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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공부의 중요성 1
(1월 5일 오류집회에서 말씀한 것중 첨삭, 정리한 것임)     한병덕

 

1, 기독교인의 평강과 그 근원
 오늘 저는 새해를 맞이해서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인, 무엇보다 무교회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성서와 성서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많이들 그렇겠습니다만 저도 지난 31일부터 초하루까지 여러분들로부터 새해 소망성취와, 평강을 마란다는 메시지를 좀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잠깐 생각나는 것이 "작년에는 평강했었는가?"였고, 뭐 특별히 고난당한 일도 없고 해서, "대체로 평안했다, 주님의 은혜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새해라 하니,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 주님 앞에 갈 날이 좀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밖에 젊었을 때와는 달리 예상치 않았던 어떤 병 같은 것으로 활동불능 상태가 될 수도 있는데 그때도 평안하겠느냐?"는 생각도 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안이란 근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구애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라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는데, '새해'와 '평강'이라는 말을 자꾸 들으니까 이런 문제들을 새삼 점검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까 작년의 경우와는 달리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럴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저도, "더욱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생활이 되어야겠다", "세월을 아껴야 하고 일일 일생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해야 되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기에 앞서 '끝날'의 시기는 아버지만 아신다면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일련의 교훈들과 비유들은 신자들에게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대비하는 삶을 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고, 철학자 파스칼은, "모든 사람들응 사형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며, 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 이것이 인간 비참상의 산 그림이다"라는 말씀도 했는데, 그러나 살다가 이따금 돌아보면 어느틈엔가 느슨하게 끈이 풀려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곤 하는 것입니다.
 "평강', '평화', '평안' 등으로 번역되는 그리스도인의 에이리네(είρήνη)는 그리스도와 불가분리로 직결되는 개념입니다. 성서는 그냥 '평화'나 '평강'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의 평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강"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평강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 갈릴리 호수의 무서운 풍랑 위의 그 금방 뒤집어질 것 같은 작은 보트 위에서 제자들은 사색이 다 되어있는데, 예수는 그런 외적인 환경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평안히 잠을 자고 있었다는 그 평안, 인간을 사로잡고, 인간을 노예화 하는 것중에 가장 큰 공포는 뭐니뭐니 해도 사망의 공포인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그 사망에 대해서, "사망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 쏘는 것(즉, 공포)이 어디 있느냐?"라고 사망의 세력에 대해 조롱하면서 사망 앞에 담대할 수 있는 그 평안, 그것은 또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결코 침몰하지 않는 배"에 타고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고 하는 배에 타고 잇다고 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일, 그분의 성령과 동행하는 생활일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와의 그 인격관계, 동행이 인간의 평강의 진정한 원천이고 요체인 것입니다.
 요전에 장문강 선생 강의에서 학생 하나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를 문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목표, 또는 인간의 구원의 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인격관계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간 평강의 요체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오늘 그 문제를 좀 말씀하려고 준비하다가 주제를 성서읽기 내지 성서공부의 중요성으로 바꾸었습니다. 새해 벽두에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실행할 일로서는 모든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는 성서읽기 내지 성서공부 이상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저는 "올해는 더욱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내편에서 구체적으로느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 우선 최선을 다해 내게 남겨진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되겠다. 이것저것 줄이고 꼭 해야만 할 몇 가지 것에 집중해야 되지 않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대개 이런 저런 결심은 하는데, 연말에 결산해 보면 역시 초지일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올해에도 하나님 앞에서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노년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이를 더 먹는 만큼 때가 한층 가까이 왔다는 인식은 어쩔 수 없이 염두에 자주 오르내릴 것이기 때문에 긴장감은 조금이라도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혹, 이것이 "조용히 다 맡기지 못하고 인간노력주의로 흐르게 될 점은 없겠느냐?" 라고 얼핏 생각될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성서에서 인간노력주의, 내지 인간공로주의를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편의 행위와 공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원리'를 알씀하는 것이지, 은총에 의해 신앙에 들어온 사람에 있어서는 '이제 되었으니 손 놓고 있어라'는 의미는 아니며, 오히려 최선을 다 해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성서의 요청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때에도 '최선을 다 하되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다. 성령의 도우심에 의하는 것이니까' 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까지 인간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 유명한 달란트 비유였습니다. 그 끝에 1달란트 받은 사람의 처사에 대한 주인의 판결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인이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을 수 있는 분", 즉 땅을 헤쳐서 곡식을 심고 기르지 않아도 추수를 할 수 있는 분, 즉, 아무것도 없는 맨 땅에서도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곡식을 가져갈 수 있는 전능하신 존재로 믿었기 때문에 받은바 달란트를 오직 잊어버리지 않도록 잘 간수하는데 신경을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으로 가장 안전한 것이 땅 속에 묻어놓는 것이어서 '저는 이렇게 잘 간수 했습니다'면서 안전하게 돌려드리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인의 판결은,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 믿음이 크도다"가 아니었습니다. "노력 않고 묻어 놓으려거든 차라리 이자놀이하는 돈 놀이꾼한테나 묻어놓았어야 하지 않았느냐?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을 밖의 어두운데 내어 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게으른' 종이라는 표현 속에 노력 않은데 대한 심판이유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2. 역점 두어야 할 성경공부
 조금 옆으로 흘렀습니다만, 다시 주제로 돌아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활', 이를 위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의 선용'인데, 그러면 이제 기억력도 아주 상당히 많이 약화되는 것을 실감하는 상황인데, 저의 일을 축소하고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을 최후까지 남겨져야 될 일은 무엇이냐? 그렇게 볼 때, 그것은 역시 방금 앞에서 말씀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읽기 내지 성서 공부이어야 하고, 따라서 올 해 역점 역시 여기에 두어야 하며, 다른 신자분들에게도 신앙생활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성서를 손에 놓지 않는 일이 가장 중요성이 큰 것이어서 성서에 대해 좀 말씀드려 보기로 한 것입니다.
 영혼의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밥이 신체에 중요한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우리의 영혼에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습니다. 앞에서 죽음이 그 힘을 못 쓰는 그리스도인의 평강을 말했습니다만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내가 얼마만큼 나를 비우고 순종의 삶을 사느냐에 의해, 즉 얼마나 나를 그리스도에게 넘겨주어 그리스도의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삶을 사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인데, 이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계시인 성서 말씀에 지배되어 사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3. 성서공부의 중요성
 저는 우선 성서와 성서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한 두어 분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시작하겠습니다. 성서공부는 너무 중요해서 무교회 선생들 중에 이의 중요성을 역설하지 않은 분은 없습니다. 사실 성서 연구로서 일생을 보냈다고 할 이분들의 말씀을 듣는 것 이상 저로서 더 강조할 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리고 무교회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교부들과 변증가들의 기독교 수호, 종교개혁, 모든 기독교 부흥과 변혁 등 중요한 사건들은 결정적으로 성서 말씀에 의거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우선 노평구 선생님의 1962년 성서연구 98호에 쓴 '초대신앙과 성서'라는 글과, 잡지 같은 호에 게재된 김교신 선생 기념 강연의 글에서 성서에 대해 말씀한 부분, 잡지 99호, '성서의 내용'에서 요약 발췌한 말씀입니다. 조금 길지만 주옥같은 내용들입니다.

 

 '초대 신앙과 성서'라는 글입니다.
  오늘날 소위 기독자의 신앙생활의 내용을 교회 출석, 의식참여, 기도, 성서, 헌금 등으로 본다면, 이중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일까? 나 자신은  성서가 제일 중요하다고 보고 싶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신자는 기도로써 하나님과 말씀하는 것만큼 성서로써 하나님의 뜻을 경청해야 한다고 했다. 교리사가 하르나크는, 초대교회의 신앙토대와 기독교의 로마 정복도 초대 신자들의 성서에 대한 열성에 의한 것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기도교가 초대에 벌써 이교와 희랍 사상, 로마의 권력 등과, 그리고 자체 내의 이단과 대결함에 있어서 2세기 말부터 곧 성서의 집결을 보게되고, 많은 호교가들과 교부들이 오직 이 성서 한권으로 이들과 싸운 것에 주목해야 한다.......중략...... (교부)크리소스톰은 아동 교육도 성서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더욱 그는 성서의 신자에 대한 관계를 연장의 목수에 대한 관계라고 말하면서, 신자는 시편 제1편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주야로 성서의 생명에서 양분을 섭취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생애 안디옥에서 성서 강의를 끊지 않았으며, 더러운 유행가는 암송하면서도 시편 한 편 암송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개탄했다. 제롬은 부인들에게까지 원전에 의한 성서 암송의 유익을 권하였다. 이 성서에 의한 초대의 청신한 신앙은 가톨릭 교회의 직업적인 종교가들에 의해 의식의 참가와 교리의 암송 등으로 전락하여 중세의 암흑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성서가 재발견되어, 기독교는 초대신앙으로 돌아가고 성서 또한 민중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과연 종교개혁은 루터가 에르푸르트 수도원에서 쇠사슬에 매인 성서를 발견, 이를 탐독한 데서 발단되었던 것이다. 영국의 성서 번역자 틴데일은, "쟁기를 든 영국의 청년들로 하여금 교황 이상 성서에 정통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 성서 중심의 개혁 신앙의 상태는 어떠한가? 과연 크리소스톰의 개탄대로, 매일 신문 이상으로 성서를 열심히 읽는 신자가 없게 된 것이 아니냐? 이리하여 그들은 교황 아닌 목사와 신학자에게 이의 해석권을 넘기고 신앙마저 잃어버린 것이 아니냐?(1962년 성서연구 제 98호)

 

다음, 김교신 선생 기념 강연에서의 성서관련 말씀입니다.
  사람의 죄악의 문제, 영혼의 문제, 구원의 문제는 교육이나 단순한 도덕적인 노력으로써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종교신앙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선생 자신 청년시대까지 깊은 유교의 신념 가운데서 살아왔던 것이나 우치무라의 순수한 산 성서신앙으로 비로소 기독교의 구원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점 성서조선 주필로서의 일이야말로 진정 선생의 사명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하여 기독교 신앙 자체의 개혁은 물론 이의 각 민족적인 소화 역시 언제나 성서 자체에 대한 노력과 연구로써 이루어진 사실을 상기하는 바입니다. 근세 종교개혁 전후의 교회사의 사실만 보아도 보헤미아의 후스,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 등으로부터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 직접 개혁자들을 거쳐, 다시 프랑스의 얀세니스트, 네덜란드의 아르미우스 파, 영국의 웨슬리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지하고 방대한 성서 연구로써 민족적인 종교개혁과 신앙 확립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신학자로 알고있는 칼빈만 해도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실로 방대한 연구를 한 것으로, 일례로서 그중 욥기만 해도 159회, 이샤야가 343회, 사도행전이 149회에 걸쳐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그의 순 신학적인 저작이란 극히 적은 분량인 것입니다. 이 점 또한 김교신 선생의 신앙의 은사인 일본의 우치무라가 동양인으로서 생애 성서 연구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 특히 교회에 대한 본질로서 주장한 무교회 신앙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종교개혁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전수 근 백 년에 아직도 이야기체의 성경 공과서에 의한 성경 공부나, 그렇지 않으면 만담이나 수양담식의 설교를 일삼고 있는 한국 교회의 성서에 대한 태도로써는, 앞으로 또다시 백 년이 경과하여도 도저히 기독교 신앙을 진정 우리 것으로 이해, 소화, 파악할 수 없을 것을 단언하는 바 입니다. ...... 중략......
  도대체 신앙의 이해, 체험이란 결코 머리로써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서 자체에 대한 각자의 도덕적인, 전인적인 노력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누구의 간접적인 신학적 설명으로 깨쳐질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자 각자가 성서진리를 사실로 체험함으로써 바울, 베드로, 요한, 마태 등과 직접 통하게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성서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우리 자신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현대에 있어서 바르트, 브룬너 등의 위기신학 운동이 현대인의 도덕과 사회 전반에 대한 혁신으로서의 종교개혁에까지 진전되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 중략...... 이에 대하여 우리는 최태용씨와 함석헌씨를 들면 족할 것입니다. 두 분 모두 이 점에서 소위 정통 교회와 관계없이 순수한 성서적인 노력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태용씨의 초기의 순 성서신앙이 교회주의로 전환함과 동시에 니체,도스토예프스키 등 사상에 의한 소위 한국적인 신학 운동으로 변함으로써 끝내 도덕폐기론에 기울어져 전적으로 실패하고 만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함석헌씨 역시 순 성서로써 출발한 것은 사실이나, 그 후 씨의 주로 동양 제종교에 의해 기독교를 새롭게 해석하려한 기도가 결국 신앙의 혼합주의 경향을 거쳐 오늘날에 와서는 십자가도 부활도 없는 하나의 인간적인 사상, 합리주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국에서 동양학으로 유명한 유영모 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은 특히 해방 전부터 함석헌씨와 신앙관계가 깊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 점 나 자신의 기억으로는 김교신 선생 역시 유 선생을 극진히 존경하셨던 것은 사실이나, 선생의 신앙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이를 인생철학으로, 처세훈으로 받으셨을 뿐, 기독교로서 이를 용인하신 것은 절대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김선생은 최태용씨의 소위 교회주의와 신학 주장에 대하여도 '성서조선' 지상을 통하여 심한 논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상으로 나는 김교신 선생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우리가 2천년 기독교사의 결론으로 볼 수 있는 민족적인 신앙 소화, 이해, 파악,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한국의 교회주의에서 보는 단순한 형식적인 모방이나 제도적인 이식(移植)이 아닌, 기독교 신앙의 산 생명으로서의 민족적인 체험과 확립을 위해 경전 자체, 즉 성서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학구적 노력을 하고 가신 분으로 믿고, 선생께  깊은 공적인 감사를 금할 수 없는 바입니다.

 

다음, 성서연구 99호 (1962), '성서의 내용'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과연 성서에서 우리는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지배자인, 그리고 인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에 접한다. 특히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엄한 아버지로서의 정의와 심판과 책망의 하나님에 접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우리의 죄와 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애태우시는 인자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에 접한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접한다. 이리하여 모든 불의와 죄에서 해방되어 예수의 부활과 함께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 우주와 인류의 종국,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지배를 믿게 된다. 욕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순종하여 본능적인 생활을 지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고, 고난 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고, 불의와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갖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인간구원인 것이다.

 

 인간을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성서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하고 기독교 역사에서 또한 중요한 변화의 중심에 성서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위대한 주해자들의 성서연구, 그리고 일반 신자의 성서읽기를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우찌무라의 제자로서 성서로 시작했다가 신학이나 철학으로 돌아설 때 결국 진정한 성서적 신앙에서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고 그 예로서 복음교회 설립자인 최태용 감독이 교회주의로 돌아선 문제, 함석헌 선생이 동양사상과 기독교를 섞어서 혼합주의 사상가로 돌아선 문제를 지적하면서 안타까워하는 말씀인데,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읽되 읽는 마음의 자세 문제를 또 생각하게 합니다. 즉, 성경은 성경이 말씀하는 길을 따라가려는 자세를 가져야지 앞질러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면서 주의해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대개 성서말씀에 머물지 못하고 앞서 나가는 데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어느사이 기독교에서는 멀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혹은 비난하고 혹은 자기만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니 어쩌니 하면서 물의를 일으키고... 도대체 인간의 지능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라고....

 

 다음은 근래 읽은 한 신학대 교수의 성서소개관련 책의 서문의 일부입니다.(유승원, '책 한권의 사람').

 

 독일의 희극배우 칼 발렌틴이 공연한 단막극에 나오는 장면인데, 작은 원 모양의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있는데, 한 남자가 원둘레를 돌며 자기 집의 잃어버린 열쇠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경찰이 등장해서 그를 도와 함께 찾더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조명 아래서 계속 찾아보지만 열쇠는 나오지 않자, 경찰이 "여기서 열쇠를 잃어버린 것이 확실합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남자는 "아니요, 저쪽에서 잃어버렸는데요"라고 하면서 무대 한쪽을 가리켰다는 것입니다. 경찰이 어이없어 하면서 "그러면 거기서 찾아야지 왜 여기서 찾고 있는거요?"라고 물으니까, 남자는, "저쪽에는 빛이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단막극이 암시하는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이 극은 탈현대를 산답시고 절대적인 진리와 규범을 비웃으면서 무절제한 상대주의의 혼란에 빠진 우리 시대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즉, 집 안에 들어가서 평안과 쉬임을 얻기 위해)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다. 그런데 원래 열쇠를 떨어뜨린 그 장소는 제쳐놓고 엉뚱한 곳, 자기들이 조명을 비춘 후 자기 눈에 보이는 곳만 열심히 뒤지고 있는 모습, 이 인간 실패의 모습이다. 답을 얻으려면 원래 열쇠를 잃어 버린 그 지점으로 그의 조명을 옮겨놓고 거기서 찾아야 한다. 그 지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이다.

 

 즉, 해결해 주는 곳이 엄연히 있는데, 다른데서 아무리 불을 밝히고 찾아 보아야 그의 인생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인간도 단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유물론, 인간도 자연에서 나왔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어떤 가치규범의 근거도 찾을 수 없다는 자연주의, 또는 결국 명확한 것은 없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겟다는 불가지론, 이런 사상들이 말하자면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이 불을 밝혀놓고 열심히 찾고 있는 엉뚱한 지점이다. 어떻게 우연과 무지에다가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맡기겠다고 엉뚱한 곳에 조명을 밝혀놓고 거기를 뒤지고 있는가? 라고.
또 저자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유명대학에서 최고 학위를 얻었고, 교수로서 생애 3분의 2를 지식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인생도 역사도, 사회와 문화도 내 머리로는 모르겠더라. 정말 모르겠더라.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의 방법으로 주신 성경에 모든 것을 던졌다. 모르니까 하나님을 믿고, 무식하니까 성경을 믿었다. 그랬더니 보이더라. 그랬더니 사는 것이 뭔지 알 것 같더라. 성경은 신비하다. 그래서 남은 생애 성경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는 것이었습니다.

 

성서신애 제377호 p13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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