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용신앙문집. 제1권.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노평구 유희세 송문호 송석중 이진구. 제 9 부. 성서신애(聖書信愛) II. 1973년 10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주필(主筆) : 송두용(宋斗用). 성서신애사.
'성서신애'의 표지에는 '주필 송두용'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다달이 잡지를 받을 때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과연 내가 주필의 임무를 하는가고 말이다. 아 ! 아 ! 내가 불충실한 것은 어찌 잡지에 대해서뿐이랴만 ! 이제 새삼스럽게 변명이나 핑계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할 필요도 없지만. 혹시 독자 중에서 누가 의심하거나 불쾌하게 여기거나, 또는 원망, 비난, 심지어 욕을 하더라도 유구무언(有口無言)일 뿐이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도 나 자신이 항상 불안하고 염치없다. 이미 나의 사정과 형편을 알고 있는 독자도 많겠지만, 그래도 일단 나의 경우를 밝히는 것이 좋을까 하여 이 기회에 '성서신애'의 현황을 적어 보련다.
나는 1968년 늦가을부터 병명도 모름 채 반년 이상 앓다가 다음해에는 많이 회복되기에 그 봄에 전지 요양(轉地療養)차 서해 낙도 장봉섬에 온 것이다. 장봉에는 노연태 형제가 1967년에 설립한 '푸른학원'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오자 노 군은 곧 강화로 이사하면서 학원은 내게 맡겼다. 나도 이의 없이 장봉에 주저앉은 것이 어언 만 8년을 지내니 어느 틈에 금년이 바로 푸른학원 창립 10주년이다.
나는 섬에 온 후로도 잡지를 계속핟가 1973년 7월에 폐간하려고 하였더니 몇 형제가 "우리가 계속하겠으니 그대로 유지하자."고 제의, 나는 주저하다가 몇가지 이유 때문에 승낙하였다. 그 후로 몇분이 원고와 함께 인쇄비도 부담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김유곤 형제가 편집과 교정을 맡아서 수고하다가 갑자기 대전으로 이사하게 되어 그의 바통을 이진구 형제가 옮겨 받아 편집, 교정, 발송은 물론 결국 비용까지 책임지는 형편이다. 이것이 한국의 실정이며 무교회의 어려움임을 누가 알랴 ?
도대체 '성서신애'를 존속시킬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어리석기보다는 차라리 고집과 허영이 아닐까 ? 그러나 필자들은 얼마나 성심성의인지 모른다. 박석현, 고병려, 유희세, 문정길, 김유곤, 이진구 등 그들은 결코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복음의 소리'를 외칠 뿐이다. 어찌 잡지를 무시하며 배쳑하랴 ? 허락하실 때까지 순종하며 천부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할 뿐이다.
('77. 6. 신애. 통권 2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