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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일부 ; 머릿말 - 노평구 ☼☼ "나는 해방 후 하도 답답해서 한 두번 선생이 경인지방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면 당신은 문제 없겠기에 실례지만 이를 권한 일이 있다. 선생은 "거기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하시며 한마디로 뱉듯이 거절했던 것이다. 나야말로 신앙을 생명으로 생애를 바쳤던 선생에게 이렇게 실례했던 것을 지금도 죄송하게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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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송 선생님
1988. 4. 10. 송두용 선생 기념 강연회에서 말씀한 것. - 최 태 사
         

제가 오류동에 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55년전인 1933년, 선생님이 30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1년도 못 있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송 선생님과 지낸 일들을 말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나왔습니다. 오래 전의 일이어서 기억이 희미하기도 하고, 말씀을 한다 해도 그 마음을 알고 말씀해야 옳은 판단이 나올 터인데, 위대한 이를 이해하는 일은 위대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인데, 더구나 하늘의 사람을 저 같은 부족한 자가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말씀을 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의 관용을 빌며 또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 용서를 빌며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생각나는 것고 송 선생님 조카 되시는 오류애육원 송석도 원장님의 말씀을 참고로 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들 아시는 바와같이 선생님은 무슨 일에나 이해 타산은 생각지 않으시고 옳다고 생각되면 결행하시는 분이신데, 그 때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 때에는 그만하면 좋은 환경 속에 사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처남 되시는 이의 말씀에 "내 누이가 불쌍해서 좀 도와주어도 늘 그 모양이니 이제는 더 도와줄 생각도 안 난다."고 하시며 도우려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랑곳 않고 그 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좋은 일을 하셔도 성경 말씀대로 "바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하신 대로 숨어서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은밀한 데 계시는 아버지가 기뻐하실 것만을 바라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밤 늦게 혼자서 무엇을 하시는지 너무 늦게까지 계셔서 평소에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같이 하시곤 하였는데 이상하게 여겨져서 조카님이 웬 일인가 하고 넘겨다보았더니 쌀 한 말값 정도씩 돈을 봉투에 넣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오류학원 학생들에게 "너희 동네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의 주소와 성명을 써오라." 하셔서 크리스마스 전날 일일이 찾아다니시며 돌려주셨답니다. 그런데 지금 개봉역 부근은 매우 번화해졌지만 그 때는 허허벌판에 빈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불쌍한 노인에게 "내일이 불쌍한 자의 친구가 되신 예수께서 나신 크리스마스인데 적은 돈이지만 쌀이나 사 잡수시오."하면서 그 돈을 전하니, 그 노인이 "누구신데 이렇게 주십니까?"하고 물으면서 고마워 할 때 아실 필요가 없다시며 나오셨는데, 그 노인에 의해 이러저러한 분이 와서 돈을 주고 가셨는데 성명을 물어도 아실 필요 없다시며 가신 그런 고마운 이가 있었다는 소문이 퍼져 오류학원 학생을 통하여 조카되시는 이가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며 "나는 우리 작은아버지 영향으로 이 날까지 부끄러운 일은 못 하노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좋은 일이란 내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며 그 일이 진실될수록 끼치는 영향은 큰 것입니다.

제가 오류동에 가 있을 때에는 선생님께서는 농사를 짓고 계셨습니다. 일요 집회도 한 동리에 사시던 유석동 선생님과 같이 교대로 말씀하셨고 농사도 열심히 지으셔서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길에 있는 개똥과 쇠똥을 모으셨습니다. 이것은 퇴비로 쓰셨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청소의 목적으로 하시는 일에 큰 원동력이었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인부를쓰실 때에도 집 가까이 사는 사람부터 불러 쓰셨습니다. 농사를 하셔도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추수를 하시면 조카님을 불러 놓은 것으로 골라서 몇 그릇에 담으라시고 그것을 김교신 선생님을 비롯하여 몇 곳에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답니다. 저에게도 처음 거둘 때마다 채소까지 보내 주셔서 고마운 생각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해에 오류학원에서 성서조선 독자 중심으로 동기 집회가 열렸는데, 그 때 김교신, 함석헌 두 선생님께서 저의 집에 유하시게 되었는데 불을 많이 넣어 드리지 못해서 몹시 춥게 지내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한 생각 금할 수 없습니다. 송 선생님께서 그런 줄 아셨는지 하루는 잠을 자는데 무엇이 넘어지는 소리가 나서 놀라 깨어 문을 열고 내다보니 나무꾼이 지고 온 나무를 부려 놓는 소리였습니다. 그 옆에 송 선생님께서 서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감사한 생각, 감사의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 오류동에 와서 사는 동안 믿음이란 남의 어려움을 돕는 일, 진실되게 사는 일 등등 선생님을 통해 더욱 느꼈습니다. 아직도 저는 이 모양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오류학원을 시작하실 때의 일을 송 원장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학원 학생 모집을 작고하신 신상철 선생과 같이 다니시면서 하셨는데 부근에 학교가 없었을 때이기도 하지만 교육의 필요성을 못 느끼던 때여서 한 30명 정도만 되었으면 한 것이 70명이나 모여서 교실은 그 곳에서 양조장을 하시는 이성환 씨에게 부탁하여 얻은 한 방뿐이어서 주야로 나누어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은 학교에 나오실 때마다 걸레와 비를 꼭 가지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열성에 감동한 양조장 주인(이성환 씨)께서는 선생님 하시는 일에 교실이 더 있어야 되겠는데 하는 생각에 그 부근에 땅 1,800평을 사시고 교실도 넉넉하게 건물을 지어 주셨습니다. 이 분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등짐장사로 시작한 분인데 송 선생님의 진실성에 감동이 되어 적지 않은 재산을 학교를 위해 내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선생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일들임에 틀림없다고 믿으며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이상이 제가 1년도 못 되는 동안 보고 느낀 바이옵고, 조카 되시는 송 원장님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후에 해방 직후 유치원도 설립하셨고 동리에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을 하셨고 심지어 교회 신설하는 일도 주동이 되셨다고 합니다. 또 교도소 초청으로 죄수들에게 성서 말씀 하는 일도 오래 계속하셨답니다. 그보다 더 귀한 일은 나병환자, 거지들을 집에 데려다가 재우며 도와주는 일 등 남 모르게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일은 아마 나만이 아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송 원장은 말했습니다. 그 후의 일도 아는 일은친구 되시는 모씨와 시계점을 하시다가 생각이 같지 않음을 느끼고 손을 떼실 때 잘 해 보라고 하시며 이해 타산 없이 밀어 주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내시는 동안 살림이 궁핍해지니 자식들이 불평을 하게 되어 그 말씀을 전해 드렸더니, 예수께서 "네 부모나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라고 하셨다고 하시며 조금도 주저하시지 않고 남을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농장을 정리하시고 역전에 집을 장만하시고 이사하셨는데, 하루는 조카님을 부르셔서 "내가 지금 빚을 많이 지고 있으니 이 집에 그냥 살 수 없다."고 하시더니 그 집을 팔으시고 인천으로 이사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시는 것을 보고 동리 청년들이 선생님의 동상을 오류학교 뜰에 세우자는 의논이 되어 그것을 의논하러 갔다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런 쓸데없는 의논하려 왔으면 빨리 돌아가서 할 일이나 하라시며 내몰다시피 쫓으시며 그런 쓸데없는 의논들은 하지도 말라고 하셨답니다.

때때로 잡지사 등 언론 기관 기자들도 찾아와 선생님의 생활을 기사화하겠다고 사진을 청하면 거절하시며 돌려보내곤 하셨답니다. 참으로 위대하신 하늘의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하늘에 적을 두신 이가 아니면 누가 이럴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세상의 명예와 행복은 조금도 생각에 없으신 분입니다. 항상 "우리는 행복자다."라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우리를 믿게 하시고 우리 주변에 이런 이들을 만나게 해 주셔서 큰 교훈을 주시는 일 생각할수록 감사하며, 이 땅 위에서 하늘나라의 생활을 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사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뿌리신 생명의 씨가 길가에도, 가시덤불 속에도, 자갈밭에도 떨어져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옥토에 떨어져서 수십 배 수백 배의 열매를 맺음을 보게도 됩니다. 우리 신앙계의 대선배 되시는 박정수 할머니께서는 신앙적으로 교만했을 때에 송 선생님을 만나 당신의 교만을 꺾이게 되셨다고 증거하시는 말씀을 수차 들은 바 있습니다. 작고하신 권정님, 김애은, 그리고 현재 인천과 오류동 모임을 중심으로 모이시는 여러 분들도 제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통해 주님의 빛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음을 봅니다. 바울이 각처에서 하신 적은 전도,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뿌리신 복음의 씨가 점점 널리 발칸 반도에, 또 유럽에, 온 세계에 퍼져서 근 2,000년 후인 지금 우리에게까지 미쳐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사신 그 참과 사랑과 평화를 본받고 믿음만의 믿음을 굳게 가지고 삶으로써 우리에게도 내재(內在)하신 거룩하신 주님의 영이 힘차게 타서 빛과 향기를 널리널리 전하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거짓과 싸움에 차 있는 이 나라에 참과 사랑의 고마움과 평화의 즐거움을 알게 하여 다음 세대에 하늘의 축복을 받는 민족으로 파급되게 하여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하늘에 국적을 둔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은총이 여기 모인 우리의 영에 큰 불을 일으켜 주시기를 빌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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