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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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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공부의  중요성2
(1월 5일 오류집회에서 말씀한 것중 첨삭, 정리한 것임)     한병덕

 

4. 의지와 끈기, 노력이 요구되는 성경읽기 및 공부
  한편, 시편 119편 기자는 성경 말씀을 꿀송이보다 더 달다고 했는데,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성경말씀이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와 닿지 않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 관심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일단 성령의 역사로 보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는 그 맛을 아직 모르고 그래서 따분하게 생각되는 경우에도 기도하면서 씨름하는 자세로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 하면 성서는 인간을 위한 유일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고 그러므로 바른 기독교 신앙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알아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성서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인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하고 새로운 무슨 기도교에 대한 사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신앙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낡게 보이는 성서말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서 주해서들이 있습니다만 그것들도 어려운 부분의 성서말씀을 이해가기 위한 보조자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위한 첩경은 성경이 어렵고 따분하다고 해도 피하거나 절대 우회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고 간구하면서 정공법으로 들어가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성서학자도, "부ㄸ쭈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참석해서 듣기는 많이 하지만 혼자서 직접 읽지는 않는데, 싫더라도 의지를 가지고 직접 읽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다만 이때 성경의 글들은 하나님의 계시라 해도 당시의 인간을 통해 주신 말씀이고, 현대인 들과 2천년에서 3천 5백년의 시간 간격이 있는 글이므로 대부분의 신자들의 경우, 그냥 읽고 넘어가는 정도로는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고 해서 그런 부분은 문장이 의미하는 실체가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공부나 연구식으로 할 필요는 있다고 권고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서  기독교반을 담당했을 때, 그 내용은 담당교사의 성경강의와 학생들의 자체적인 활동으로 구성했는데, 세월이 갈 수록 학생들이 성경말씀을 듣는 태도가 불량해져 가서 결국 나중에는 학교에서 기독교반 설립을 포기하고, 이미 있는 학교에 가서도 더 이상 담당하지 않았었습니다. 즉 80년대 서울 D상고나 90년대초 K고등학교에서는, 특히 K고에서는 점차 줄기는 했습니다만 처음에는 기독교반이 80여 명이나 지원했고 성경강의 청취 태도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J고등교로 오니까 점차 학생틀의 강의에 임하는 태도가 불량해지고, 담당 교사를 배제하려 하면서 전적으로 자신들 스스로 활동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맡겨놓았더니 복음성가 부르고 남녀끼리 잡담하고 하면서 시간을 다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그들이 제일 많이 나간다는 교회 목사에게 전화해서 요즘 아이들이 이런 현상을 보이는데 교회에서는 어떻습니까? 하고 상담을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요즘 학생들 교회에서도 통제 불능이라면서 학생들의 요구로 교회 지하에 기타와 드럼 등의 악기를 사주어서 복음성가 같은 것도 거기에 맞추어 부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학생들은 재미없으면 교회에 안 나오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어쨌든 학생들을 교회에 나오게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허둥대면서 조류에 떠밀려가는 어떤 배 같은 상황이 연상되었습니다. 선장은 잡다한 짐을 모두 싫은 채 떠밀려 갈 것이 아니라, 버릴 것은 버리고 배의 중심을 잡으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요. 학생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숫자를 늘리려는데 주안점을 둘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곳이 무엇하는 곳이고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제대로 된 내용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 성서의 정신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힘들다고 우회해서 들어갈 것이 아니고 정공법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밀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게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선교할 때 그가 정통한 탈무드와 같은 유대사상이나 로마시민으로서 로마나 희랍철학으로부터 시작했습니까? 오히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 하므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노라" 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개 기독교의 이해와 성서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식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해 안 되니까 성서를 보기 싫고 성서를 안 보니까 기독교를, 예수를, 더욱 모르게 되고 결국 기독교에 대해서 쓴 책 같은 것을 찾으면서 말하자변 외곽으로 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명한 천재 수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의 팡세라는 기독교 단상록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신음하면서 구하는 자만을 인정한다” 즉, 신앙에 들어가려는 자, 즉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려는 자는, 신음하면서, 끙끙 앓으면서, 다가가려는 자세가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이방인인 가나안 여자 하나가 딸의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예수께 다가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라고 소리를 지르자 예수는 처음에 아무 대꾸도 안 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여자가 뒤에서 자꾸 소리를 지르니 그녀를 돌려 보내십시오” 라고 말하니까 예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다”라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여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끈질기게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자녀의 떡을 뺏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인에게 큰 상처가 될 대답을 하셨음에도 여자는 굽히지 않고, “주여 옳습니다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라고 필사적이였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했다는 기사(마태15:21~28)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일화였습니다. 그 이방인 여인처럼, 밀하자면 외간 남자에게 자존심 다 팽개치고 자신을 한 마리의 ‘개’로 자임하면서 끈질기게 긍휼을 간청한 그 자세가 구도자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의 문제인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8장 36절 이하에 한 맹인이 어렵게 붙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끈질기에 절규해서 시력을 회복받는 이야기도 같은 성격의 내용입니다.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메 물어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이런 자세는 도대체 성경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따분하게 생각되는 분의 성경읽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봅니다. 예레미아서에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리라”는 말씀이라든가 복음서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성경읽기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그것은 싫어도 의지를 발휘해서 읽고, 의문도 갖고, 씨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성경읽기, 혹은 공부의 유의점:

 1 ) 성서의 초점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 ,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2) 난제는 일단 넘어갈 것

 

 이는 성서읽기 내지 공부에서 거의 모두 알고 있는 상식이면서도 혹 실제에 있어서는 염두에 잘 두지 않고 있는 분들을 위해 다시 강조한 것 입니다.

 

 송두용선생님은,
 성서는 학문이 아니므로 읽고 배우고 연구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성서는 생명의 책이니만큼 성서에서는 생명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성서는 믿어야 할 책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신앙의 책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지당한 말씀인데,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믿어 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어떻게 사람이 900살, 1,000살을 넘게 살고? 몸을 가진 사람이 물위를 걸어 다니고,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말을 믿으란 말이냐?" 고.

 정 그렇다면 성서학자들이 권하는 바와 같이 믿기지 않는 것은 나중을 기약하고 일단 내용만 기억하고 넘어가되 위의 1)번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고래로부터 유명 성서해석자들의 일반적인 권면인 것 입니다. 즉 신구약 전체에는 일관되게 흐르는 말하자면 하나의 맥이 있는데, 그것이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그리스도 )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 독서자들이 믿기 어려워하는 위의 문제들 중, 고대 족장들의 나이 문제를 제외하면 다른 내용들은 거의 기적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먼저 기적의 문제는 신앙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릴 때 문제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 신앙에 들어오고 나면 그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인류창조와 인간의 죄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우주만물과 그 운행법칙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아들을 희생시키며 진력하시는 하나님이 인간구원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일을 못 믿으니까 기적이 믿기지 않을 뿐인 것입니다.

 

 한편, 고대 족장들의 나이 문제 같은 것은 이해하기가 분명 난제 중 난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근래 학자들 중에는 창세기 11장 이전의 문서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진실의 기록이라고 보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류상태 목사, ‘나는 의심하는 신앙이 좋다’라는 칼럼 중에서). “그러면 성경의 기록이 거짓이란 말인가?"하고 우려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지만 창세기 앞부분이 신화의 기록이라 하여 거짓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실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의 기록’은 아니지만 ‘진실의 기록’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의미하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세익스피어의 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가 줄리엣을 향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은 세상에 없다 " 고 고백하며 찬사를 하는데,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로미오에게 있어서 는 진실로 그렇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로미오의 고백을 사실의 언어로 이해해서 그의 말이 맞다 틀리다 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며, 독자로서는 로미오의 주관적인 진실을 이해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신화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며, 그 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내린 답이라는 해석입니다.
 저는 이 해석법도 창세기 초기 부분을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관점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이 난문제를 아직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주해자들의 견해를 보면 크게, 1.현재와 환경이 달라서 이해 안 될 뿐, 실제의 나이라는 설, 2.족장인 그가 속한 자기 부족의 나이를 합한 수라는 설, 3.고대에는 의례 위인들은 일종의 신격화로서 일반인들과 달리 오래 살았다고들 생각했는데 이 창세기 기사도 그런 관례가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설 등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경우는 가나안 인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고대에 강대한 문명을 이룩한 수메르 문서에도 수메르왕들의 이름과 그들의 통치기간이 기록되어있는데, 1만 8천년으로부터 4만 3천년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의 족장설화도 나이 문제에 관한한 그런 유형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데 저로서도 현재로서는 그 해석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나 역시 추측이지 확실치 않습니다. 아무도 확실한 해석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뒤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으로 판단하건대, 여기서 중요한 창세기 기자의 초점은 나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며, 그 초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이 문제는 창세기 기자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뿐이며, 그가 진정 의도하는 것은 이 족장들의 계보라는 생각입니다. 즉, 인류의 족장들이라 할 그들은 처음에 여렷이 소개되지만 창세기는 결국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이 어떻게 뻗어나가서 인류를 형성했고, 그 후손들도 점차 성서에서 탈락되고 좁혀져서 결국 한 민족이 선택되고, 그 선택된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류구원 사업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창세기 기자의 기록의 중점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좁혀져서 ‘셈’으로 이어지고 셈에게서 ‘아브라함’에게로,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으로 야곱은 아들들 '12지파’로 이어지고,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되고 거기서 율법의 실행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미하는 제사제도가 시행되고, 그러면서 그들은 왕국을 세우지만 왕국은 분열되고 율법주의의 파탄과 우상숭배로 왕국 자체가 없어지고, 결국 일부는 세계의 난민, 일부는 본토에서 외세에 시달리며 고난이 시작되면서 예언된 메시아에 온 민족이 소망을 걸게 되고 그러다가 때가 차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으로 구약과 신약이 연결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성서를 건성으로 읽으면 여러 이야기를 합해놓은 것일 뿐 관련 없는 이야기들로 보이지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읽으면 모두가 하나의 초점을 가리키는, 말하자면 ‘손가락’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손가락을 인정하고 그것이 상징을 통해서 가리키는 존재를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 상징론 혹은 예표(據表)론으로 불리는 메시아 예언입니다.

 한 가지 예로서 잘 아는 요셉의 이야기와 이에 대한 파스칼의 해석을 들겠습니다.
 창세기 39장에는 자기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침 애굽왕의 친위대장이 그를 장사꾼에게서 사서 자기 집의 노예로 삼았는데 요셉이 하도 성실하니까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친위대장의 부인의 욕심에 희생양이 되어 옥에 갇혀 죽음을 맞을 위기에 처해졌는데 마침 왕의 술담당 시종과 빵 담당 시종이 왕어에게 죄를 범하여 요셉과 같은 친위대장의 감옥에 갇히게 되고 이들이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요셉이 이것을 정확하게 해몽하여 한 사람에게는 지위의 원상회복을, 다른 사람에게는 사형을 받게 되는 해석을 했고 이것으로 인해 요셉은 얼마 후에 옥에서 풀려났고 결국은 애굽 총리에 오르는 영광을 얻어서 자기 아버지와 자기를 판 형제들까지 용서하고 구원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흔히 성실은 보답 받게 되어있고, 그러다 보면 억울한 누명도 벗을 수 있고,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은 결국 형통하게 되는 것이라는 교훈 정도를 간단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 이야기의 핵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에 의해 상징된 예수 그리스도. 형제들을 만나도록 아버지가 보내신 아버지의 귀염둥이. 죄 없이 자기 형제들에 의해 20드니에 팔리고, 그 때문에 그는 형제들의 구주, 외국인들의 구주, 온 세상의 구주가 되었다. 이런 일은 형제들이 그를 버리고 팔고 배척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감옥에서 두 죄인 사이에 끼인 죄 없는 요셉, 두 도둑 사이에 끼인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 요셉은 똑같은 외관인데도 하나에게는 구원을 또 하나에게는 죽음을 예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똑같은 죄상인데도 뽑힌 자들은 구원하시고 버림받은 자들은 벌하신다.
고 말합니다.

 

 즉, 아버지의 가장 사랑을 받은 요셉이 형제들의 배반으로 애굽에 팔려 가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자기 백성 유대에 보내신 일에 상응한다는 것. 그리고 죄 없이 자기 형제들에 의해 20드니에 펼린 것은 유대인 중 하나인 가롯유다에게 배반당해 은 30세겔에 팔려 죽임을 당한 것을 상정한다는 해석입니다. 그 때문에 요셉은 결국 자기를 배반한 형제들의 구원자 뿐 아니라 외국인들과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었다는 것은 요셉이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극심한 7년 재해를 극복함으로써 애굽과 주변국가들을 구하고 자기를 판 형제들까지 구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배반으로 죽임을 당했으나 그로 인해 이방인, 온 세상, 유대인들의 구세주까지 된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렇게 팔려서 세상을 구한 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죽임을 당해서 구세주가 된 것이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임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감옥에서 두 죄인 사이에 끼인 죄 없는 요셉은 두 도둑 사이에 끼인 죄 없는 예수를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고, 요셉이 한 사람에게는 구원될 것을 또 한 사람에게는 죽음을 예언한 것도 예수께서 똑같은 강도죄를 범한 사람들인데도 한 강도에게는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구원을 선언하고 다른 강도는 버림을 받은 사실을 그대로 예표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렇게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만 해도 죽음을 보지 않고 올리우셨다는 에녹을 비롯해서 노아와 노아의 방주, 멜기세덱, 아브라함, 야곱, 요셉 등등이고 출애굽기 신명기 등에 모세, 제사장과 제사제도, 속죄 양 등 희생 제물들, 정결예법, 실수로 죄 짖는 자들을 보호하는 도피성 제도 등등 요소 요소에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6. 무교회 집회와 성서공부 
  무교회의 특별한 성서공부 중시에 대해서는 위에서 노평구 선생님과 다른 분의 말씀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만, 저는 구체적으로 이런 저런 집회에서의 성경공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잠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우선 김교신 선생 기념 강연 때 강사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 노평구 선생님의 지시를 받을 때 이야기입니다. 김교신 선생기념이니까 저로서는 가급적 김선생님을 아시는 분이나 그분을 존경하는 분으로서 김선생님에 대해 말씀해 줄 분을 찾아 요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김선생에 대해서는 이제 나올 것은 다 나왔다. 그거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성경말씀 할 분을 찾아라. 김선생 기념 성서강연으로 하면 된다”는 것 이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있어 성경강의는 주일 집회, 여름, 겨울집회 등에서 계속 듣는데도 전혀 식상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Y 집회에서 강평하는 것을 들으면 아주 사소하게 생각되는 것이라도 흥미진진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전 성서신애지에 보면 김유곤 선생님이 처음인지 노선생님을 만났을 때의 회고담에 흥미있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즉 당시 유명한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쳐 박사와 그의 생명외경 사상을 존경해서 그 문제를 노선생님 앞에 꺼내니까 노선생님은 그것 성경에 전부 있는 것 아니냐고 대수롭지 않아 하더라면서 나중에 노선생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50년대 중반부터인지 노선생님 주관으로 무교회 전국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던 모양인데 항상 성경강의로 일관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90년대 초부터 선생님 뜻을 따라 전국집회를 진행하는 일을 하게 된 것으로 기억되는데, 강사 선정에서 일체 처음부터 성서강의 이외의 말씀 할 분을 용납하지 않고 혹 유명하다는 분이 참가하면 즉석에서 부탁해서 잠시 시간을 내어 말씀을 부탁하게 하고 다른 분 시간 뒤에 끼워 넣게 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것도 대체로 성서와 관련된 말씀이였습니다. 그리고 성서말씀에 대해 소위 ‘딴지’거는 것으로 들리는 발언에 대해서는 철저히 차단하면서 “짐 싸가지고 올라가라”는 호통은 아마 다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조는 부족하지만 이제까지 이어졌고 저는 그것이 한국 무교회를 여기까지 이끌었고 통일시킨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태도는 어렵게 모인 집회는 신앙을 살리는 일 한 가지에 집중해야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고 그것은 성서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하나라도 다른 것이 끼어들면 결국은 사람들이 일부라도 관심 갖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그러면 혼잡되어 성서집회 본래의의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70년대 문정길 선생 같은 분은 글을 보면 상당히 탁월하고 박식한 분이고 처음에 는 노선생님과 친분도 있었고 잡지에 글도 게재했고 전국 집회에도 참석 했던 것 같은데 얼마 후 부터는 곧 소원해졌던지 잡지에서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분이 기독교의 사상적인 면에 더욱 관심이 있어 노선생님과 노선이 달라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선생님의 김교신 강의에 보면 동경에서 김교신 선생을 만난 후 김 선생께 내심으로 다시 한 번 감동받았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일본에 계실 때 김교신 선생님이 일본을 방문해서 함께 성서 강의를 들었는데, 강의가 끝 난 후 노평구 선생님이 오랜만에 일본까지 오신 선생님이라 내심 반갑고 함께 이야기도 하고 싶어서 우선 들은 강의에 대한 의견을 물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김선생님의 답변이, “오늘은 우리가 아주 귀한 말씀을 들었으니까 각자 돌아가서 그 말씀에 대해서 갚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자”며 매정하게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김교선 선생님은 노선생님을 일본에 보내신 분으로,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럴 수가 있나 라고 노선생님 편에서 생각될 수도 있지만 노선생님의 그 증언 속에는 성서진리를 생각하는 김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또 자신으로서도 성서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증언을 듣는 저 자신도 우리의 신앙선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에서 이렇게 경건했던 것이라고 머리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근래 석진우 선생님이 작시하여 작곡된 찬송가를 보급하려고 노력하시고 집회에서도 부르게 하시는데, 저 역시 현대의 노래 라기보다 이 하나의 소음의 시대에 찬송가는 은혜스럽고 그 시 속에 저자의 신앙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번 겨울 집회와 같이 성경말씀 직전마다 몇 개씩 찬송을 부르게 하는 경우는 그 간의 무교회 집회에서 생각할 때 좀 낯설였고, 바로 이어질 성경공부와 뒤섞여져서 성경을 잠시라도 미리 생각하는데 방해를 받았습니다. 아마 노평구 선생님이 계셨더라도 물론 ‘노’라고 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다른 분틀이라도 이전의 어른들이 계셨다면 분명 말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였습니다. 따라서 그 문제는 이전처럼 석진우 선생님 강의 시간에 시간을 조금 늘리더라도 그 시간을 쪼개어 함께 배워 부르게 하는 선 정도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개별 무교회 집회는 나름의 특성이 있을지 모르나 전국 무교회 모임은 가장 중심을 두어야 할 부분을 정하여 거기에 집중토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임중기씨가 전국집회 성서강의에서 예수의 사역의 핵심은 대속이 아니라 접목이며 자신이 새롭게 계시받은 진리라는 발언을 했고, 제가 이를 비판하면서 더 이상 강의에 세우지 않으니까 집회의 몇 분은, 집회에서 다양한 이야기도 나올 수 있는 것이고 무교회 선자라면그런 정도는 소화할 수 있다며, 제가 독재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십자가교”라 할 만큼 그리스도의 ‘대속’은 인간 구원문제의 열쇠임은 무교회, 아니, 초대교회 이래 기독교의 근본인데, 이를 정면 부정하고 나선 주장을 계속하게 할 때, 학생이나 이제 성서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줄 수 있고 한편 어른들 편에서는 분명 그런 사람을 또 강의에 세웠다고 나무랄 것 등 평지풍파는 명확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노평구 선생님 이래 3박 4일의 무교회 전국집회, 이제는 더욱 짧아져 2박 3일의 무교회 집회는, 적어도 성서에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만은 민주주의 하자고 모인 모임은 아니라고 봅니다. 개인적 의견이나 의문은 따로 제시하고 관심 있는 몇 분들과 토론할 수 있으나 전체 집회에서는 우선 교회사를 통해 확립되어 내려오는 기독교 진리를 잘 듣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그 점이 노선생님이 혹 집회에 혼란을 야기하는 발언을 하는 분이 있을 때 호통치며 단호하게 차단 한 의미였던 것이라고 봅니다. 민주주의적 관점에서는 그것은 독재일 것입니다. 이제는 노선생님 같이 호통칠 수 있는 분은 안 계시지만 그러나 저는 그 독재 정신, 그 기조는 이제 우리가 자율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성서 중심주의가 되지 않을 때, 그 2박 3일의 짧은 기간에 이 사람 저사람 의견을 반영하여 이것저것 다루려고 할 때, 결국은 성서공부도 남지 않고 다른 주제도 얼마 못가 그렇잖아도 전국집회라 하지만 하나의 작은 모임에 불과한데, 그 중에도 소수만이 관심을 가져서 결국은 빈껍데기로 분열되지 않을까 예측되기도 합니다. 저는 집회에 나오지 않는 어른들 중에 예전 노선생님 사후 함석헌 선생님의 문제가 집회에서 여러 번 나온 것이 그 중요 이유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당시 집회에서 있은 임중기씨 발언과 관련된 문제로 저는 무교회에 있어 더욱 확고한 성서신앙, 복음신앙의 확산 필요성, 그러므로 무교회의 성서공부 중심주의 필요성을 절감했었습니다.

 

 무교회는 가톨릭이나 교파의 지침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제도교회들과는 달리 집회에 따라 운영방식이 독립적이고, 성서 외에는 지식과 개성 등에는 다양하게 다른 분들이 많다고 생각되는데 다만 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성서강의와 그 공부이고, 일본의 전국 집회가 두어 분의 유명강사가 발제강연을 하고 나머지는 듣고 끝나면 토의에 참가하는 방식인 것으로 아는데, 우리는 가급적 많은 분들이 직접 강의에 참가해서 반년동안 성서를 공부하고 느낀 것이나 생활을 통해 깨달을 것을 증거하는 형식인데, 저는 이 방식이 더 좋고 한국 무교회 전국 집회는 이 기조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성서를 읽고 느낌을 발표할 때 성서적 근거 없이 자신의 자의적인 추측에 불과한 것을 사실처럼 단정할 가능성에 대한 문제점입니다. 교회 목사들의 설교에 매우 빈번하고, 지난번 최태사 선생기념 강연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의 전국 집회 같은데서도 듣다 보면 그런 점이 보이는 경우가 가끔 있어 곤란하게 생각될 때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얼마든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성서의 정신 안에서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대중상대로 발표할 때는 정직하게,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만”이라든가, “ ...라고 추측된다”든가,  "...이 아닌가 생각된다”라는 유보적인 어법을 써야지, "...이었습니다 ", "...했습니다". 라고 단정적인 어법을 쓰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을 사실인 것처럼 하여 일부라도 듣는 분들을 오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이였습니다.
  끝으로 다시 성서의 중요성에 대해 결론삼아 근세 유럽의 독서 왕이라 는 스위스의 카알 힐티 선생의 성서에 대한 글을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성서는 굉장이 큰 삼림 같아서 모든 종류의 나무가 거기 있어서 각색 과일을 따낼 수 있다. 성서에는 풍부한 위로와 설교와 교훈과 권고, 경고, 약속, 그리고 책망이 있다. 이 산림의 나무 하나라도 내가 이를 흔들어 두서너 개의 사과나 배를 따고 또 떨어뜨리지 못할 것은 없다. 정말 누구라도 성서를 지나치게 읽어낼 수는 없다. 아무리 잘 읽어도 충분히 이해 할 수는 없다. 잘 이해해도 충분히 잘 가르칠 수는 없다. 잘 가르쳐도 충분히 잘 생활할 수는 없다. 성서는 우리들의 이성으로 측정하고 판단하고 이해하고 해석할 것이 아니고, 기도의 심정으로 깊이 숙고하여 이를 자기 것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서연구 99호, 위 같은 글에서 인용).


- 한병덕 - 성서신애 제378호 p12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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