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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23:29

■ 나의 인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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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관



어느 해, 새 조수들의 환영회 때 어느 노교수(老敎授)가 "나는 정년(停年)도 가깝고, 달리 아무 희망도 없지만 만일 될 수 있으면 다시 한번 제군같이 젊은 조수 시절로 돌아가, 공부를 다시 새로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런 소원을 갖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내게 정해진 인생의 경기장(競技場)을 빨리 다 경주하여, 하늘에 불려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설령 이제 다시 청년 시대에 돌아가는 것이 허락된다 하여도, 이번에는 실수 없이 인생을 고쳐 살 자신이 없습니다. 또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인생의 슬픔이나 괴로움, 또는 그보다 더 큰 슬픔이나 괴로움이, 나의 새로운 인생에 닥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게다가 사실 나는 인생에서 배워야 할 최대의 지니를 이미 배웠고, 인생에서 구하여 얻을 최대의 보물을 이미 얻었으므로, 이를 구하기 위하여 다시 인생을 고쳐 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나의 인생의 상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나는 거기 가서 그것을 얻으면 됩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늘에 있어 내가 용감하게 인생의 경기장을 달려, 그곳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의 인생의 노고(勞苦)는 모두 그때 위로되고 갚아질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늙어질수록 더 큰 희열과 희망으로써, 목표를 향하여 전진 비약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미 얻은 인생의 진리니 보배니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라하면 종교의 하나로, 신학의 체계와 그에 관한 논쟁이 있고 교회의 조직과 그에 따르는 제도나 의식이 있고, 많은 교파와 교직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문제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 인생의 기쁨을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종교나 종교가나 종교 생활이나, 종교 냄새가 나는 것, 종교적인 것은 내 마음을 끌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종교적 진리가 아니고,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기쁨이 되는 진리는 인격성을 가진 것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기쁨은 인격적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인간의 한없는 기쁨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정밀한 법칙이라도, 인생의 환희는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인격 뿐입니다. 인격과 인격간의 기쁨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환희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보배는 사랑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사랑은 결코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해도 있고, 배신도 있고, 무력도 있고, 질투도 있습니다. 사람은 절실히 사랑을 원하지만 올바로 사랑할 줄 모르고, 또 사랑하는 힘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으로부터의 사랑에 대해서도 실망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보이신 사랑은 절대적(絶對的)이어서, 참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슬퍼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는 내 옆에 다가와, "너는 행복하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주어지니까"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진실이 내 영혼에 와 닿으면, 슬픔과 고난과 모순과 실패에 찬 나의 인생에도, 희열과 희망이 솟아납니다. 그것은 결코 나 자신의 마음의 노력이라든가, 깨달음, 명지(明智) 같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어진 결과입니다. 내 속에 투사(投射)된 그리스도의 사랑의 작용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은혜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그것을 논증하는 것은 신학의 임무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그 이론을 놀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하여 생긴 나의 인생의 변화를, 사실로써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상의 웅변적인 논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애인, 나의 구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나의 인생에서 최대의 발견입니다. 이 발견이 나에게 환희와 희망과 자유를 준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사랑의 언약이므로 이 세상의 어떤 권력도 이를 위협할 수 없고, 어떤 부귀도 이를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까, 나도 그리스도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실을 생각하면 인생의 고난은 기쁘게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박해도 죽음도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에 대한 부진실 뿐입니다.

나의 신앙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사이의 인격적인 사랑이니까, 이 사랑의 사귐에 남이 끼어드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종교의 제도나 교직자들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진 나의 영혼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신자입니다만, 아무 교파에도 교회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여기에 또 교회론이 대두되겠지만, 저는 의론을 하려는 것이 아니요, 다만 저 자신에 대한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나는 세례도 받지 않고, 어느 교회에도 속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를 미디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한 자유 독립의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은 기독교도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말 할 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나는 기독교도는 아니라도, 기독신자면 족합니다.

나의 신앙의 성질이 이런 것이니까,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라는 문제도, 내게 있어서는 실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무신론의 과학자라도 부부의 사랑을 기뻐하고 그 사랑의 순결을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과 사랑의 모순이라든가 조화라는 문제를 꺼내면, 꺼내는 자체가 웃음거리일 것입니다. 나의 신앙은 그리스도에 사랑받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사귐이므로 과학과의 모순 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사회 과학에 종사해온 사람이지만, 나는 신앙에 의해 주어진 마음의 희열과 자유로써 과학적 진리의 탐구에 종사할 수 있었고, 신앙이 직접적으로 과학의 진리를 끌어낼 수는 없으나, 신앙에 의해 자유롭게 된 마음은 과학적 진리에 대해서도 민감하고 연구 대상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과 불요 불굴(不撓不屈)의 연구심을 기르는 것입니다.

진리는 유일하지만, 인생은 복잡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방법이나 각도에 변화가 있습니다. 과학은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예술은 예술적 방법에 의하여, 종교는 종교적 방법에 의하여 진리를 압니다. 예를 들면 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과학은 저 별은 무슨 원소로 구성돼 있다든가, 태양의 몇 배쯤의 크기라든가, 지구에서의 거리는 몇 만 광년이라고 말합니다. 예술가는 그 별을 우러러 시를 만들고, 음악을 작곡합니다. 종교적 신앙을 가진 자는, 우주의 창조주인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합니다. 그들의 어느 것도 타를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술가가 “별이 깜박인다.”고 말했을 때, 과학자가 “별은 깜박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겠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별을 창조하셨다.”는 신앙의 찬미에 대하여, 별의 성립에 대한 과학적 가설(假說)을 꺼내어 반대하려 하면, 반대하는 쪽이 우습습니다. 바른 신앙은 과학에 좋은 자극을 줍니다. 그것은, 세계의 구조와 활동에 숨겨진 하나님의 지혜를 탐구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써 보면, 예술도 즐겁고, 과학도 즐겁습니다. 나는 종교와 과학과의 모순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니까, 방법론상의 혼동(混同)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과학적 지식을 종교적 방법으로 설명하거나, 또는 종교적 신앙을 과학적 방법으로 합리화하려는 시도는 많은 경우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고작해야 유추(類推)일 뿐, 정확한 지식, 또는 순수한 신앙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지하의 샘 깊은 곳에서 이어지고 있는 두 개의 분수(噴水)입니다. 곧 하나님에 있어 하나의 진리며 이것을 인간적인 작은 논리로 직접 결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 깊은 샘에 연결된 것으로써 과학은 참으로 생명과 환희에 넘치는 지식이 되고, 종교는 참으로 미신과 공리주의에서 해방된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신앙을 성서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 성서를 읽는 법을 가르쳐 주신 이는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 선생이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실이고, 우주와 인생과 역사는 나를 위한 교재입니다. 나는 이리하여 지금도 날마다 인생의 진리를 배우면서 희망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그 희망이란, 우주가 완성하고, 세계가 평화롭게 되고, 우리나라가 정의의 나라가 되고, 그리고 나 자신이 완전히 구원되는 일입니다.

나는 나의 인생관을 화려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걸어가야 할 것이지, 논할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인생관은 내가 걸어 온 길에 의하여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을 야단스럽게 남 앞에 고백하는 것은 나의 취미에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이 글을 쓴 것은 이것이 과학 잡지로부터의 의뢰였기 때문입니다. 과학자에게 인간으로서의 깊이와 인생의 윤기가 없으면, 큰 과학적 업적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결코 내 인생관을 남에게 떠맡기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딴 종교의 신자라도, 혹은 무신론자(無神論者)라도, 진실한 사람이면 나는 모두 존경합니다. 진실한 무신론자는 허위의 종교가 보다 낫습니다. 다만 사람은 항상 진실할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나의 인생관을 있는 그대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들이 바라신다면, 당신들도 젊은 날에 좋은 교사 밑에서 성서를 배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아오야마서원(靑山書院) 「과학원」
제 2 권 제 3 호 1947년 3월




T O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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