허무해진다. 그 다음 또 다른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생은 평생 그 욕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왜 우리가 충족할 수 없는 이 욕구에 평생 동안 연연해야 되나? 석가모니가 그걸 본 것은 정확히 본 것이다. 철학자들, 행복에 대해 조직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잘난 철학자라 해도 인간이므로, 행복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지만, 자기가 행복을 주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은 하나님은 행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알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들끼리 행복에 대해 떠 들어 봐야 소용없다. 거기서 나오는 얘기는 철학자든 뭐든 인간차원이다. 예수께서는 마태 5장, 누가 6장에서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데 복이 있다는 것이 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서 우리에게 인간차원의 복이 아닌, 하나님 차원의 행복,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다. 여기 젊은이들은 잘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말씀한 복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행복하다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예수는 세상이 싫어하고 바보 취급하는 가난한 자,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가난 자체가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가진 것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 때문에 가졌고 누구 때문에 못 가졌느냐가 중요하다. 예수 때문에 가난하고 배 고프고 울고 핍박을 받으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축복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말 행복, 참된 행복을 바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것도 한 두 번 잠깐이 아니라 평생 듣고, 여쭈어보고, 그대로 살고, 넘어지고 깨지고, 다시 또 매달리고, 그 길을 가야한다. 여기 젊은이들, 이 집회에 온 것은 잘한 일이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이것이 시작이어야 한다.
 
1/4. 저녁.
이진영 선생. [나에게 있어 무교회란 무엇인가?(벧전 2:21-25)]
 우찌무라는 한 마디로 ‘산 정신’으로서 무교회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가 어떤 제도나 형식에 매어 그 형식, 제도가 그리스도를 압도 하려고 할 때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그런 사람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바로 그것이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현재 역사하심을 믿고 사는 일이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투쟁이 따르고 고난이 따른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우찌무라는 말했다. “나의 무교회주의는 주의를 위한 주의는 아니다. 신앙을 위한 주의였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그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한 것으로, 신앙의 귀결로서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죄의 회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이를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귀한 경험을 한 자는 기쁘게 이를 맞이했다. 무교회주의는 교회 공격을 위한 주의가 아니다. 신앙창도를 위한 길이다. 먼저 제1로 십자가주의 신앙 그런 다음에 그 결론으로서 무교회주의이다. 내가 때로 교회를 공격한 것은 그 신앙에 있어서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만 무례한 선교사를 미워했으나 아직까지 교회자체를 미워한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요한4장 예수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회중 영과 진리의 예배 부분, 그리고 마태복음, 18장 20절을 인용했고,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 관련 글들을 소개했다. 무교회는 교회가 그 사명을 다 하지 못 할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난 개혁이었다. 신앙이나 정신세계의 일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면 그 본래의 정신을 잃고 형식에 매달리고 실적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 인간의 통상적인 약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신앙은 살아있는 생명이다. 살아있는 신앙, 생명은 단단한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온다. 이것이 무교회주의라고 나는 이해 한다.

 

1/5. 아침.
한병덕. [바벨탑 사건이 주는 중요 교훈-인간 구원의 필요성(창11:1-9)]
내용은 본지 별도 게재된 원고 참조

 

그리스도의 사람 제37호 p83-92 한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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