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용신앙문집. 제1권.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노평구 유희세 송문호 송석중 이진구. 제 9 부. 성서신애(聖書信愛) II. 1973년 10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주필(主筆) : 송두용(宋斗用). 성서신애사.
섬은 육지보다 춥다. 그것은 바람 때문이다. 바람만 아니면 도리어 육지보다 훨씬 따뜻한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이야 춥거나 말거나 이제 봄은 확실히 왔다. 부활절도 지냈거니와 화신(花信)은 남쪽에서 들려올 뿐더러 이 섬에도 진달래가 피었다고 누군가가 알려주어서 반가웠다.
올해도 벌써 4월이 되었다. 4월이면 사람들은 먼저 4·19를 연상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4월 하면 나는 잊혀지지 않는 아니,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실은 잊어서는 안될 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4월은 김교신의 달이며, 그 25일이 김교신의 날이기 때문이다.
김교신(金敎臣)은 1901년 4월 18일에 나서 1945년 4월 25일에 아깝게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의 짧은 생애를 한탄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만도 않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만이 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한 일이다. 김교신은 분명히 짧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죽어도 죽지 않는 삶' 그렇다, '영원히 사는 삶'을 살았다.(요 11 : 25-26)
김교신은 일찍이 19살에 함흥 농업학교를 마치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본에 건너가서 앞날을 준비하였다. 실은 그 해가 바로 1919년, 즉 기미년 3·1운동(三一運動)이 일어난 해였다. 유관순(柳寬順)은 나이 16세밖에 안된 어린 여자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데 하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김교신은 보다 더 큰 일, 보다 더 중요한 일, 그렇다, 우선 자신을 위해서도 또한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도 영원히 썩지도 않고 폐하지도 않는, 더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일을 위하여 준비하였다면 감히 누가 비난하거나 시비할 것인가 ?
김교신은 일본에 간 바로 다음해, 즉 1920년 그가 20세 때에 온 세계에 떨치는 기독교의 제2의 종교개혁자요, 신앙만의 신앙을 확립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에서 7년 동안 성서를 배우고 진리를 탐구하면서, 한편 고등사범학교(高等師範學校)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알기 위해 박물학(博物學)을 연구하였다. 배우면서 그러나 학문적인 이론이 아닌 산 체험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구세주(救世主))이심을 깨달아 그 진리를 동포에게 전하여 나라를 빛나게 하였고, 젊은 영들에게 그 일을 증거(證據)하다가 목숨을 바쳤으니 얼마나 귀하냐 ?
('78. 4. 신애. 통권 2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