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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일부 ; 머릿말 - 노평구 ☼☼ "나는 해방 후 하도 답답해서 한 두번 선생이 경인지방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면 당신은 문제 없겠기에 실례지만 이를 권한 일이 있다. 선생은 "거기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하시며 한마디로 뱉듯이 거절했던 것이다. 나야말로 신앙을 생명으로 생애를 바쳤던 선생에게 이렇게 실례했던 것을 지금도 죄송하게 생각한다." ☼☼
II. 친지와 독자
2008.11.21 10:15

무서웠던 우리 선생님 - 홍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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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웠던 우리 선생님

[홍 정 표]


선생님께서 떠나가시던 날은 불효 자식이 부모 여의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분은 이런 순간에 만세를 불렀다던가, 내 마음은 그러하질 못하였으니, 말문이 막히고 아쉽고 허전한 생각이 온종일 가슴을 채웠다.

그리스도의 삶을 몸소 생활로 펴 보이셨고, 일생을 외곬 진리 하나로 줄달음치시다 떠나신 선생님! 한국 무교회의 어른으로서 내촌 선생님에게서 배우시고, 배우신 그대로 선히 따르신 최후의 분이셨던 송두용 선생님!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간의 기억들을 추려 모은다.

''44년생인 내 나이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이었으니 20여 년 훨씬 전이던가, ''성서연구''지를 통해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시골뜨기인 내가 성연지 주필 노평구 선생님께 엽서 100장을 시골에서 우송하면서 절반은 송두용 선생님께 전해 달라고 주문하였다. 며칠 후 송 성생님으로부터 벼락 같은 질책과 욕설(?)이 뒤섞인 답장이 날아왔다. "어떤 놈이 어른들에게 그따위(?) 것으로, 서울 노 선생님 댁과 오류동의 거리가 어딘데 심부름을 시켜? 고약하고 발칙한 놈!"이라고, 그리고 욕설은 더 계속되었던 것 같다.

대구 시골뜨기였던 내가 서울의 크기를 헤아리게 된 것은 그다음 상경 이후였으니, 이 답장은 두고두고 내게서 땀을 흘리게 한 기억이 되었다. 이날 이때까지 내 엽서 100매를 받아 50매를 송 선생님께 전해 주신 노평구 선생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이 없으셨으니, 나는 그 때부터 두 분을 두렵게 모시는 사람이 되었다.

한번은 고교 졸업 후 금방, 진학을 못 하고 있을 때였는데 오류동 송 선생님 댁을 상경길에, 그것도 빈손으로 방문하였다. 나의 빈손 방문을 아신 선생께서 노갈 일성, "젊은 놈이 어른께 빈손으로 달랑달랑 다녀? 어른은 사탕 한 봉지라도 가지고 오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하시며 오류역 앞 빵집으로 나를 끌고 가서는 빵을 많이 주문하신 뒤에 혼자서 실컷(?) 잡수시고 날보고 먹으라고 하셨다.

나와 송 선생님의 만남은 이렇게 무서운(?) 야단으로 시작되었고, 그 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께서는 가식이 없는, 참으로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신 분이구나 하는 느낌이 더욱 컸었다. 뵐 때마다 야단과 질책의 연속이었지만 그것이 내겐 선생님의 매력인 양 나는 한없이 끌려들기만 하였다.

박윤규 선생 돌아가신 후 영결 예배 전날, 우리 집 큰놈이 태어난 것도 볼 겸(지금 5학년인데), 이웃 석관동에 거주한 탓으로 선생님께서 하루 유하셨다. 어떤 일로 편히 모시지 못한 송구스러움이 평생을 두고 잊을 길이 없다.

선생님의 승천 소식을 들은 날, 온종일 교실 수업에서 선생님의 뜨거운 일생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삶은 남을 위한 삶이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생활로써 펴 보이셨으며, 십자가 외에는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은, 그리스도에게만 사로잡힌 바 된 분이라고, 우리의 역사에서 길이 기억할 분이 오늘 돌아가신 선생님이라고 혼자서 연설을 계속한 하루였다.

여든이 넘으신 송 선생님 사모님께서 영결 예배 때에 "나는 예로부터 눈물이 적었던 사람, 눈은 보자는 눈이지 울기 위한 눈이 아니라고 생각되었으나, 선생님이 떠나고 나신 지금은 보기 위한 눈이 아닌 그리운 이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눈으로 바뀌었으며, 또 이제야 비로소 과부 사정을 겨우 알 것 같다."라고 하신 말씀은 참 가슴에 남는 말씀이 되었다. 나도 눈물이 적은 사람이다.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에도 눈물을 흔하게 보이지 못했는데, 선생님 떠나신 날에는 흐르는 눈물을 감당키 어려웠다. 선생님을 한번 편히 모시려고 마음먹었으되 한 번도 모시질 못하였고, 더 자주 뵈옵지 못햇으니 아쉬운 마음이 그지없다. 때로 궁동 아드님 댁 2층 창가에서 오래 서 계신 선생님을 보고 사모님께서는 "허구한 날 이렇게 자주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아 보였고, 오래 아무도 오지 않으면 짜증을 내신다."고 하셨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많은 내 친구들, 가까운 이들을 선생님께 데리고 가서 소개하곤 하였다. 이젠 시집간 김복희(대학 동창)씨는 여러 해를 무던히도 선생님을 따르며 때로 샘이 날 정도로 선생님과의 내왕이 잦았는데, 이번에 가정 일로 마지막 순간에도 선생님을 뵙지 못해 나 자신 서운한 마음이 컸었다.

비엔나에 선교사로 간 장성덕 목사, 근무하는 학교 직원 강경상, 마상국 교사 등등, 자주도 선생님께 소개드렸는데, 나에게는 그리도 욕을 하시고 질책을 잘하신 선생께서 내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깍듯한 예의로 대해 주셨다. 선생님께서 장봉 푸른학원에 계셨을 적에 노 선생님 하계 성서 집회가 그 곳에서 열렸는데, 그 때 국악예고에 근무할 때여서 내 학급 아이들 15명 가까이가 참석하게 되어 무던히 큰 떼가 되었는데도 두 분 선생님께서는 손녀들같이 그 미운(?) 아이들을 하나같이 예쁘게 다독거려 주셨고, 온갖 맛있는 것을 일부러 구해 많이도 먹여 주셨다. 철두 철미하게 무서우신 분이었으나 선생님만큼 속속들이 따스한 인정을 펴 보이신 분도 드물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그도 저도 못 하여 줄곧 말씀 못 하신 채 누워 계셨고, 말씀은 주로 눈빛으로 하셨다. 그 연약하신 중에서도 악수하실 때에 으스러질 듯이 힘 있게 잡아 흔드심은 더욱 철저히 살아가라고 결려하심이 아니었나 생각되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빛만 보아도 감히 이야기가 통했다고 느껴진다. 말씀하실 수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진한, 진지한, 오직 ''참''만을 주창하신 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석진영 선생이 오랜만에 서울을 찾으셔서 쫓기는 시간 관계로 송 선생님을 뵙지 못하고 떠나가시려던 날, 기어이 땅에서는 마지막 대면이 될지도 모르는 선생님을 뵙고 가셔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다음날 선생님을 뵈옵고 가셨다고 들었다.

최근 선생님을 뵈오면 10분이고 15분이고 그냥 전혀 눈을 움직이지 않으신 채 주시해 오는 데는 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선생님의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감히 안다고 생각하기에 더한 두려움에 빠졌다.

"이놈아! 나는 네 생활을 잘 알아! 돼지처럼 처먹고 사는 일에 코가 빠져 점점 흐릿하여져 가고, 이전에 그 쇳소리나게 카랑카랑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삶은 무처럼 멋대가리 없는 놈이 되었느냐? 교육이라고 합네 하면서 귀찮은 일 싫어하고, 타성에 젖어 쉬운 일만 꿈꾸고 적당하게 덜 부대끼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무사 안일에 밴 네 생활이 도대체 뭐냐 말이야! 성서를 배우고 진리를 향한 우리는 스승 앞에서 네놈처럼 그렇게 엉터리로 엉성하게는 살지 않았어. 내가 지금 누워 꼼짝 못 하고 있으니 더욱 갑갑하다. 그렇지만 않다면 당장이라도 일어나 네놈의 면상을, 뒤통수를 쥐어박았을 것을! 이놈아! 불신자가 나이 많으면 때가 묻고 죄가 더하는 것이지, 신앙에 연륜이 더하고 진리에 더욱 의젓이 서 있는 크리스천이 어찌 네놈처럼 그렇게 무기력하게 지친 생활로 허덕이며 사는 것 보았느냐? 예전의 네 모습은 어디로 갔느냐, 이놈아! 이 우라질 놈아!"

나는 그 질시, 질타하시는 듯한 눈빛을 오래 대하고 보면 속이 괴롭고 고통스러워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고 하여 일어서곤 하였다. 집에 돌아오면 집사람에게 "나는 선생님이 무서워 이젠 오류동에 갈 수가 없어."라고 말하고도 또 때가 이울면 두려워하면서도 가서 뵙곤 하였다.

그 두려움의 심도가 더욱 깊었으니 내가 더욱 부질없는 생활의 나락으로 떨어져서인가 아니면 선생님의 영안이 더욱 하나님께 가까워져서 그런가, 아무래도 두 쪽 다 옳았다고 여겨진다. 정말 괴롭고 무서워서도 선생님을 다시 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돌아가셔서 나 자신 질시의 그 눈빛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기까지 하였으니, 나는 스승을 가진 자가 아니요 오히려 스승을 저버린, 배역하고 팔아먹는 가룟 유다가 아니었던가 하는 고통을 갖게 된다. 내가 사모님께 선생님이 무서워서도 자주 와 뵙지 못했다고 했더니, "이 바보야, 뭐가 무서워. 할아버지가 얼마나 네 생각을 하셨는데."라고 하셨를 때에는 한없는 서글픔이 가슴에 밀려왔다. 내가 [이하 글 내용 : 유실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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