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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일부 ; 머릿말 - 노평구 ☼☼ "나는 해방 후 하도 답답해서 한 두번 선생이 경인지방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면 당신은 문제 없겠기에 실례지만 이를 권한 일이 있다. 선생은 "거기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하시며 한마디로 뱉듯이 거절했던 것이다. 나야말로 신앙을 생명으로 생애를 바쳤던 선생에게 이렇게 실례했던 것을 지금도 죄송하게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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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용 선생님 (1)
- 1 주기 추도회 추도사 -     유 희 세
         

1953년 10월, 송두용 선생은 '과연 무교회는 실패인가?'라는 논문을 '성서연구'지에 발표하셨습니다. 이 글은 선생이 경남 김해 피란지에서 쓰신 것이어서, 선생이 49세 때입니다. 그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신뢰할 수밖에 없는 '기독공보'라는 잡지 제150호에 사설로 장로교파의 중심 인물인 김인서 장로가 쓴 '일본 학계의 종교적 동향'이란 글에 대한 반박문으로 송두용 선생이 쓰신 것이었습니다. 김인서 장로는 그 사설에서 '한국 교회와 내촌(우치무라) 씨' 라는 항을 설정하여 다음과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일본의 목회자들에게 고창(가카무라) 목사의 독자보다 내촌의 독자가 절대 우세한 것을 보면, 일본 교회도 문서 전도에 실패한 것이다. 한국 교회 독자층도 우치무라 독자가 절대다수다. 무교회중에 지독한 무교회주의를 직수입하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일대 우환이다. 모든 한국 교회의 지독한 분란의 원인은 5분이 한국인 당파 근성이요, 2분이 ○○중독이요, 3분이 내촌 중독이다. 금후 한국 교회는 문서 전도에 주력하여 교회를 가르치지 않으면 아니된다. 데라우치 총독은 이미 죽었거니와, 내촌 총독은 문서를 통하여 한국 내촌당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군림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한국 무교회에 대한 이와 같은 정면 도전을 받고 누군가가 이어서서 흑백을 가려 주어야 할 때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6·25 공산 침략보다도 무서운 진리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송두용 선생은그의 반박문에서,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백성으로 있을 때 일본의 교회주의자의 거두인 우에무라 목사의 발언, "조선 기독교는, 조선에 살고 있는 모든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일본 기독교가 이를 선교 지도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우치무라가 정면으로 반대하며 "조선 기독교는 외국인은 물론 인본이도 이에 관여할 것이 아니고, 조선인의 영의 일이니 조선인 자체가 이를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한 주장을 인용하셨습니다. 저는 송두용 선생의 이 때의 반박문의 결론 부분에서 약간 인용하겠습니다.

"자, 교회는 이렇게까지 무교회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건만, 대체 한국의 무교회 신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회 신자는 무교회의 성장에 대하여 공폴르 느끼고 있는데, 도리어 무교회 신자들은 무교회의 실패 운운할 만큼 비겁한 것은 무슨 모순인가/ 무교회라는 말도 하기를 기피하는 교회에 대한 관대한 동정은 플림없이 퇴보이며 실패인 것이 분명하다. 나는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는 무교회가 없다고. 그러나 그것은 한국에 국한한 일이다. 결코 무교회 자체는 죽은 것도 실패한 것도 아니다. 더욱 유대교가 기독교로, 가톨릭이 프로테스탄트로 진전하였다면, 교회가 무교회로 약진하는 것은 당연 중의 당연사인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유대의 국경을 넘은 것같이, 무교회도 일본의 국경을 벗어나 한국은 물론 전세게를 압도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인 것이다. 요는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 복음이냐 아니냐,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문제일 뿐이다. 사람의 실패가 무엇이냐. 원래 복음은 복음 자체의 힘으로 사는 것이다."

1959년 5월(55세), 송두용 선생은 전도 잡지 '성서인생'에 '담담한 2만 일'이라는 글을 실으셨는데, 거기에 선생이 신앙에 들어오게 되신, 젊은 시절의 경위를 쓰셨습니다. "나는 보통학교와 고등 보통학교를 마친 후 19세 되던 해 3월에 동경으로 유학한 것이다. 다음해인 1923년 9월 1일 동경에 큰 지진이 일어난 통에 나는 구사 일생으로 겨우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어 그만 귀국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해 이른 봄부터 신경쇠약증에 걸려서 앓기 시작했는데, 병은 점점 중하여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인생 문제로 한창 고민하는 그 때에 나를 당신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얽매신 것이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주님의 모습을 뵈온 것이다. 나중에 생각하니 이것이 곧 성령의 역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22세(만21세) 되던 1925년 봄의 일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심히 강한 빛을 본 것같이 어리둥절하였다. 그 때에, 지금까지의 나는 상상도 못 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다시 동경에!'

나는 두 번째로 동경에 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동경에 간 것은 공부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보다 크고 중한 것은 '예수를 믿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뜻을 이루어 5월부터는 무교회주의의 창시자 우치무라 성서 연구회에 참석하게된 일은 무엇보다도 형언할 수 없는 감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이렇게 하여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육에서 영으로, 땅에서 하늘로 인생의 방향과 묵표가 바꾸어진 것이다. 얼마나 놀라우며 오묘한 일이냐? 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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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I. 환송예배 신앙 만의 생애 - 목 록 file 늦깎이 2009.01.01 27619
15 IV. 일본 친지 송두용 선생님에 대한 감사 - 森山浩李(삼산호이) 늦깎이 2008.12.31 5221
» V. 추도회 송두용 선생님 - 1주기 추도회 추도사 (1) - 유 희 세 늦깎이 2008.12.31 5454
13 V. 추도회 송두용 선생님 - 1주기 추도회 추도사 (2) - 유 희 세 늦깎이 2008.12.31 5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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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V. 추도회 30대의 송 선생님 - 1988. 4. 10. 송두용 선생 기념 강연회에서 말씀한 것. - 최 태 사 늦깎이 2008.12.31 5383
10 V. 추도회 진실로 믿은 분 - 1987. 4. 11. 1 주기 추도회 개회 인사 - 이 진 구 늦깎이 2008.12.31 5434
9 V. 추도회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라가신 선생님 - 박 정 수 늦깎이 2008.12.31 5517
8 V. 추도회 송두용 선생과 시계판 - 주 광 호 늦깎이 2008.12.31 5112
7 V. 추도회 송두용 선생님을 추모함 - 배 명 수 늦깎이 2008.12.31 5165
6 V. 추도회 믿음을 사신 송두용 선생님 - 이 진 영 늦깎이 2008.12.31 5296
5 V. 추도회 송두용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 백 충 현 늦깎이 2008.12.31 5432
4 V. 추도회 송두용 선생님 2주기 기념회에 참석하고 - 주 연 숙 늦깎이 2008.12.31 6165
3 VI. 논고 신앙애의 생애(1 of 3) - 주 옥 로 늦깎이 2008.12.31 5853
2 VI. 논고 신앙애의 생애(2 of 3) - 주 옥 로 늦깎이 2008.12.31 5766
1 VI. 논고 신앙애의 생애(3 of 3) - 주 옥 로 늦깎이 2008.12.31 5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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