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노 평 구 서문을 쓰라고 하는데, 선생의 모든 것은 본서의 많은 이들의 글로써 분명히 된 것이므로 간단히 쓰기로 한다. 선생은 젊은 날 동경에 유학 중 무교회 신앙의 창시자 내촌감삼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성서를 배우게 되었다. 거기서 김교신, 함석헌 선생 등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 여섯 분들이 신앙동지로서 1927년 동경에서 ''성서조선''지를 발간했다. 이때 송 선생은 23세로 여러분 중 제일 어린 나이였다. 여러 선생들은 차츰 귀국헤서 대체로 교육계에서 일하며 ''성서조선''지와 함께 주일 성서연구회로써 무교회 신앙운동을 폈다. 그런데 송 선생은 오류동에 정착, 농사와 함께 무산아동 교육에 진력하며, 한편 주일 가정 성서연구회로써 경인지방을 중심으로 무교회 전도에 진력했다. 그리고 이는 해방 후에는 ''영단''지 등 발간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결국 선생 생애의 일관된 일이란 무교회 신앙 전도라고 하겠는데,그러면 선생의 신앙적 특색은 무었이었던가, 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선생의 은사 되는 내촌감삼은 자신의 무교회 신앙을 루터신앙의 완성이라고 했지만, 송 선생의 신앙 역시 철저히 루터의 신앙만의 신앙이었던 것이다. 김교신 선생도 송 선생의 신앙을 멧돼지 신앙이라고 했다. 이렇듯 선생의 신앙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었다. 생애를 이로써 돌진했다고 할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해방 후에 있었던 송 선생 입신 50주년 기념회에서, 세상에서는 나를 다섯번 변했다고 하는데, 송 형의 신앙은 초지일관 변함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함 선생은 자신의 신앙변동을 신앙의 진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루터의 개혁신앙의 모토는 신앙만의 신앙인데, 이는 결국 갈라디아서의 "사랑의 발동시키는 신앙"(갈 )이었던 것이다. 송선생의 신앙을 신앙만의 신앙, 멧돼지 신앙이라고 할 때, 이 사랑의 발동이 완성했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야말로 선생의 신앙이 살아있는 증거였던 것이다. 김 선생은 또 선생을 평하여, 주위에 냉수 한잔을 떠주기에 정성을 다했다고 했던 것같다. 사랑의 실천을 말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점 놀라운 것은 선생은 6·25 동란 후 일관해서 김일성 씨를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한 것으로 안다. 원수 사랑의 기도였다. 우리는 본서를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선생의 위대한 믿음과 더욱 이에서 발동되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의 실체에 접하게 될 것이며 또 이에서 깊이 배우게 될 것이다. 선생을 우리에게 주셨던 천상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 나로서 한가지만 더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씨조선 5백년 아니 해방 후 반세기 오늘까지 계속 정치적으로 격동하고 있는 우리 역사다. 나는 해방 후 하도 답답해서 한 두번 선생이 경인지방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면 당신은 문제 없겠기에 실례지만 이를 권한 일이 있다. 선생은 "거기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하시며 한마디로 뱉듯이 거절했던 것이다. 나야말로 신앙을 생명으로 생애를 바쳤던 선생에게 이렇게 실례했던 것을 지금도 죄송하게 생각한다. 1989년 3월 일 노 평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