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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일부 ; 머릿말 - 노평구 ☼☼ "나는 해방 후 하도 답답해서 한 두번 선생이 경인지방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면 당신은 문제 없겠기에 실례지만 이를 권한 일이 있다. 선생은 "거기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하시며 한마디로 뱉듯이 거절했던 것이다. 나야말로 신앙을 생명으로 생애를 바쳤던 선생에게 이렇게 실례했던 것을 지금도 죄송하게 생각한다." ☼☼
I. 환송예배
2008.11.21 09:59

송두용 선생님 장례기(1)(2) - 이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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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두용 선생님 장례기 (1)(2) [이 진 영]

(1)

송두용 선생님은 1986년 4월 10일 오전 6시 45분, 사모님과 자녀와 박정수 할머니께서 찬송을 부르면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송 선생님은 하늘의 사람이셨다. 땅에 붙어 사는 자는 땅에 대해 일하고, 하늘을 향해 사는 자는 하늘의 소리를 한다. 그런데 땅에 속해 있는 내가 감히 선생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는지? 두렵기만 할 뿐이다.

송 선생님은 김교신 선생과 함께 한국 무교회의 양 기둥이셨다. 그의 스승 우치무라[內村鑑三] 선생의 순수한 신앙과 생애(애국)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국에 전하셨고, 회심을 통하여 예수 앞에 단독으로 서신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신앙만의 신앙을 사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글자 그대로 부귀, 권세, 명예, 처자식, 아니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예수의 십자가만을 붙잡고 사신 분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믿기 위한 삶이었다. 선생님은 예수 믿는 일을 최고의 진리로, 인생의 목적으로, 매일의 일로 사신 분이었다. 선생님 앞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하늘의 사람이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진구 선생과 가족들은 선생님을 잃은 슬픔 속에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평안히 모시기 위한 장례식 준비로 들어갔다. 그래서 우선 전화로 국내외 가까운 친지와 믿음의 형제들에게 승천하신 소식을 전했다.

이 선생은 연락을 받고 뛰어오신 노평구 선생, 유희세 선생, 송문호 선생과 함께 장례식 절차에 대하여 상의를 하셨다. 노평구 선생께서 고별사를 하시기로 하고, 12일 오전 11시 정각 궁동 207-9번지 자택에서 영결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이어서 함석헌 선생, 유달영 선생 등과 조세장 장로, 주광호 씨 등 믿음으로 관계되는 분들과 오류학원 관계자, 그리고 상제의 친구분들이 찾아 주셨다.

채규철 선생의 주선으로 한국일보에 기사로 취재되었고, 조선일보에 부고도 냈다.

조세장 장로께서는 큰 별이 하나 떨어졌다면서 애석해 하셨고, 유달영 선생과 유희세 선생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일제 때 유치장 생활 하실 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우리 김교신, 송두용, 함석헌 선생들은 지독한 일본 검사들 앞에서 아주 태연하고 당당하게 대하시고, 변명이나 용서받으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당연한 일''로 ''이것이 내 집''이라는 평안한 태도여서 일본 경찰들이 놀랐다는 것이다.

오후8시부터 이진구 선생 주관으로 승천 예배를 드렸다. 사모님을 비롯하여 오류동과 인천 모임 식구 그리고 홍정표 씨, 강치안 장로님, 유가족, 송석도 애육원장 등 방이 꽉 찼었다.

이진구 선생은 성서 말씀을 통해 "나는 가겠고 너희는 죄중에 죽으리라."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이제 선생님은 가셨는데 우리는 죄중에 빠진 것이 아닌가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의 전도는 1대1의 전도로 심혈을 기울이신 분이라고 하시며, 선생님은 날짜로 하면 29,815일을 사셨다고 하셨다. 또한 선생님은 예배드리는 일을 가장 소중히 하셨으니 문상객이 많이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각자 자연스럽게 소감을 말씀하라고 하셨다.

송 선생님의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 사랑은 무서운 의와 사랑이었다. 생과 사의 선택이었다.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각자 받은 은혜의 분량은 다 다르겠지만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영혼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와의 만남을 가진, 거듭난 새 삶을 찾은 이들이 할 말을 잃고 못 함은 선생님과의 관계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선생께서는 불초 제자라고 하시면서, 부족한 자신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시고 선생님 앞에 청개구리에 불과하다고 하실 때, 우리들 모두는 가슴이 아픔을 느꼈다.

장봉의 성명주 씨는, 선생님은 지금 하늘 나라에서 아무 고통 없이 평안히 계실 것이라면서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기쁨으로 상면하고 계실 선생님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토록 바랐던 하늘나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 스승 우치무라 선생, 김교신, 이찬갑 마사이케, 권정님, 박석현, 김애은 등등 많은 분들과 함께 활짝 웃으실 선생님의 영혼을 보는 듯했다. 다음으로 홍정표 씨는 선생님의 눈초리는 "나의 죄를 꿰뚫어보시는 무서운 분."이었다고 증언했다. 계속해서 인천의 송문호, 길광웅, 배명수 씨 등이 소감을 발표하고, 필자의 기도로 9시 30분경 예배를 마쳤다. 사진을 바라보면서 여기저기에서 소리없이 흐느끼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 뚫어져라 하고 쳐다보시는 듯한 매서운 눈, 세상의 죄를 저주하시는 분노의 얼굴, 선생님 앞에는 모두가 부족했다. 어찌 그 고귀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으랴.

 


(2)

 

4월 11일(금요일)

선생님이 부르심을 받은 지 둘째 날이 되는 날이다.

곡하지 말라고 유언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조용히 울고 있었다. 9시부터 백충현, 배명수 씨 등 가까운 제자들에 의해 입관이 진행되고, 10시부터 유희세 선생 주관으로 입관 예배를 드렸다. 유 선생께서는 송 선생님의 입신 동기로부터 자세한 말씀(5월호 ''송두용 선생님'' 참조)을 하셨다. 강치안 장로님의 기도로 예배를 마쳤다. 미국에서 날아온 막내아들 석중(화민)씨가 입관 전에 도착한 것은 다행이었다.

하루 종일 원근에서 많은 조객이 다녀갔다. 선생님은 육의 자녀와 영의 자녀를 구별해서 생각하지 않으셨다. 너와 내가 하나되는 일을 실천적으로 살아 오셨다.

저녁8시부터 투병하시던 이층 방에서 이진구 선생 주관으로 마지막 저녁 예배가 있었다. 대전에서 성주확 씨, 대천 유원상 선생, 부산 성정환 씨, 서울 김철웅 씨 등과 오류동, 인천 모임 식구들 30여 명이었다. 이진구 선생은 ''83년 5월 3일 송 선생님께서 일부러 부르셔서 유언을 하셨다고 그 내용을 설명하셨다.

첫째,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부탁하셨는데, 나는 유자녀의 신앙을 부탁하신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지금 생각하니 우리들 모두의 신앙을 걱정하신 것을 절실히 느끼며, ''너는 지금 믿고 있느냐?''고 힐문하시는 듯하다."하시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하실 때 앉아 있는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을 줄 생각된다.

둘째는, "상복 입지 말고 곡하지 말고, 화장으로 할 것이며, 네가 주관하여 가족적으로 조용, 간결하게 하라고 하셨는데 유언대로 하지 못한 것을 못내 죄송하게 생각한다." (5월호 ''개골개골 하리라'' 참조)고 말씀하시며, 선생님의 뜻은 분명 그러했지만 우리로서는 그럴 수 없는 면도 있다시며 유언을 무시한 죄책감을 감추지 못하고 통회하는 간증의 말씀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무력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된 것같이, 우리들은 약하나 선생님이 부활하신 영으로 우리들 사이에 오셔서 힘을 주셔서 우리도 새사람이 되기를 빈다고 말씀을 맺으셨다.

이어서 성명주 씨는 선생님의 말씀 중에, 믿음을 배우는 것은 수영을 배우는 일과 같다고, 수영을 배울 때 물에 몸을 맡기고 머리부터 물에 푹 담그고 몸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몸이 저절로 뜨게 되어 수영을 할 수 있게 되듯이, 신앙도 발버둥치지 말고 가만히 전부를 맡기고 있으면 믿을 수 있게 된다고 가르쳐 주셨다면서, 실제로 그렇게 했더니 믿을 수 있게 되었다면서 하나님께 죽든 살든 맡겨야 할 것이라는 간증을 하셨다.

이어서 유원상 선생은, 선생님은 무서운 분이었고, 죄의 용서와 회개하는 자에게는 사랑으로 감싸 주셨다고 말씀했다.

이어서 필자가 간증한 후 마지막으로 백충현 씨가 큰 소리로 "송 선생님이 어떤 분인데 이 집에서 떠들고 소란을 피우느냐!"하며 경건치 못한 청년들의 소란을 분개하며 꾸짖었다. 제일 자주 병석을 방문하여 선생님의 최후를 안타까워하던 70이 가까운 제자가, 선생님 계실 때는 쥐죽은 듯 꼼짝 못 하던 사람들이, 돌아가시자마자 세상 사람들만 웅성거리고 판을 치는 꼴이 안타까워 분개하여 노발 대발함도 있을 만한 일이었다. 송 선생님은 우리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룰만큼 진지하고 엄숙하신 데가 있던 분이다. 그것은 내촌 선생에게서 받은 특징이기도 하다. 내외로 청결, 성심, 진실이셨다. 산 하나님을 생활로 섬기셨다. 그러기에 박정수 할머니께서는 늘 송 선생님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본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런 점이 선생님 앞에 서면 옷깃을 여미게 하고, 거짓말할 수 없게 한다. 무섭다고 함도 사랑을 느낌도,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그 지극하신 마음도, 그것이 인간 송두용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선생님의 모습임을 보게 된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의 생활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선생님처럼 믿기만 하면 의식주는 물론 좋은 친구와 건강 등 모든 것을 풍부하게 주시는 것을 봤다. 예수만 믿고, 내가 죽고 예수 안에 거하면, 예수를 먹고 살면 구원해 주시는 것을 선생님을 통하여 우리는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대로는 성의를 다해도 위에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들의 예배를 지켜보시던 조 변호사님은 "우리 동서 송두용 형은 외롭지 않았다."면서, "일제 때 감옥살이에서도 늠름하게 오히려 살이 쪄 가지고 1년 만에 나오시고, 오늘 이와 같은 제자들이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외롭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격려해 주셨다.

필자의 기도로 9시 20분 예배를 끝냈다.

목자를 잃은 양들은 각자 제 갈길을 갈 것이다. 스승을 잃은 슬픔이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각자 선 자리에서 새 출발하는, 거듭나는, 회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헤어졌다.

 

4월 12일(토요일)

선생님과 마지막 보내는 고별 예배날이다. 날씨는 청명했다.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였다. 선생님 댁 앞의 공터를 다듬어 천막을 치고 식장을 꾸몄다. 노평구, 함석헌, 박정수, 김봉국, 유달영, 최태사, 정태시, 고병려, 노연태, 이희건, 최선근, 이기문, 국희종, 주옥로, 홍순명, 김유곤, 신태래, 오영환 씨 등 신앙 동지와 후배들을 비롯하여 300여 명이 참석했다.

11시 정각에 이진구 선생 사회로 고별 예배가 시작되었다. 찬송가 ''나의 갈길 다 가도록''(434장)을 부르고, 광주 국희종 선생의 기도, 필자가 약력 보고, 노평구 선생의 고별사, 함석헌 유달영 박정수 김봉국 선생들의 조사, 사회자의 조장 조전 낭독, 유원상 선생의 기도, 그리고 친척 대표로 송석도 씨의 인사 말씀, 찬송가 188장 선생님이 항상 즐겨 부르시던 ''만세 반석 열리니''를 부르고 식을 끝냈다.

사회자 이진구 선생은, "선생님의 생애로 보면 더 큰 사회적인 장례가 되었어야 마땅하겠으나, 선생님의 유언으로는 가족만의 조용한 장례를 하라고 하셨는데 유언대로 못 한데 대하여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덧붙이셨다.

노평구 선생은 다시 뛰어나와서 선생님이 대단히 좋아하셨다는 시 ''독립''을 원문대로 영어로 낭독하시고, 또 번역하여 우리말로도 낭독하셨다.

12시 30분에 영구차를 선두로 버스와 봉고차, 승용차까지 십여대의 행렬이 김포 공원묘지로 향했다. 묘지에 1시 반에 도착하여 2시에 유원상 선생 주관의 간단한 하관 예배로 선생님의 육신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 송두용 선생을 이 나라에 보내주신 일을 감사하면서, 선생님의 생애가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참되게 살 것을 다짐하면서 부족한 보고를 끝내는 바이다.


(서울, 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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