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용신앙문집. 제1권.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노평구 유희세 송문호 송석중 이진구. 제 9 부. 성서신애(聖書信愛) II. 1973년 10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주필(主筆) : 송두용(宋斗用). 성서신애사.
3월은 우치무라(內村鑑三)의 달이다. 선생은 1861년 3월 24일에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나서 1930년 3월 28일에 또한 도쿄에서 세상을 떠나 승천하셨다. 향년 70세. 선생의 죽마고우이신 미야베(官部金吾) 씨는 그의 '우치무라 간조 소전'(內村鑑三 小傳) 초두(初頭)에 "기독교계의 위인 우치무라 간조는 1930년 3월 28일 오전 8시 51분 자는 듯이 평안히 그 영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향년 70세. 곰곰 군의 파란에 넘친 귀한 생애를 돌아보건대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 : 19)라는 거룩한 뜻으로 말미암아 군을 택하신 자취를 밝히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문에 군을 삿포로로 인도하시고 미국에 보내셨으며, 소위 '불경(不敬)사건'까지 일으키셔서 모든 고통환난을 모조리 겪게 하시고, 연단(練鍛)에 연단을 거듭하사 마침내 군으로 하여금 독립독보(獨立獨步), 문필과 강단에서 순복음을 선전하게 하시며, 또한 확고한 일본적 독립 기독교의 기초를 쌓게 하셔서 미래 있는 영광의 위업을 남기게 하신 것입니다."라고 기록함과 같이 이제 우치무라는 일본에서만이 아니고 그야말로 국제적, 세계의 기독교계뿐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참으로 후에 또 한번 기독교를 개혁한 인물로 등장한 것이다. '무교회'라면 그렇게 사갈시(蛇蝎視)하던 한국의 교계에서도 그가 떠난 지 50년도 되지 못한 이 때에 그의 저서를 다투어 번역하기 한창이니 모를 일이다.
우치무라는 말했다. "사람의 평가는 살아있을 때가 아니라 죽은 뒤에, 그것도 오래된 뒤라야 제대로 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어쨌든 사람은 살아있을 때에 많은 고통과 환난과 비애와 배척 등등을 세상에서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죽어서는 그만큼 아니, 그 이상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실" 뿐더러,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마 6 : 4, 6, 18. 25 : 21, 23)라는 칭찬과 영광을 받는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이냐 ?
나는 선생의 말년에 그의 말씀대로 "나의 찌꺼기를 먹는" 불행한 자 중 말석(末席)을 더럽힌 자의 하나로서 선생보다는 더 오래 살면서 선생을 욕되게 한 자이지만, 떠난 지 47년째 되는 이 해 이 초봄에 선생의 그 무서운, 그러나 확고한 정의와 신념에 찬 모습이 떠오른다.
('77. 3. 신애. 통권 2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