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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도래
다까하시 ·사부로
[高 橋 三 郞]

2004. 4. 4







1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말하였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4~15, 일본성서협회역에서 중역)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을 힘입어 오늘 이 기쁨의 자리를 함께하게 해 주심을 깊 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도 참석한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 분들에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을 써서 준비해 왔습니다만 부족한 점이 있으면 아무쪼록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까 구마까와(熊川[웅천])님이 읽어주신 마가복음서 1장을 다시 한 번 읽기로 하겠습니다. 신공동역이 아니라 이번에는 성서협회역으로 읽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여 말씀하였다. '때가 찾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짧은 단편 속에 어떠한 진리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을 탐색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마치 보물상자와도 같이 귀중한 진리가 이 말씀에서 분출해 나오는 상황을 여러분과 함께 배우도록 하십시다.
우선 첫째로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는···"이라고 있으므로, 여기서 생각할 것은 요한과 예수님과의 연결이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 첫 번째 등장하는 문제입니다. 요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유대 광야에 나타나 선교활동을 한 분입니다만 그가 선교활동을 개시한 것은 누가의 기술에 의하면(3:1) 기원 28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으므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흔히 부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친 말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으니 빨리 회개하여 심판의 불을 면하도록 하라는, 구원을 향한 초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저 일반론을 말한 것뿐이 아니고, 갈릴리의 영주인 헤로데·안티파스의 가정생활(불륜)에 대해서도 메스를 가했습니다. 안티파스는 자기의 아내를 버리고 형제인 빌립의 부인인 헤로디아라는 여인을 빼앗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요한이 사회적으로 내대고 비판했기 때문에 안티파스가 노하여 그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잡힌 후에"라는 기사의 내용입니다만(마가복음 6:1~29), 또 하나 다른 보도도 있습니다. 요세프스라는 사람이 쓴 유대 역사 책(『유대고대誌[지]』, 18권 5장 2절)에는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요한은 매우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으므로 민중들이 그의 말을 듣고 동요하여 폭동을 일으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영주로서는 큰 일이므로 "반란에 선수를 쳐서" 요한을 잡아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즉 단순한 가족관계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불안 요인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즉 세례자 요한의 체포 구금은 정치범으로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서 요한은 얼마 아니 되어 목이 잘려 순교의 죽음을 죽습니다만 실은 예수님도 정치범으로서 처형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연결점이 있습니다. 후에 나옵니다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머리 위에는 죄상록(罪狀錄)이라는 것이, 즉 이 사람은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냐 하는 것이 쓰여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로마의 관헌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람을 처형했다는 것은 바로 정치범으로서 처형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도 예수님도 정치범으로 처형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언하였다는 점에서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2


자 그럼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가셔서"라는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십시다. 요한이 세례활동을 한 곳은 요단강 하류, 사해로 물이 흘러들어가는 그 근처였다고 생각되며 유대 광야가 거기에 인접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세례를 받으셨으며 요한이 활동을 중지한 다음 북쪽 "갈릴리로 가셨다"고 마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갈릴리라는 곳은 거기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서 갈리리 호수의 서쪽에 전개되는 지대입니다. 어째서 그곳으로 가셨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어머니 마리아와 아우 야고보와 시몬 등이 갈릴리에 살고 있었으므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고 그렇게 보일는지도 모릅니다만 이같은 추정은 맞지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거의 자기 집에는 계시지 않으셨으니까요. 그 분은 전혀 집을 떠나서 활동하신 분으로, 따라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마 아닐 것입니다.
그럼 어째서 갈릴리로 가신 걸까요?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가리워진 선택의 비의(秘義)가 숨겨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갈릴리라는 곳은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북동에 있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남서쪽의 에집트로 뻗어가는 간선도로가 지나간 교통의 요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기원전 9세기에는 다메섹으로부터 거듭되는 공격을 받고 있으며, 기원전 8세기에는 앗스리야에게 점령당했고, 그 후에도 지배자가 연달아 바뀌었습니다. 바빌론, 페르샤,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이 정도로 지배자들이 바뀐 곳이란 대체 어떤 상황을 띠고 있었을까? 우리 일본인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꼭 한 번 전쟁에 져서 미군의 점령하에 놓였었지만 미국이 일본의 주권을 존중하여 간접통치에 철했으므로, 우리는 정말로 패배하였다는 감각을 그다지 가지지 않고 오늘까지 온 것입니다.
하지만 갈릴리는 철저하게 지배를 받고 착취를 당한 곳입니다. 여기에 더하기를 지배자들이 밖에서부터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데려다가 살게 하였으므로, 혼혈이 진행됐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유대교 자체가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발굴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습니다만 순수한 유대교와는 이질적인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우상숭배가 시나고구 안에까지 침입해 들어간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갈릴리는 "이방인의 갈릴리"(마태복음 4:15)라고 불렸는데 그 명칭 속에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깊은 경멸의 관념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갈릴리는 세례자 요한을 투옥한 헤로데·안티파스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입니다. 즉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저 밑바닥으로까지 멸시받고 있던 암흑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이 절망과 압제가 지배하고 있는 밑바닥 세계인 갈릴리에 예수께서는 자진해서 가신 것입니다. 이곳에 선교의 목표를 설정했다는 것은 복음의 본질에 입각한 선택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절망압제가 지배하는 밑바닥의 세계야말로 거기에 임하신다는 진리를 우리는 여기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3


이제 그럼 예수님의 제일성, "때가 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약속의 때가 도래하였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바야흐로 '성취'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것은 이 때 갑자기 나타난 사상인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시되고 있던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성취된다는 취지이므로 그렇다면 구약성경 속에 '하나님 나라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느냐 하는 것이 둘째 과제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시편 제2편을 들기로 하겠습니다. 어째서 시편 제2편을 드느냐 하면 아시다시피 시편은 제150편까지 있습니다만, 그 전체가 결집 완성된 시점에서는 제1편은 없었던 것입니다. 1편은 후에 추가된 것으로서 시편이 완성되었을 때에 제일 앞에 배치된 것제2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제2편은 시편 전체를 대표한다는 암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지금부터 읽어가면 알 수 있듯이 구약성경에 있어서의 하나님 나라 사상이 전형적으로 제2편 안에 숨겨져 있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 나라 사상]'의 구약적 표현이 선명하게 중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시편 제2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사상이란 어떤 것이었느냐?
어찌하여 사람들은 떠들어 대며
사람들은 헛되이 소리를 지르느냐.
어찌하여 땅위의 왕들은 대결하고 지배자들은 결속하여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이 기름부으신 분에게 대적하느냐
"우리는 착고를 벗기고
밧줄을 끊어 던져버리자"라고.
(일본 신공동역에서 중역, 이하 같음)
여기에 땅위의 왕과 지배자들이 결속하여 반역으로 일어서고 있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역은 하늘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므로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셔서 왕으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은 아무리 공격을 받더라도 저들의 공격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4절 이하에 이렇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늘을 보좌로 하는 분이 웃으시며
주님은 저들을 조소하시며
분노하여 공포에 떨어뜨리고
화가 나서 저들에게 선언하신다.
"거룩한 산 시온에서
내가 스스로 왕을 즉위시켰다."
(4~6절)
시온이란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지명으로서 흔히 쓰입니다. 거룩한 산 시온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을 즉위케 하셨다. 이러한 왕에게 어떠한 공격이 가해지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가져올 뿐으로 왕위가 흔들리는 일은 없다는 확신이 7절 이하에서 이야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왕 자신이 이야기하는 말입니다.
주께서 정하신 바에 따라 내가 말하리라.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아들
오늘 나는 너를 낳았다.
구하여라. 나는 나라들을 너의 유업으로 삼고
땅끝까지 너의 영토로 삼겠다.
너는 철장으로 저들을 치고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부스듯이 쳐부수리라.
(7~9)
여기 "너는 나의 아들, 오늘 나는 너를 낳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므로 기억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즉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한 왕의 즉위를 선언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온땅이 이 왕의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므로 왕은 철퇴를 가지고 쳐부술 것이다. 즉 무력에 의한 지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땅위의 왕들은 두려워 떨며 복종하는 수밖에 길이 없습니다.
모든 왕들아 이제는 눈뜰지어다
땅을 다스리는 왕들아, 타이르시는 말씀을 들어라.
경외하여 주를 섬기어라
떨며 기뻐 춤추어라.
아들에게 입맞추어라
주의 노하심을 불러들이고, 길을 잃어버리는 일 없도록.
주님의 노하심은 순식간에 타오른다.
(10~12절)
즉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인 복종이 구체적으로는 왕에 대한 복종으로서 권유되고 있습니다. 즉 종교정치가 불리 일체(不離一體)의 관계로 결합되어 여기에 신정정치(神政政治)가 선언되었습니다. 사족이 됩니다만 이전에 천황을 신으로 하고 있던 일본국도 이 시편 제2편과 전혀 같은 사상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황은 신이라는 신국사상, 그것과 같은 사상이 시편 제2편에 나타나 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합니다.
그럼, 이 시편이 탄생된 시기는 어느 시대였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 말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아마 다윗왕 시대에 된 시일 것입니다. 다윗은 "이집트의 국경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자기의 지배하에 두었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언자 나단이 어느 때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다윗의 왕위는 오래오래 멸망하는 일이 없이 견고하게 된다"(사무엘 하 7:16)는 '나단 예언'이 하나님과의 계약으로서 '다윗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만, 이 다윗 계약의 사상과 앞서 말한 시편 제2편의 신국사상이 결합하여 유대교적 왕국사상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유대 왕국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죽은 후에 금방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왕국과 남왕국은 모두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이 멸망하고, 남왕국도 기원전 586년에 붕괴되어 50년에 이르는 바빌론 포수(捕囚)의 때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왕위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상이 면면히 견지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바빌론 포수(捕囚) 즉 남왕국이 멸망한 후 600년이 지나 예수님께서 역사의 무대에 즉 갈릴리에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윗 계약의 실현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사실로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생애를 다윗계약이라는 선에 입각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조금 보아 가겠습니다.


4


마가복음서 1장에는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의 기사가 있는데,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들기 같이 내려왔다"는 기사가 있은 다음 하늘로부터 임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나의 마음에 드는 사람(1:11)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공적 활동은 여기서부터 개시되었습니다만, 이 선언은 앞서 읽은 시편 제2편에,
"너는 나의 아들
오늘, 나는 너를 낳았다"(2:7)
라는 선언이 주어진 것과 궤(軌)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야웨가 예루살렘 왕에게 주신 '즉위 선언'의 연장선상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정"이 자리매김되어 있는 것이며, 시편이 이야기하는 왕국사상과 마가가 이야기하는 하나님나라 사상과의 사이에 명확한 연결 관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마가복음서를 읽어보면 군데군데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최후의 예루살렘 상경에 앞서서 여리고를 통과하셨을 때 거기에 앉아있던 바디매오라는 맹인이,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외친 일이 기재되어 있습니다(마가복음 10:47). 이것도 '다윗 계약'의 취지에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구원의 주가 도래한다는 기대가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다는 이해의 표명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을 때 군중들이 환호하여,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에게,
축복이 있을지어다
우리들의 아버지 다윗이 오실 나라에,
축복이 있을지어다.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11:9~10)
라고 외쳤다고 마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온다느느 민족적 기대가 여기에 표명되어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 시편과 '다윗 계약'이 이야기하는 왕국사상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도래를 예표(預表)하는 전제가 된 것입니다.
참고로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호시안나'라는 말이 압축되어 호산나가 된 것입니다. '호시안나'라는 말은 '아무쪼록 살려 주십시오'라는 기원의 말이었습니다만 그것이 언젠지 모르게 뜻이 상실되어 버리고 환호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비슷한 예가 일본에도 있습니다. '오미꼬시(축제때 메는 神轝[신여])'를 어깨에 맨 사람들이 '왓쇼이 왓쇼이'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한국말입니다. "왓소, 왔소' 하는 한국말로서 "왔어, 왔어" 하는 왔다는 뜻입니다. 그 한국어가 어느 틈에 왓쇼이 왓쇼이로 변해서, 이젠 그것을 외치는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는 채 그저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함성이지요. 호산나도 그것과 비슷한 환영과 기쁨의 함성이 된 것입니다.


5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직선적인 결합을 근저로부터 깨뜨리는 충격적인 전개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편 제2편이나 나단 예언의 선에 따라 왕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것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을 정점으로 하는 산헤드린의 요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모욕과 조소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 보기에도 무참한 십자가상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메시아 사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적인 좌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연 자실하여 저 깊은 암흑의 심연 속으로 떼밀려 떨어져버렸던 것은 겁쟁이들의 결과라는 그러한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좌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 속에 깃들고 있던 구약적인 '하나님 나라 사상'이 붕괴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구약적인 하나님 나라 사상은 십자가 앞에서 붕괴도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셔서 곤궁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긍휼의 손을 펴시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 오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어째서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셔야 했는지 제자들은 이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시고 제자들 앞에 모습을 들어내신 후조차도 이 부활 현현의 사실만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의 뜻을 해명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 암흑 속에서 이것을 극복한 놀라운 진리의 빛이 비추어 왔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이 이야기하는 '고난의 종'의 모습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표하는 것으로서 이 말씀이 떠오른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일신에 짊어지고 무참한 죽음을 죽음으로써 구원을 가져오는 '고난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경멸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많은 아픔을 짊어졌으며 병고를 알고 있다.
그는 우리들에게 얼굴을 가리웠으며
우리는 그를 경멸하여 무시하고 있었다.
그가 짊어진 것은 우리의 병고
그가 진 것은 우리의 아픔이었는데도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챗찍을 맞았으므로
그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

고역의 짐을 짐지웠으나 웅크리고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 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그는 목숨을 잃었다.
그의 시대의 누가 생각이 미쳤겠는가
나의 백성의 배신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목숨 있는 자들의 땅에서 단절되었음을,
······················

병고로 고통하는 이 사람을 쳐부수려고 주님이 원하셔서
그는 스스로 속량의 제물이 되었다.
······················

그는 스스로의 고통의 열매를 보고
그것을 알고 만족한다.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하여
저들의 죄를 스스로 짊어졌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 증거되고 있는 '고난의 종'의 수난의 모습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과 겹쳐 생각함으로써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뜻을 비로소 잘못됨이 없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전개였습니다. 시편과 나단 예언에 입각하여 '영광의 이스라엘을 대망하고 있던 사람들 앞에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속량의 주'로서의 수난의 메시아상이 제시되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사상의 전환을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전환입니다. 그리하여 다윗 이래로 면면히 견지되어 온 왕국사상이 여기서 근원적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배경으로 깔고 생각해 볼 때, '하나님 나라의 도래'란 구주이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도래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이해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활동을 개시하셨을 때 그분에게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직선적인 왕국의 실현이 아니라 구주이신 예수님이 철저한 거절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에로 내몰려 가시는 무서운 역설을 그 안에 잉태한 그러한 왕국의 도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비의(秘義)를 발견함과 아울러,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 저주이냐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죄야말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간 원흉이었던 것입니다.


6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속량의 죽음을 죽으셔서 용서와 생명을 주신다는 복음의 비의에 마음이 찔려, 이 은혜 안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투입하기를 허락받은 우리는,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와 찬송을 봉헌함과 아울러, 예수님께 적대하는 세력의 정점에 대제사장이 있었다는 사실의 중대성을 깊이 받아들여 그 뜻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대제사장이야말로 시편 제2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리매김 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왕의 계보를 계승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정치적인 국가로서 설 수가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만, 대제사장을 정점으로 하는 산헤드린에 의하여 종교적 존재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며, 예전의 왕은 이제는 대제사장이며, 저 시편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하는 자로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이 내세우는 명분으로서는 율법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것이었지만 현실로는 신적권위를 손아귀에 걸머쥐고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백성들에게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자기신화(自己神化)'의 전형적인 모습을 봅니다.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선 대제사장은 참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께 정면으로 맞서고 십자가의 죽음에로 몰아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도 예수님도 모두 시편 제2편이 이야기하는 왕의 계승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놀라운 사태였는지요.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이 빠졌던 도착과 배신은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전인류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는 전 인류의 죄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 버티고 섰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죽인 종교적인 권위를 손아귀에 쥔 최대의 책임자였던 그 대제사장 안에 우리의 죄가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대제사장은 명분으로는 율법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일컬어지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지위에 서서 진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여버렸습니다. 여기에 자기 신화(神化)의 죄의 절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비로서 충분히 이해되게 됩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도 자기를 하나님 같은 존재로 휘두르려는 죄가 시커멓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이라크에서 행해지고 있는 저 비참한 전쟁의 상태를 보더라도, 미국은 나야말로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는 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공격해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한편 자폭 테러를 반복하는 이슬람의 과격파 사람들도 하나님의 정의에 입각하는 성전(聖戰)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권위는 내편에 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죄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간 것입니다.
거듭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전인류의 대변자로서 예수님 앞에 버티고 섰던 것입니다. 여기에 비로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회개'란 무엇인가라는 것이 분명하게 이해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을 고만두라, 자기를 하나님으로 여기는 일을 그만두라,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따라 자기를 내어드리라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와닿게 됩니다.
여러분, 성경 주석책들을 읽어보세요. 그야말로 여러가지 설명들이 거기에는 쓰여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자기의 억측에 입각하여 하고 있는 말들이지, 정말로 성격에 입각해서 더듬어 올라간다면, '회개'란 대제사장에게서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 반항이 분쇄당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복종으로 전환하는 일이라는 것, 즉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자기를 의탁하는 길은 자기 신화의 극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마가복음 1장 14절~15절 안에 얼마나 커다란 진리가 숨겨져 있는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현대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적대심과 조소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인류의 죄를 철저하게 발현시켜서 당신들의 죄는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단죄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으므로, 대제사장이 저놈은 저주받은 자라면서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의 판결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이 십자가의 사실, 인류의 죄를 철저하게 단죄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의의 발현을 나는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저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이 말하는 바와 같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며 용서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거기에 자기의 죄의 용서를 빌며 감사로써 모든 것을 의탁할 때 믿고 따르는 자의 길이 시작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편 제2편이 말하듯이 철장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써 지배하는 데 대한 감사의 제물이 됨으로써 실현됩니다. 이런 왕국은 땅위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느니라", "나의 생명을 받으시오"라는 이 놀라운 부르심에 따라가는 그 최초의 모습은, 실은 마가복음 1장 14~15절 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네 사람의 어부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기사 속에 하나의 예표로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함으로써 감사의 복종에로 인도되어 가는 거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매금으로 일망타진되는 식으로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이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웃을 향하여 "자 함께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십시다." --- 오늘 아까 사회자께서 기도중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변의 허위와 탐욕에 가득찬 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진리를 증거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찬송가로서 끝으로 214장(우리 찬송 273장, "저 북방 얼음 산과")을 함께 부르십시다.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죄를 짐어지시고 영원한 생명에로 불러주시는 주 예수님의 역사하심에 진심으로 찬송과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미움과 싸움 가운데서 고통으로 신음하며 구원의 빛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미움과 싸움 가운데서 고통으로 신음하며 구원의 빛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언하셨으며, 사실로 그 나라는 도래하였습니다. 저희는 그 은혜 가운데로 인도되고 그 안에 넣어주심 바 된 이 몸을 감사하오며, 이 은혜를 모든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생애를 바치고자 원하는 저희들이옵니다.
오늘 여기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으시사, 이 신앙의 싸움의 제일선에 배치하여 주십시오. 긴 생애에 걸친 연찬을 거듭하여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모두가 성장하고, 나라를 구원하는 초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옮긴이의 편지


이 논리 정연하고 심오한 복음진리의 간고간 증거 말씀을 열 두 번째로 보내드리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일본 그리스도교계의 손꼽히는 영적 지도자이신 저자 다까하시·사부로 선생은 그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자리에 누우신지 10년이 됩니다. 신체장애 1종 1급인 목밑 전신마비의 몸으로 어떻게 달마다 B5판 18쪽 이상의 빽빽한 전도 월간지(「십자가의 말씀」)를 그 지루하고 고통스런 투병생활 중에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내고 계시며(통권 469호), 또 몇 년째 휠체어의 몸으로 거의 정기적으로 말씀증거를 계속하시는지, 그저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신 분의 신앙의 기적, 생명현상의 신비로 밖엔 이 초인적인 삶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사이 83세 고령의 전신마비 부군을 일체 병간호 수발하는 한편, 구술 필기의 수고까지 하시다가 끝내 과로로 누우셨던 사모님의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이번에는 함께 예배에 참석하셨다는 소식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모님이 안 계시다면 이 전도자의 문서전도의 생애도 휴식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주님께서 다시금 길을 열어주고 계심을 느낍니다.
이 독립전도자 내외분을 위한 독자 여러분의 계속적인 기도를 부탁드리오며 힘찬 승리의 말씀이 계속되기를 빕니다.

2004년 5월, 화창한 봄날, 광교산 기슭 우거에서, 조형균





바울과 송두용( by M. K. CHANG),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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