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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8 00:45

키에르케고르의 인생 3단계론과 우리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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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에르케고르의 인생 3단계론과 우리의 신앙

                  1996년 4월 23일 외환은행 선교회 예배에서 말씀드린 것을 보완한 것 [ 참고: 키에르케고르 ]
                                                                                                 
                                                                                                                     장 문 강


1. 하나님 앞의 반성과 실존, 그리고 성서

(1) 바울도 한 때 율법(도덕)과 의식을 지키고 선행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구원받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열성도 남달라서, 열심히 예수를 박해했습니다. 집집마다 들어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보냈고, 살기 등등하게 다마스커스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게 했습니다(사도행전 8 : 3, 9 : 1 --3). 회심 후에 바울은 그런것들은 다 배설물에 불과하고,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치면서, 핍박하던 예수를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빌립보서 3 : 4 -- 9, 로마서 1 : 16 -- 17). 우리도 회심 전의 바울처럼 인간적인 열성을 자랑하며 치닫기만 할 것이 아니라, 혹시 우리의 신앙이 잘못된 점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약 100년 전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 언더우드는 로마 카톨릭 역사 100년인 우리의 현실을 보고, 로마 카톨릭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로마'를 전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성당과 제도와 의식과 형식과 율법은 전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핵심이요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는 전하지 않는다는 지적 같습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 신교 100주년, 카톨릭 200주년 기념 행사가 여의도 광장을 메울 때, 카톨릭은 103위 시성식(諡聖式, 103명을 聖人으로 선언한 식)을 성대하게 거행했고, 신교에서는 어떤 목사님의 외화 밀반출 미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언더우드가 살아 있다면 자기가 복음을 전했던 이 땅의 현재 기독교에 대해 뭐라고 할지 모를 일이지만, 외국인들이 한국 기독교에 세 번 놀랐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양적 팽창에 놀라고, 기독교 믿는다면서 성서 읽지 않는 것에 놀라고, 그러면 도대체 뭘 믿고 있는가 보면,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아닌, 자기가 그린 우상을 예수라고 믿고 있어 놀란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자 신학 대학원장님께서 "제2의 종교개혁 필요하다"는 제목으로 신문에 기고하신 글에서, 한국의 교회는 사회 부패와 부조리의 온상이 되어 버렸다고 하시며,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하나님의 교회가오히려 어둠과 부패의 온상 역할을 하고 있다니. 예수님의 말씀처럼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는 말인지, 참으로 하나님이 두려운 일입니다(마태복음 21 : 13).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간판 아래 벌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잘못 이해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우리의 신앙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상황은 교회마다, 신자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고 나는 그런 신자가 아니니까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중 하나만이 이런 죄악을 저지르고 있고, 우리의 형제 중 한 사람만이 이런 죄악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 안에 한 형제인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가슴 아파하며,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진리보다 다른 것을 더 추구했던 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한 죄, 형제에게 올바른 신앙을 전하지 못한 죄를 하나님 앞에 통감하며 회개해야 할 문제라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를 강조하며 북한 선교와 세계 전도를 외치고 있는 오늘날에는 이 문제를 반드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다면, 우리가 복음을 잘못 이해했다면, 우리가 아무리 전도를 열심히 하고 선교를 목숨 바쳐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경계하신 대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일이요, 우리의 이웃과 우리의 형제들을 우리보다 배나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5 : 14, 23 : 15 -- 16).
(2)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옛날 그리스 철학자들은 대개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469 -- 399 BC)는,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인간 외부의 자연이 아니라고하며, 생각의 대상 즉 철학의 대상을 인간으로 돌렸습니다. "인간 밖의 자연에서 인간으로" --- 이것이 철학의 제1혁명이었습니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으로 외쳤습니다. "모든 국가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다수가 되어 힘을 발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혼자가 되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라, 골방에 들어가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홀로 올바로 서야 참된 힘을 발휘한다. 모든 사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단독자(單獨者)가 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만 모든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실존(實存)' 개념으로써 철학의 초점을 추상적, 보편적, 일반적 인간에서 하나하나의 구체적, 현실적, 개별적 실존으로 돌려 놓아 철학에 또 하나의 혁명을 일으킨, 실존철학의 선구자 키에르케고르(Soeren Aabye Kierkegaard, 1813 -- 1855)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하나에 평생을 바쳤던 덴마크의 기독교 사상가, 이 시대의 예언자, 참된 그리스도인 키에르케고르의 인생 3단계론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하나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나"라는 실존 개념과 우리가 매일 읽는 성서에 대한 생각을 살펴봅니다.
(3) 키에르케고르는 저마다 독자적인 내면적 가치와 의의를 간직하고 있는 하나 하나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현실적인 주체적 존재를 가리켜서 '실존(實存)'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나'라고 하는 구체적인 하나의 개인, 현실에 던져진 하나의 주체를 실존이라 하고, 주체적 진리(主體的 眞理)를 강조하였습니다. 실존주의의 탄생을 의미하는 1835년 8월 1일 유명한 일기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의 골자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딕체 부분은 키에르케고르가 방점을 찍은 곳입니다.)

  나에게 참으로 없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었다. 내게 없었던 것은 결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어떤 행위에도 일정한 인식이 앞서야 하므로, 인식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나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참으로 무엇을 하기를 원하고 계신가를 아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나에게 진리인 그러한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죽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이념(理念, Idea)을 찾아 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비록 내가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 내고, 비록 내가 철학의 여러 체계를 모두 연구하고, 필요하다면 그것들을 비평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내가 그리스도의 의의(意義)를 해설할 수 있고, 허다한 낱낱의 형상을 설명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만일 그것이 나 자신에게 대해서 또 내 삶에 대해서 참으로 깊은 의의를 가지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관계가 있는 것, 말하자면 그것을 통해서 내가 신적(神的)인 것에 깊이 접하고 있는 것, 설사 온 세계가 무너져 버리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지 않는 것, 이런 것이 나에게 부족하다. 나는 그것을 탐구하겠다. 위인들이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팔고, 아니 생명까지도 거는 보석을 발견하여, 불행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고독을 견디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용약 매진하는 것을 볼 대, 나는 기쁨을 느끼고 내적으로 굳세진 것같이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인간의 이러한 신적 측면이요 내적 행위지 지식의 양이 아니다. 이것만 있으면 많은 지식은 저절로 생기고 초점없는 축적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자기를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자기의 길을 발견하였을 때 인생의 평안과 의의를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생의 행로는 절망이라는 저 권태롭고 저주할 아이러니컬한 동반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거두려면 씨를 뿌려야 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나는 고난의 길을 걷는다. 이 길은 반드시 나를 투쟁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또 과거를 슬퍼하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모래 속에 빠져서 얼마나 깊이 빠졌는가 생각하는 사이에 자꾸만 빠져들어가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나는 배우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발견한 길을 급히 서두르련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가 높은 산꼭대기인 것을 생각하여 룻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볼 것 없이.

이후 20년 동안 키에르케고르는 실제로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좁은 문으로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에게 참된 실존은 "신 앞에 서는 단독자",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나"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실존, 기독교적인 신앙적 실존입니다. 이것은 헤겔 식의 실존 없는 추상적 사상에 대한 반론이요, 사르트르 식의 신 없는 실존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4)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의 성서를 사랑의 편지에 비유했읍니다. 성서를 읽는 것은 사랑하는 이가 보내 온 편지를 읽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서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내게 온 개인적안 메시지로 읽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읽는 나 자신 사이에는 주체적, 실존적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이, 특히 말씀의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면, 성서는 내게 보내 주신 개인적인 메시지가 되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과 신화로 엮어진 옛날 책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신앙을 지식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한 루터가, 신앙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나를 당신의 생명 안에 끌어넣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주체적인 신뢰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성서의 말씀을 누가, 언제 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으로 초대하시는 분은 비천하게 살다가 비천하게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했습니다(마태복음 11 : 28). 만일 이것을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그것은 역사적 허위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죄에 허덕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모든 사람을 초대해서 쉬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철학적인 신(神)이나, 인간의 고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는 신이 하는 말도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직접 지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여셔서, 실제 모든 인간을 쉬게 할 능력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초대하는 말씀을 선포하신 역사적 현실, 즉 비천에 처한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에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성서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에게 보내신 사랑의 편지로 받아, 이 현실 역사 안으로 친히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했던 일생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배운다던 나폴레옹이 "성서는 단순한 책이 아니다. 실제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능력을 가진 생명체이다."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성서가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습니다. 성서를 그냥 이론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나, 성서를 읽기는 하지만 자신의 삶과는 관계시키지 않는 분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빌고 싶습니다. 성서로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처럼 성서를 이용해 자기의 욕심을 추구하고 자신의 인간적 생각을 합리화할 뿐만 아니라 현실 기복(祈福) 신앙과 치병 신앙과 각종 이단까지 만들어 내는 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즉시 회개하시길 빕니다(마태복음 4 : 5 -- 6).

 

2. 키에르케고르의 인생 3단계론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은 세 가지 단계(영역, 인생관, 입장)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단계는 미적 실존(美的 實存, aesthetic existence), 둘째 단계는 윤리적 실존(倫理的 實存, ethical existence), 셋째 단계는 종교적 실존(宗敎的 實存, religious existence)입니다.


[1] 미적 실존
(1) 우리 인생의 가장 낮고 직접적인 단계는 미적 실존입니다. 한마디로 "즐겨라, 인생은 자유다, 마음껏 즐겨라" 하는 인생관을 갖고 사는 쾌락주의자요 이기주의자의 방종한 삶입니다. 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쉴새 없이 다니듯이 언제나 새로운 순간의 쾌락과 감성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다니는 삶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미적 실존의 단계 내부에 ① 건강을 가장 중시하는 인생관의 단계, ② 부(富), 돈, 명예, 신분, 출세 따위를 추구하는 인생관의 단계, ③ 자기의 재능과 재주 즉, 손재주, 돈 버는 재주, 수학적 재능, 예술적 재능, 철학적 재능 등을 발달시키는 단계, ④ 인생의 목적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 자체로 되는 단계, ⑤ 우수, 권태, 절망의 단계를 설정하기도 했지만, 그 본질은 동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돈 후안(Don Juan)과 네로를 예로 들었습니다.
(2) 유명한 돈 후안은 유럽의 전설에 나오는 미남의 방탕한 귀족으로서, 1,003명의 여자를 농락하고 버렸다고 합니다. 돈 후안은 육적인, 순간의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한 여자한테서 욕정을 채우는 순간 다시 환멸과 염증을 느끼고, 또 새로운 여자를 찾아다니는 생활을 끊없이 계속합니다. 인생에 진지함이나 성실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돈 후안의 후예들은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며, 단지 현재의 쾌락만을 쫓아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복수로 상징되는 천벌(天罰), 즉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이 돈 후안의 결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의 말씀처럼,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 : 7). 자신의 인생 밭에 쾌락의 씨앗을 뿌리는 자는 천벌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나다. AIDS를 기억할 것입니다.
왜 점잖은 자리에서 돈 후안 같은 '성(性)의 노예'에 대해 말하느냐고 나무라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키에르케고르는 공상과 상상을 통해 쾌락을 회상하고 기대하는 마음의 상태를 중시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돈 후안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의 돈 후안을 부인할 수 있는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3) 잘 아시는 것처럼, 네로(37 - 68, 재위 54 - 68)는 대 로마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어느 누가 평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부(富), 돈, 권력, 영광 등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도 무서워할 것 없이 제멋대로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시시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내 인생이 왜 이럴까 진지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권태와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크고 진한 쾌락을 쫓아다닙니다. 술 한 잔에서 고급 술 두 잔으로--- 그러나 더 큰 허무와 무력감(無力感)이 밀려옵니다. 쾌락의 종류를 바꿔 봅니다. 이른바 쾌락의 윤작(돌려짓기)입니다. 술, 여자, 동성애에 사람 죽여 보는 것까지.
그러나, 쾌락에는 끝이 없습니다. 쾌락의 마약 기운이 클수록, 깨었을 때 허무는 더 크고, 더 비참하게 된 현실이 기다립니다. 목마를 때 소금물을 마신 것처럼, 쾌락은 더 쾌락을 요구합니다. 결국 쾌락의 노예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괴테의 말처럼, 쾌락은 인간을 천하게 만듭니다. 동시에 목숨까지 요구합니다. 허다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쾌락을 추구하던 네로는 결국 아내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네로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복의 외부 조건을 다 갖췄지만 불행했습니다. 인생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쾌락을 쫓아다니는 미적 실존의 비극입니다.
(4) 우리는 미적 실존의 본질을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미적 실존의 출발은 자유였지만, 결과는 쾌락의 노예입니다. 남은 것은 허무, 불안, 고독, 권태, 고향을 상실한 느낌(Heimatlosigkeit)뿐, 여기에서 미적 실존은 자신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망하라, 전심전력으로 실망하라, 실망을 한 후에야 영원의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쾌락 같은 육적인 것으로는 만족과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느낌, 버림받은 느낌, 죄의식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 실망하게 되고, 잃어 버렸던 양심의 소리가 들려오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뉘우침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전환점이 온 것입니다. 결단의 순간입니다. 미적 실존의 본질을 깨닫고 실망하여 자각하고 다음 윤리적 실존의 단계로 가느냐, 아니면 미적 실존의 단계에 질질 머무느냐---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엄숙한 자기 결단의 순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한 선택을 통해 윤리적 실존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2] 윤리적 실존
(1) 윤리적 실존은 양심을 가지고 도덕적 의무를 다하려는 삶입니다. 미적 실존을 애욕(愛慾)이라고 한다면, 윤리적 실존은 결혼입니다. 미적 실존은 쾌락을 찾아 흘러 다니는 삶이었습니다. 삶을 통일하는 중심이 없어서, 삶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에는 중심이 있고, 삶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집중됩니다. 미적 실존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인생의 목적을 자기 아닌 쾌락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은 자기 자신에 관심을 집중하여 인생의 목적을 자기 내부에서 찾습니다. 미적 실존은 쾌락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은 쾌락을 지배하고, 쾌락을 비롯한 미적인 것에 적합한 위치를 부여합니다. 미적 실존은 자기 자신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동시에 가정과 인류로 돌아갑니다. 미적 실존의 시간은 토막토막 절단된 순간일 뿐이며, 인격이라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의 시간은 현재의 순간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가 계속되며, 인격이 형성됩니다.
(2)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 의무를 다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을 가지고 더욱 높은 도덕의 명령을 실천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의 무력(無力)과 죄를 더욱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정도는 어떻게 실천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태어난 그대로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마태복음 7 : 12, 5 : 44).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다,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다"는 말씀은 잔인할 정도로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요한 1서 3 : 15, 마태복음 5 : 28).
결국 바울처럼, "내가 원하는 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행한다. 아아, 나는 불쌍한 사람이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로마서 7 : 19, 24) 하는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의 죄를 철저히 알게 될수록 철저하게 절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윤리적 실존에게 키에르케고르는 뜻밖의 말을 합니다.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무한한 정점이라고,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인 동시에 생명에 이르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자기 파산, 철저한 절망에 이르렀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은혜의 순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시금 선택과 결단의 전환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결단과 선택의 전환점---윤리적 실존이냐, 종교적 실존이냐, 결단해야 할 전환점에 도착한 것입니다.
(3) 물론, 모두가 다 죄 때문에 절망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도덕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보지도 않아서 절망 자체를 경험 못 하는 사람도 있고, 도덕의 수준을 애초부터 낮게 잡고 준수했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계명까지 이미 실현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도 가는 길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시 미적 실존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람도 있고, 가롯 유다처럼 내 죄니 내가 책임진다며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르지 못한 하나님의 명령을 바리새인처럼 제 수준으로 끌어내려 놓고 실천했노라고 망상과 위선과 교만에 빠지는 사람도 있으며, 성전 같은 데 가서 의식에 참여했으니 내 죄는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길이 아닙니다.


[3] 종교적 실존

(1) 누구나 죄를 안다고 하지만, 그 죄에 대한 의식과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똑같이 죄를 지었다고 하지만, 그저 "잘못했다, 죄를 지었다, 내가 이 죄를 씻어야지, 자, 나 스스로 죄를 다 씻었노라" 하는 것과,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 나 스스로는 이 죄를 어쩔 수 없구나, 아아,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저를 불쌍히여겨 주십시오, 아, 구원받는 길을 이미 열어 놓으셨군요,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는군요, 아아,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 기쁘다, 할렐루야"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죄책(罪責)의 의식과 죄(罪)의 의식 사이에는 단절이 있고, 사람은 초월자의 힘에 의하지 않고는 죄의 의식에 다다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내재적인 종교로서 종교 일반(宗敎一般)인 종교성 A와, 초월적인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인 종교성 B의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재적인 종교성 A는 반드시 초월적인 종교성 B로 이행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실존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죄책의 의식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죄의 의식에는 도달할 수 없고, 그 죄에서 나올 수도 없고, 진리에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죄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유한한 인간과 영원하신 하나님 사이에는 연속성이 아니라 단절이 있습니다. 인간은 죄의 존재로서 땅바닥에 붙어 있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절대선의 존재로서 하늘에 계십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늘에 올라 하나님께 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내려 오셔야 겨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종교성 B 즉 그리스도교의 역설(逆說, paradox)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께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성령은 보내시는 분과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요한복음 14 : 26, 15 : 26, 16 : 7, 갈라디아서 4 : 6, 고린도 후서 13 : 13, 마태복음 3 : 16-17, 베드로 전서 1 : 2, 마태복음 28 : 19). 그러나이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됩니다(고린도 전서 1 : 23). 인간의 이성에게 이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 이질적인 것, 절대적으로 다른 것,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설을 순순히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고,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불신입니다. 이 역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종교성 B 즉 그리스도교요, 이 역설을 믿지 못하고, 인간과 신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으니까 인간이 노력을 하면 영원에 도달하고 신에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종교성 A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성 A는 이교(異敎)에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도, 세례를 받았건 안 받았건, 결정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의 종교성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거짓으로 그리스도교의 간판은 내 걸었지만, 이러한 삼위일체의 진리를 부인하고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이단입니다.
(2) 종교성 A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실존과 같은 것이므로, 참된 의미의 종교적 실존은 종교성B 즉 그리스도교입니다. 이 실존은 "믿어라,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이란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믿는 것이며, 신앙의 진리란 역설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하며, 아브라함과 욥을 신앙의 대표자로 들었습니다.
친척들과 함께 살던 아브라함이 76세일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고 하시며,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창세기 12 : 1 - 3). 그 후 여러 번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2, 13, 15, 17장). 백 살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드디어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창세기 21장). 이 외아들을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창세기 22장). 하나님의 태도는 도저히 이해가되지 않습니다. 합리적이 못 됩니다. 주셨던 것을 왜 다시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외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니,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더구나 아비가 어찌 아들을 죽일 수 있습니까? 도덕적으로 안 되는 일이요, 인륜상 차마 못 할 일 아닙니까? --- 물론 당시 다른 민족들은 자식을 재물로 썼습니다만, 아브라함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것에 대해 처절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이성과 도덕으로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무척이나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란 역설입니다. 신앙이란 이성과 도덕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사랑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이삭을 살려서까지라도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히브리서 11 : 17 - 19). 외아들 이삭을 결박하고 칼로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는 두 번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해결했습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테르톨리아누스(Tertullianus, 155 - 222)의 말은 역설적으로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인간의 이성과 도덕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 정의와 사랑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절대자에게 절대의 신뢰를 바치는 절대적 관계가 신앙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자신의 이해타산같이 불순한 것은 전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義)로 여기셨습니다(창세기 15 : 6). 바울은 아브라함을 우리의 신앙의 아버지로 불렀고(로마서 4장, 갈라디아서 3 : 7),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의 기사(騎士) 아브라함에게 찬사를 한없이 보냈습니다.
(3)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아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병도 쉽게 낫는다고 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때문이든, 우리 목사님의 남다른 능력 때문이든, 그렇게 신바람 나는 기독교를 주장하는 교회당에는 사람들이 철철 넘쳐흐를 것입니다. 현실에선 복 받고 천당까지 가니, 이렇게 꿩 먹고 알 먹는 종교가 어디 그리 흔하겠습니까? "몇 배로 복을 돌려 준다"고 하는데 아낄 리 없는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은 넘치고 쌓여 예배 시간을 짧게 하고 주보를 좁게 합니다. 교회 부지를 사들여야 하고 구역 '성전'(?)까지 새로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복이요, "주린 자는 복이 있다"는 복이라고 하면 나아가 예수께서는 "부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다고 하면(누가복음 6 : 20 - 21, 24, 마태복음 6 : 24), 그렇게 인기 없는 말을 하는 그리스도인 주위에 몇 명이나 남을는지요? 더구나 하나님을 정말 정직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더 큰 환난이 온다고 하면, 누가 그렇게 손해보는 그리스도교를 믿겠습니까?
그러나, "순전(純全)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인 욥에게 복 아닌 재앙 같은 환난이 온다는 것은 성서가 증거하는 사실입니다(욥기 1 : 1). 키에르케고르는 믿는 자에게 환난이 따르는 것을 그리스도교의 본질로 보고, 가혹한 환난에 처하는 욥의 신앙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읽었습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맨몸으로 나왔으니 맨몸으로 돌아간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존함이 찬송을 받으시기를." 하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면,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합니다(욥기 1 : 21, 2 : 10).
예수께서는, 생명으로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고는, 몸소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마태복음 & : 13 - 14).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바울은 천막을 기워 가며 목숨을 걸고 전도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신바람 나는 세상의 복과 환영이 아니라, 치욕, 감옥, 숱한 매질, 태장(笞杖), 돌, 파선(破船), 각종 위험, 굶주림, 추위, 헐벗음 등 목숨을 위협하는 고난이었습니다(고린도 후서 11 : 23 - 27). 그렇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로마서 8 : 17). 키에르케고르는, 이와 같이 신앙의 길은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이요, 평탄한 길이 아니라 가시밭 길이요, 쉽고 안이한 길이 아니라 괴로운 시련이 따르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3. 키에르케고르와 우리의 신앙

(1) 키에르케고르는 밤낮으로 "주여, 쓸데없는 사물에 대해서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시고, 당신의 온갖 진리에 관해서는 우리의 눈을 활짝 뜨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온갖 백해 무익한 지식과 정보와 자극을 쫓아다니기에 바쁜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시대를 '비참한 시대', '광고와 잡보(雜報)의 시대', '반성 없고 정열 없고, 성격 없는 타산적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사람들은 구경꾼처럼 여러 가지 경험은 하지만, 진지함이 없고 인생을 거는 근본적인 결단이 없습니다. 또한 군중에 의지하며 군중의 뒤를 따라가는 무책임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고 하는 교회는 부르주아지적 가치관에 젖어 세속화하였다. 자기 안주와 자기 도취에 빠졌다. '일요일 기독교'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의 길로, 원래의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2) 이러한 시대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적 진리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실존적으로 실천하고자 일생을 바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 이 한 점에 키에르케고르의 일생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 그리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 --- 이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근본문제로 보고, 다른 것은 부수적이고 2차적인 것으로 본 것이 키에르케고르였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근본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올바로 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합동하여 최선을 이루지만(萬事 合同 最善, 로마서 8 : 28), 이 신앙이 잘못되었을 때, 죄를 비롯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3) 죄의 근원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 즉 신앙이 잘못된 데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난 데, 신앙을 버린 데 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도둑질한 죄, 미워한 죄, 간음한 죄 등 숱한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각오를 하고 금욕과 고행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 내가 하나님께 들어가야 합니다. 신앙을 회복해야합니다. 죄의 뿌리를 잘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루터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가톨릭의 지시에 따라 금식 등 각종 고행과 고해성사등 여러 의식으로 처절하게 애썼지만,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쁜 나무에 열린 나쁜 열매 하나 하나를 붙잡고 아무리 애를 써 봐야, 나쁜 나무가 그대로 잇는 한,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마태복음 7 : 17 - 18). 나쁜 나무가 하나님에 의해 좋은 나무로 바뀌어야, 나쁜 열매 아닌 좋은 열매를 자연스레 맺게 됩니다. 죄 대신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쁜 나무보고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암만 해 봐야, 위선의 거짓 열매밖에 열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만'으로 죄의문제가 해결되고, 선행이나 공적이 아니라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올려 신교가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죄다."(로마서 14 : 23)라고 죄를 정의한 이유입니다. 죄의 반대는 신앙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 그리스도교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을 올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4) 나에게는 죄가 없고 우리 교회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단언하기 전에, 키에르케고르의 권고대로, 우리의 마음까지 꿰뚫어보시는 전지 전능의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나는 죄가 없는지, 우리의 신앙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미적 실존에 떨어진 것은 아닌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고, 바울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똥이라고 하고, 키에르케고르는 허무와 절망뿐이라고 하는 돈, 명예, 출세 등을 복이라고 추구하는 기복 신앙에 떨어져 버린 것은 아닌지? 더구나 그것을 사탄식 성서 인용과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값싼 현세의 복과 치병(治病)에 이용해 먹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바알 신앙으로 바꿔쳐, 세상의 복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이용하는 점은 없는지?
윤리적 실존에 떨어진 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바울 신앙의 핵심이요 루터의 종교개혁의 근본인,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말로는 옳다 하면서 실제로는 바리새인처럼 여러 가지 율법을 요구하는 현상은 없는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갖고는 모자라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믿고 순종하는 그리스도교를 행위의 종교로 바꿔 버린 점은 없는지? 믿음과 순종의 문제를 사변(思辨)과 철학의 문제로 바꿔치지는 않았는지?
종교성 A와 구별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제일 심한 것이 신교라는 비판을 듣고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종교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아닌지? 그리스도(Christ)를 주님으로 믿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것'인 그리스도인(Christian)이 아니라, 그저 '교회에 왔다갔다 하는 사람(church-goer)'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교(Christianity)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물리치는 행위교, 의식교, 사업교, 교회교(churchianity)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나'라는 실존은 어느 단계에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빌면서 부족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가 되어 아브라함과 욥의 신앙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감사합니다.

  • profile
    scomsa 2007.09.08 18:47
    scomsa가 권하는 글입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게하는 글로 적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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