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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禮權(성례권)의 開放(개방)을 論(논)함

(萬 人 祭 司 主 義 의 復 興)

(만 인 제 사 주 의 의 부 흥)

劉 源 相

유 원 상

[聖·硏 85 59.12]

인생에 불행이 많다 해도 감각을 잃은 신앙 처럼 즉 영원히 약동, 성장해야 할 신앙생명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향을 잃고 허공을 치는 자리에 멈춰 아무 발전도 없이 고정된 기계 처럼 된 것 같이 애석한 일이 또 어디 있겠으며 더욱 타인까지도 이렇게 인도한다면 이 이상 두려운 일은 다시 없을가 한다.
나는 과거 교회신자였고 또 장로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와는 인연이 끊어졌고 간혹 부득이 교회에 나가는 경우라도 내 자신을 심히 경계하게 되었으니 이는 물론 나의 박신의 탓도 있겠으나, 그러나 교회주의에서 오는 일종의 부당한 압력에 대해서 나의 영혼을 애끼는 의미에서다. 나는 오늘날의 교회제도는 아주 없어져야 한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것은 영혼과 제도와는 도저히 바꿀 수 없다는 견지에서요 또 그래야만 모든 신자가 각성해서 심령의 진정한 소생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이 외람된 주장은 오직 한 개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도 존귀한 것을 믿는 까닭이며, 이 영혼의 소생을 위한 조물주의 지불하신 고귀한 보상을 재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국민된 의무로서 누구나 다 국가에 충성해야 할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충성을 바치기 전에 자기 나라의 국시를 알아야 될 것쯤은 상식문제일진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역시 외적 형식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노선이 구교적인지, 신교적인지의 성격쯤은 인식해 두지 않고서는 후일에 화 없으리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신앙을 다만 일시의 생활방법이나 또는 일종의 사교술로 삼는 자라면 자기의 신앙노선을 재삼 검토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대한 일로 성실히 느껴지는 바이니, 과거 개신교 감독까지 지낸 자가 말년에 천주교로 개종한 사실 등사는 우리 개신교계에 주는 일대 경종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오늘날의 개신교회 신자를 괴뢰신자라고 부르고 싶다. 괴뢰란 즉 아무 실권 없는 허수아비가 아니면, 다만 형식만을 가춘 것을 말함이다. 나의 이 말이 과연 망언되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오늘의 소위 기독교인 즉 교회신자만 과연 개신교도로서의 그 권리가 다 가추워져 있는 것이냐. 불행히도 이 점을 나는 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회당왕복, 성경암송, 헌금납부, 집회성황 등으로 신앙생활이 다 된 것일가. 만일 이로써 만족하는 자 있다면, 저는 카톨릭 신자라고는 할 수 있어도, 우리의 신앙을 따루는 개신교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말했다. 「기독자는 모든 사람 위에 서서 아무에게도 예속치 않는 군주요, 또 모든 사람 밑에서 봉사하는 종이라」고(기독자의 자유 제 1항). 즉 이는 신자는 영적으로 왕이란 말이다. 그리고, 먼저 내적으로 왕 된 후에 다음 외적으로 종이 된다는 말이다. 자유에서 출발, 사랑으로 봉사하는, 자발적으로 숨어 충성하는 일꾼을 말함이다. 이는 결코 오늘날 교회에서 소위 나팔부는 종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컨대 오늘날 소위 교회신자들의 신앙 또는 신앙생활의 약화 내지 무력은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나는 그 근본문제로서 루터가 지적한 바 신자가 마땅히 서야 할 이 왕의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이 그 최대 원인의 하나라고 관찰하는 바이다. 신자는 분명 세속적인 의미의 왕 아닌 영적 왕자인 것이다. 베드로도 신자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다(베전 二·九). 또 사실 독생자의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신자가 왕 이하의 인물이 되어야 될 말이냐. 이 왕이야말로 세세의 왕이요, 매일의 왕이요, 매사의 왕이요 또 자신의 왕일지니, 이가 곧 기독자를 하나님의 후사라고 일컸는 최대의 뜻인가 한다(로마 八·一七).
그러므로, 신자는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하며 또한 이에 필요한 왕부(王符)와 행사할 왕권(王權)과 지배할 왕토(王土)가 갖추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이 없다면 과연 괴뢰왕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영혼을 절대 생명으로 여기는 자라면 자기의 절대의 영적 권리인 이 왕권을 찾아 내지 않고는 절대로 만족하지 못 할 것이다. 따라서, 저는 하늘이 허락한 이 권리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무릅쓸 결사적인 각오와 일대 모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一一·一二).
따라서, 나는 오늘날의 소위 교회산자를 괴뢰왕으로 아래와 같이 보는 바이다. 첫째 그들은 왕부를 분실하지 않았는가. 신자의 왕된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은 곧 성서이다. 성서는 즉 왕부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개신교 신자에게 있어서는 실로 나의 책이요, 신자로서의 신분에 대한 증명으로서 결코 교역자만의 전용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루터가 개방한 이 성서가 사실 오늘날 어떠한 자리에 놓여 있느냐. 요시야 왕 시대 울법책이 법궤 속에 묻쳐 있었던 것 같이(역대 상 三四·一四) 오늘날도 역시 어느 구석에 파묻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개신교 신자는 무엇보다도 이 성서에 대해서 대담해야 되겠다고 나는 믿는다. 성서는 결코 예배도구나 우상 처럼 보관지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과연 하나님이 천하 죄인에게 주신 죄사함의 확증서인즉, 우리는 항상 이를 심중에 새기며 애용, 애독해야 하겠다. 따라서,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자유롭고 대담해야 하며 해석의 권리를 절대로 신학자나 교역자에게 빼앗기던지 또는 맡겨버려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역자들은 성서를 마치 중세기 신부들처럼 밀봉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해석과 다르면 무조건 이단, 배척하는 그 태도가 바로 이를 표시하는 것 아닌가. 신자가 각기 성경을 해석하되 결론으로 십자가가 들어나고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게만 된다면 그 이상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요한 二0·三一). 자기가 절대 정통적인 해석자라고 장담할 자는 이 지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법왕이 있다 할 것이나 우리는 분명 천주교 신자는 아니니, 만일 신교 목사로서 그런 법왕행세를 감히 하는 자 있다면 그는 신부라고는 할지언정 목사라고는 결코 못할 것이다.

둘째로 오늘날 기독자들 즉, 왕들은 왕권을 빼앗기고 있지 않은가. 즉 신자에게 마땅히 회복되어야 할 권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례권(聖禮權)이다. 성례 즉 세례, 안수, 성만찬의 집행은 결코 목사나 신부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니다. 신자는 누구나 다 복음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그 권한이 허락된 것으로 나는 믿는 바이다(마태 二八·一九). 초대교회 신자들은 모두가 상호 교직자였던 것이며 서로가 성례를 베풀었던 것은 「당시 모든 기독자들은 제사(祭司)로 생각되었으며, 교회의 회원은 모두가 스스로 주의 만찬을 집행하였다」는 유스지누스의 말로도 입증되는 것이다.

적어도 개신교에 있어서는 세례라는 의식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물론 설교다. 이 중심 부문인 설교까지도 은혜받은 자는 누구나 다 자유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개신교의 특색일진대 하물며 성례를 특정인 이외에는 못한다는 소위 개신교 교역자들의 그 주장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이냐. 그러므로, 이 성례를 특권시하는 이 부당한 세력을 우리는 개신교의 성겨상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이며, 만일 허락된다면 그것은 상호 교직자란 뜻에서 보편적인 은혜로서 누구던지 할 수 있다는 해석하에서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렇게 말하면 물론 위험천만이라고 말할 자가 있으리라. 그러나, 도대체 성례의식 속에 무엇이 있기에 설교는 허락해도 성례는 금한단 말인가. 정 위험하다면 성례를 금하기 전에 먼저 설교부터 금해야 순서 아니겠는가. 가령 백보를 양보한다 치자. 그러면 교역자가 집행하는 성례만 꼭 효력이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천주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관절 개신교 신앙의 이상(理想)이 무엇이란 말이다. 루터의 말대로 신자 각자가 모두 절대 자유의 영적 군주되는 것이 진정 그 목표라고 한다면, 만일 이 길을 방해하는 악습이 현존해 있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옳을 것인가. 개신교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신앙계급을 용인하는 것 같은 이런 악제도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으며, 우리는 이를 절대 수수방관해서는 안될 것이며 용감히 이를 폐지, 시정하는 것이야말로 개신교도 각자의 마땅히 취할 태도이다.

세째, 금일의 왕들은 영토를 빼앗긴 왕들 아닌가. 과연 이 때문에 신앙생활이 허공을 치는 것 같고 맥없는 상태에 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분명 교회에서는 열심이나, 그 이외의 장소에서는 아주 무력하며 더욱 그들은 현재라는 시간을 너무나 등한시하고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또한 전날의 나 자신의 스라린 경험의 간증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현재라는 이 시간만이 지금 허락된 유일한 재산이요, 영토다. 이를 내 자신이 지금 전력을 다해서 확보, 유지해야 할 최후거점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오늘날 신자들의 생활을 보면, 이 현재에 대하여 무관심한 반면에 그들의 관심사는 다만 사후(死後)문제 아니면 무슨 신비, 괴력, 이사, 기적 또는 인기적인 웅변에 도취되기 소원이며 가장 독신자라는 것이 기껏 해서 헌금, 회당건축, 그리고 회당만원을 최고의 기쁨, 이상(理想)으로 하고 있다. 신앙이 살아 있다면 필연적으로 발휘되어야 할 영육간 또는 자타간에 현실 죄악에 대한 도덕적인 싸움, 정의로써 하는 대결, 윤리면의 긴장, 실생활의 건전한 활기 등은 도시 없다. 과연 전투의 대상도, 전투시간도, 전투의 의욕도 완전 상실한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기독자들의 현상이라 할 것이다. 기독자의 영토라고 할 수 있는 이 현재, 이의 확보를 위한 신자의 참된 도덕적인 전투이욕이 회복되기 전에는 소위 빛의 역할, 소곰의 직분 하여도 실로 백년청하의 한 개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상의 현실로써 나는 금일의 교회신자를 감히 심한 말이나 괴뢰신자라고 부른 것이다. 사실 그들은 형식신자이다. 자신이 영적 군주로서 왕인 성서와 왕토인 시간을 엄연히 갖고 있으면서 이를 자기 것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니 과연 이가 명색만의 괴뢰 아니고 무엇인가. 천하의 대왕자가 귀한 일생을 종노릇으로만 시종하며, 걸식하는 노예로 만족하고 있다면 이야말로 불행 이상의 대비극이 아니겠는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너희는 굳게 서서 다시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 누차 경고했건만(갈리 五章, 고전 七·二三) 우리의 현실은 다시금 바울의 이 책망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니니. 나는 이 비극의 원인은 왕자가 왕권을 즉 신자가 성례권을 빼앗긴 때문으로 보며 더욱 빼앗긴 줄도 모르고 이를 빼앗은 상태를 상전시하여, 자기는 그에게 성례를 받아야 마땅한 운명의 종이라고 체념해 버리고 있는 이 착각이야말로 바로 그 병통이라고 보는 바이다. 과연 이 왕권을 잃은 왕에게 왕부의 가치와 왕토의 의식마저 희박해 진 것 또한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생각컨대 일반 교역자들이 은혜은혜하면서 남달리 감사하는 소위 성직관념이야말로 바로 이 왕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인제사주의를 그 근본신조로 삼는 개신교에 있어서 이 왕권되는 성례권이 어찌 교역자라는 특권계급에만 국한된 은혜라고 해석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분명이 개신교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이교적 사상인 것이며 이 특권적인 성직, 성례사상이야말로 개신교 발전을 근본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일대 암적 존재라고 나는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개신교 목사로서 이와 같은 카톨릭적인 신앙에 스스로 만족하며 게다가 더욱 자기를 신교 지도자로 자처하는 것이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니냐.

나는 이 성례권의 개방 없이는 개신교의 생명은 없다고까지 단언하고 싶다. 아니 나는 지옥벌을 당하는 수가 있더라도 이를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성례권 문제가 소위 평신도와 교역자와의 분기점이며 이것 때문에 만인제사직은 붕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따라서,이 성례권이 근본적으로 개방되고 오늘날 교역자들이 소위 그 까운을 벗어놓는 날이 와야 비로소 개신교 아니 기독교는 그 면목대로 살아나는 것으로 나는 믿는 바이다. 나는 실로 이 제사(祭司)라는 용어에 있어서 루터 선생과 견해를 같이 하는 바이니, 그는 말하기를 「제사와 평신도의 구별이 있을 수 있느냐. 제사나 성직이란 용어가 일반으로부터 제거를 당하고 소수계급에만 적용된 사실이 이 용어를 부당하게 만든 것이다. 성서는 이 성직자를 단지 설교하는 봉사자, 종, 집사라고 부를 뿐 그와 이와의 아무런 구별도 부치지 않았다. 그거슨 우리가 다 제사지만 그러나 모두가 봉사, 사무, 설교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집사직에 세상적인 권세가 붙어 마치 평신도를 별 개의 것으로 여기게 된 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을 모든 것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리스도 자신 까지도 빼앗긴 대신에 우리가 얻은 것은 결국 엄청난 인간적 율법과 또 가장 무가치한 인간들의 노예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기독자의 자유 제十七항).

돌이켜 생각컨대 개신교에 있어서는 실로 복음만이 그 생명인 것이다. 그런고로 사실상 성례 따위는 흥미도 없는 문제 외의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세례를 베픈 일이 없으시며(요한 四·二) 사도 바울도 할례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그렇게까지 필요할진대 차라리 잘라버리라고까지 극언을 하였다(갈라 五·一二). 이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성례가 오늘날 개신교를 혼란케 하고 있는 바로 장본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개신교 교역자로서 이 성례권을 일반 신자에게 개방하는 데 호리라도 인색한 바 있다면, 그는 실로 신교목사를 가장한 충실한 구교신자일찌니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하나님의 백성의 귀환대로를 막는 돌의 존재 아닐가 한다 (이사 六二·一0). 그러나, 이 돌의 우녕도 결코 길지는 못할 것이다. 신자의 각성으로 기필코 제거되는 날이 멀지 않아 올 것이다. 순수한 신앙양심은 도저히 이에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의 공동묘지된 이 한국에서 이를 위한 제二, 제三의 루터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하는 바이다.

이리하여, 시로 우리에게 성례권의 개방으로 인한 만인제사주의가 실현될 때 모든 신자는 루터가 지적한 바 진정한 영적 왕으로서 설 것이니 이 때에 비로소 저들의 생활면과 도덕면도 살아 날 것이고 저들의 냉각된 사랑도 또한 뜨겁게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다 저들이 왕됨으로서 맛보는 그 위대한 복음적인 기쁨에 근원하는 것이며 그것은 도한 민족과 사회에 대한 강력한 복음적인 진리의 전달로서 발현될 것이며, 사회에 대한 윤리적인 봉사로서 또한 전개될 것이다.

끝으로, 나는 다시 한번 성례권 수복 없이는 만인제사주의 없고, 만인제사주의 없이는 개신교는 없는 것을 부르짖고 싶다. 그것은 만인제사주의 곧 개신교요, 대표제사주의 곧 천주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례권 개방에 절대 반대할 자는 오직 천주교인 뿐일 것이다. 나는 성례권을 박탈당하면서까지 이 이상 실질상의 천주교인 될 수는 없다. 이리하여, 나는 교파의 장노직을 정식 사면하였으며, 이제부터는 성례권을 자주적으로 행사하는 사실상의 독립적인 개신교인 되려고 하는 바이다. 그것은 결국 나의 양심이 장노라는 명리보다도 신앙의 자유, 영혼의 자유를 생명으로서 가급하게 된 데 기인한 것이다.


바울과 송두용( by M. K. CHANG),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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