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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송두용( CHANG)
2007.09.08 00:42

바울과 송두용[3-3] - 장 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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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바울과 송두용
- 두 스승과 한 신앙 -
1993. 4. 11 제7회 송두용 선생 기념회에서 말씀한 것에 가필한 것

장   문   강




4.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와 참된 교회

(1) 아무 쓸모 없는 노예
예수 믿는다면 으레 교회에 가서 예배 보는 것으로 안다. 좀 더 열심인 사람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봉사'한다고 한다. 교회출석은 의무요, 봉사는 자랑거리다. 개역성서를 보면 바울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한다(빌 3 : 3). 이 번역이 옳다면 바울도 봉사를 크리스천의 중대한 요건으로 들고 있는 것이 된다. 과연 그런가? 성서 원문을 보자. '예배한다'는 '라트류오(latreuo)'를 '봉사한다'로 잘못 번역한 것을 곧 알 수 있다.(다행히 새번역, 표준새번역 등은 '예배한다'로 바르게 번역해 놓았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써 예배하는 우리들이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참된 크리스천)들"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봉사라고 한다면 바울만큼 하나님께 봉사한 사람도 드물다. 자랑한다면 자랑할 수도 있는 바울이다. 그러한 바울이 스스로를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고 불렀다(롬 1 : 1, 빌 1 : 1 등, 보통 '둘로스[doulos]'를 '종'으로 번역하나, 고대사회의 노예를 나타내는 말로서는 약한 것 같다). 봉사한다는 자랑은커녕 그리스도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는 바울이다. 절대의 겸손으로 절대의 순종을 바치는 바울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1만 달란트에 비유하고 있다(마 18 : 23-25). 노동자가 15만 년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품삯이 1만 달란트다(1만 달란트는 약 5천만 데나리, 1데나리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E. Schweizer, Das Evangelium nach Matthaeus, Das Neue Testament Deutsch, Band 2, S. 246). 우리의 죄값이 이 정도라면 '봉사'란 말이 감히 나올 수 있을까? 너무 자신의 죄를 모르는 교만이 아닐까? 봉사한다고 날뛰기 전에 자신의 죄값부터 치러야 하지 않을까?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하고 나서, '저희들은 아무 쓸모 없는 노예(무익한 종)들입니다. 저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읽어 보라(눅 17 : 7-10). 그러한 쓸모 없는 노예라는 자각을 한 사람들만이 예수께서 구원해 주실 때 "저희가 언제 구원 받을 만한 일을 했습니까?" 하고 놀라며 겸손히 감사할 것이다(마 25 : 31-46 참조).
크리스천은 세리처럼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가슴을 치는 존재다(눅 18 : 9-14 참조). 정말 자신은 아무 데도 쓸모 없는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용서받은 죄인이다.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서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가 못 된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겸손밖에 남은 것이 없는 자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믿는다는 예수 자신이 겸손의 화신(化身)이었다(빌 2 : 5-11 참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죄에 우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며 가르치셨고, 겸손한 사람들만이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종교를 이용해 먹는 장사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훌륭한 종교가, 근엄한 제사장, 경건한 바리새인, 박식한 성서학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예수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진정한 예배와 참된 교회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역시 잘 믿는다고 정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의 이름 없는 여인과의 대화에서 전개되었다(요 4 : 20-24. 이 부분을 중심으로 한 예배에 대한 논의로 임세영, "참 예배," '성서연구' 제 418호 1990년 12월, 3-11쪽 참조).

(2) 하나님의 영으로써 드리는 예배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유대인들은 예류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핏대를 올릴 때에, 예수께서는 그리심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육과 형식이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무엇보다 예배드리는 때와 장소의 제한이 없는 것에 교회신자는 놀랄 것이다. 예배란 신성한 교회에서 걸구한 시간에 엄숙히 드리는 것으로 배운 분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기독교보다 훨씬 우수한 종교의 예배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이 어떻게 가르치시고 어떻게 배우시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바에 다른다면, 언제 어디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제약이 없다. 오직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기독교의 출현은 이미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다(임세영, 앞의 글 6쪽). 스바냐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라고 했고(2 : 11), 말라기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질 것이라고 했다(1 : 11).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궤멸을 예언하시고(마 24 : 1-2), 성전을 확청하시며 당신의 부활로 인한 영적 성전의 재건을 말씀하셨다(요 2 : 13-22). 바울은 우리들 각자가 성전이며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고 했다(고전 3 : 16). 또한 어느 날이 더 거룩하다느니 하는 구별은 소용이 없는 것이요 오로지 주님을 위하느냐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롬 14 : 5-6). 이렇듯 참된 예배는 날과 시간에 관계 없는 다른 것임을 이사야는 전한다(1 : 13-14).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초하루와 안식일과 성회(聖會)라고 보이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너희의 초하루와 너희가 정한 절기를 혐오한다." 아모스는 전한다(5 : 21, 24). "나는 너희의 절기 예배를 혐오한다. 너희들의 성스럽다는 의식들이 전혀 기쁘지 않다." "오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의로움이 억수처럼 흐르게 하라." 요컨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장소와 때를 따져서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예배란 일요일에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 영과 진리로 예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우리는 이 말씀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예배하는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인가? 우리가 경건하고 엄숙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인가? 만약에 그러한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바로 지금이 그 때다"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라고 해서 엄숙하지 않은 예배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으로써 예배"드린다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으로써"는 "내부의 행위자를 나타내는 기구적 여격"이다. 따라서 예배란 인간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드리는 것이고 인간은 그에 순종할 따름인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요구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이다(H.A.W. Meyer, The Epistle of Paul to the Philippians, Meyer's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ol. VIII, p. 124). 요컨대 성령은 우리 자신을 성전으로 하여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써 영이신 하나님 앞에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다(롬 12 : 1).
이렇듯 예수께서 가르치시며 바울이 전하는 예배는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안식일에 성전에 가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교회주의자들이 믿고 가르치는 것처럼 일요일에 교회나 성당엑 ㅏ서 드리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들에서, 바닷가에서, 배에서, 집에서, 평일에나 안식일에나,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그때 있는 곳에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가르치신 것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예배인 것이다(마 5 : 1, 14 : 13, 15, 13 : 1, 눅 5 : 3, 마 8 : 14, 9 : 10). 우리의 평생이 예배하는 때요 장소인 것이다. 그리심도 예루살렘도 아닌 것이다. 명동도 여의도도 아닌 것이다. 강남의 교회도 강북의 성당도 아닌 것이다. 더구나 제사장이나 목사, 신부 같은 인간이 주관하는 것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 인간 아닌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것이 예배인 것이다. 성령 아닌 인간이 예배를 주관한다는 그 교만이 무서운 위선과 타락을 나을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는 바요 오늘날 참된 크리스천이 직접 겪는 고통이다. 이 점에서 만인 제사주의(萬人祭司主義)로 출발한 프로테스탄트(신교)의 자기반성이 요구된다.
기독교의 예배는 의식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논의한 바 있다. 할례든 세례든 성찬이든 어떤 의식을 지키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와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서 보았다. 유대주의의 의식이든 교회주의의 의식이든 인간적인 틀 속에서 어떤 형식을 지키는 것이 예배가 될 수 없다. 성령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형태로든지 예배하실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인간의 의식이 가로막는 죄악을 범해서는 안 된다. 성전과 교회에 소나 양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십일조 등 헌금을 내는 것이 예배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크리스천은 자기 자신을 산 희생제물로써 하나님께 바친다(롬 12 : 1).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자기의 일생을, 자기의 모든 것을 인간이나 교회 아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크리스천이다(마 16 : 24). 교회에 십일조를 내야 하느니 마느니, 어떤 소득은 넣고 십분지 일을 계산해야 한다느니 빼도 좋다느니, 세금을 공제하기 전으로 해야 한다느니 아니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헌금을 내는 분이나 받겠다는 분이나 이미 하나님 것과 내 것을 구분하는 생각에서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부인한 자의 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마 16 : 24).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 없는 노예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 몫을 주장하는 자의 말이기 때문이다(눅 17 :7-10).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내 것은 모두 다 네 것"이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모른 자의 소리요(눅 15 : 31), 과부의 렙돈 두 푼을 칭찬하신 그리스도의 뜻에 무지한 자의 헛 공론(空論)이기 때문이다(막 12 : 41-44). 더구나 거룩한 헌금을 많이 내신 분들의 존함이 교회 주보에 실리는 것도 부족하여 헌금 실적표가 성당 앞마당과 교회 담벼락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 할 말이 없다. 설령 만에 하나 헌금 내는 것이 그토록 고귀한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네 앞에서 나발을 불지 말라"고 하시고,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네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와는 관계없는 짓이기 때문이다(마 6 : 2-3). 그러나 십일조를 내면 그 이상의 복을 돌려 받는다는 설교에 이르면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 예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냐? 어디에서 예수께서 십일조와 세상의 복을 관련시키셨다는 것이냐? 가난한 자 복이 있다 하시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께서 십일조를 받아 쓰시다가 이자라도 붙여 몇 배로 되돌려 주신다는 말이냐? 하나님과 맘몬(財神: 재신)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신 예수께서 애통하는 상한 심령 대신에 돈 몇 푼이 필요하시단 말이냐?
야하웨 신앙을 바알 신앙으로 바꾸는 자가 누구냐? 진리의 기독교를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바꾸는 자가 누구냐? 누가 예수의 종교를 무당 판수의 노름(샤머니즘)으로 바꿔치느냐? 누가 기독교로 장사를 해 먹느냐? 누가 인간의 영혼을 강도질하느냐?

(3) 참된 교회
그릇된 예배관념은 잘못된 교회관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보통, '교회'라고 하면 뾰족탑에 십자가가 걸린 교회당이나 성당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예배도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배란 언제 어디서나 드릴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분들도,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곳인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요구하시고 더 기뻐하신다고 한다. 반면, 세계에 자랑할 것도 많은 우리 한국에는 교회 대신에 성전(聖殿)이란 말로 낡은 새로움을 자랑하는 집단도 있다. 또한 구양의 유대교 성전을 대신해서 신약의 기독교 교회가 있다는 분도 있다. 요컨대 교회든 성전이든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곳인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 왕의 증언을 들어 보자(대하 2 : 6). "누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수 있겠는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66 : 1-2).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어디에 집을 지을 것이냐?" 바울도 외친다(행 17 : 24).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 계시지 않는다." 그렇다. 너무도 명백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교회에도 성전에도 계시지 않는다.
교회든 성전이든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아니다. 또한 예배드리는 곳도 아니다. 이것은 이미 살펴본 요한복음 4장 20-24절로 충분하다. 그렇다.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리심도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그리심 성전도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예배의 장소요 종교의 중시미로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4 : 1-2). 또한 그 성전을 목숨을 걸고 확청하시면서 참된 성전이 다시 설 것을 예언하셨다. 즉 인간의 손으로 지은 건물로서의 성전은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성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세워질 것임을 예언하셨다(요 2 : 13-22, '쏘마(soma)'는 '육체'가 아니라 '몸'이다). 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성전이 바로 '에클레시아(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이다(엡 1 : 23, 골 1 : 24).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대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계신 거룩한 성전이므로 영원히 함락될 수 없으리라는 유대인들의 희망과 기대와 믿음과 기도를 산산히 깨뜨리면서······. 결국 성전 중심의 유대교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쏟은 열정과 헌신은 요즘의 교회신자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의 것이였다. 그러나 인간이 세운 성전은 무너진다. 교회든 성전이든 인간이 세운 것은 무너진다. 아무리 크고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아닌 이상, 무너진다. 바벨탑처럼 높으면 높을수록, 크면 클수록 그 무너짐이 심하다.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인간적 영광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 수치도 또한 크리라. 역사에서 배우는 바가 있기를, 현대의 성전주의자들이여, 현대관 유대주의자들이여, 오늘의 교회주의자들이여!
오늘날 '교회'라고 알고 있는 '에클레시아(ekklesia)'는 성서에서 예배나 정규적인 모임을 위한 건물이라는 뜻으로 쓰인 적이 전혀 없다(H.S. Gehman ed., "Church,"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the Bible, 1976, p. 175). 성서에는 건물로서의 교회라는 관념조차 없는 것이다. 원래의 교회라고 할까 참된 의미의 교회인 '에클레시아'는 애초부터 오늘날 말하는 '교회(영어 church, 독어 Kirche)'가 아니다. '부름받은 크리스천의 모임' 내지 '신앙공동체'(영 assembly, congregation, 독 Gemeinde)이다(W. Bauer, 1988, S. 485. W. F. Arndt and F. W. Gingrich trans.,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1967. p. 240). 2천년 역사의 기독교가 이러한 에클레시아의 본래의 뜻을 잊어 버리고 무시한 데에 기독교사의 비극이 있다. 퇴보가 있다.
에클레시아의 원뜻은 '군대가 모이도록 소집한다'는 데서 왔다. 나아가 70인역 성서에서 에클레시아는 "야하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이란 뜻으로 쓰였다. 신약에서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뜻이다. 신약성서에서 볼 때 놀라운 점은, 마태복음 16장 18절과 18장 17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4 복음서에서 에클레시아가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이다(이하 L. Coenen, "CHURCH," in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Colin Brown ed., 1975, Vol. I. pp. 291-307 참조). 누가는 누가복음에서는 한번도 쓰지 않았으나, 사도행전에서는 23번 썼다. 이것은 누가가 예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실 때에 예수께 속했던 제자들 등의 모임에 대해서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누가뿐만 아니라 모든 성서기자들이 에클레시아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존재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O. Cullmann, The Early Chruch, 1956, 118 ff. 앞의 L. Coenen, p. 298에서 거듭 인용). 에클레시아란 단어를 가장 많이 쓴 바울은 에클레시아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이뤄지는(롬 8 : 29 이하) '하나님의 에클레시아'(고전 1 : 2, 11 : 16, 22. 고후 1 : 1, 갈 1 : 13 등)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에클레시아'(갈 1 : 22, 롬 16 : 16)라고 부른다. 이것은 에클레시아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신앙 공동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바울의 에클레시아 개념(즉 참된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요즘 현대에 퍼져 있는 교회 관념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의 교회'와 '그리스도 아닌 것 안에 있는 교회' 즉 "인간이 불러 모아 인간의 조직, 제도, 의식, 전통, 건물 등 안에 있는 교회"는 에클레시아가 아닌 것이다. 참된 의미의 교회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에클레시아"이다. 즉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하나의 에클레시아다. 이 점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여러 곳에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을 박해했지만, 그것을 하나의 에클레시아를 박해했다고 회고하고 있는 것에 잘 드러난다(고전 15 : 9, 갈 1 : 13, 빌 3 : 6). 또한 에클레시아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크리스천들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그 부르심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만 아시므로, 에클레시아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요즘의 교회에는 교적부(敎籍簿)라는 회원명부가 있어 교적에 올라 있느냐 아니냐에 다라 교회원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그러한 명부가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아시는 일이요. 인간이 판단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우주적 에클레시아의 구성원인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여러 종류의 작은 에클레시아를 이룰 수 있다. 작게는 가정집의 모임도 있고(몬 2. 고전 16 : 19, 롬 16 : 5 등), 좀 더 넓은 지역의 모임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장소나 크리스천의 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는가 여부이다. 이러한 작은 에클레시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역시 보이지 않는 에클레시아다.
이렇듯 에클레시아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초대 크리스천들은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다. 그래서 가톨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루터가 에클레시아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발견했을 때 가톨릭은 전복되었다(R. Sohm, Kirchenrecht, II. 1923, S. 135. G. Kittel ed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1982. Vol. III., p. 54에서 거듭 인용). 이것이 종교개혁이었다. '보이지 않는 에클레시아'를 '보이는 교회'로 바꿔친 가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트(항의)가 종교개혁이었다. '보이는 교회'인 가톨릭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교회주의에 반대하고, 바울이 외치듯이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신앙만의 신앙'을 주장한 것이 프로테스탄트(신교)였다. 인간이 만든 '보이는 교회'의 신부, 주교, 교황 등 이른바 성직자의 권위를 부인하고 '만인제사주의(萬人祭司主義)'를 부르짖은 것이 프로테스탄트였다. 참으로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였다. 바울의 신앙만의 신앙을 다시 세워 기독교의 방향을 돌려 놓은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였다. 인류의 앞길을 돌려 놓은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런데,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보이는 교회'인 가톨릭 교회에 프로테스트하여 원래의 에클레시아란 '보이지 않는 에클레시아'라고 주장한 신교가 '보이는 교회'도 필요하다고 교회를 만들었다. 물론 올바른 에클레시아를 밝힌 점에서 한발짝 전진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종교개혁을 성공시켜야 하는 당시 시대상황의 절박함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퇴보였다. 보이지 않는 에클레시아를 만드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는 교회를 만든 인간에 의지하는 퇴보였다. 가톨릭으로 후퇴한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교회주의에 반대한 신교가, 신앙만으로는 구원 못 받고, 그래도 교회에, '보이는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교회주의를 답습하게 되었다. 결국 '신앙만의 신앙'은 허울 좋은 말에 불과하게 되었다. 베드로의 전통을 이어받은 가톨릭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에클레시아의 초석은 인간 베드로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고전 3 : 11, 10 : 4)라고 반박한 신교가 신교 나름의 새로운 정통교회를 주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정통의 '보이는 교회'에는 신부, 주교, 교황 대신에 목사, 감독, 당회장이 ㄷ들어앉아서 다시금 성직자의 권위를 주장하니 '만인제사주의'는 말도 꺼낼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가톨릭의 전통을 비웃던 신교가 새로운 교회의 전통을 주장하게 되어 버렸다. '성서지상주의'의 빛은 바래고 말았다. 여기에서 신교의 뼈아픈 반성과 제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


5.바울의 무교회 신앙과 송두용의 신앙만의 신앙

(1) 교회주의와 무교회주의
앞에서 (3. 의식을 배제하는 영적 기독교 (2) 기독교, 우대주의, 교회주의에서 시작) 예수의 기독교는 유대주의인가, 교회주의인가 살펴 보았다. 유대주의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할례와 안식일 등 의식을 지키며, 율법을 준수하고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주의는 교회나 성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세례와 성찬 등 의식을 지키며, 도덕을 준수하고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미 보아 온 것처럼 유대주의와 교회주의는 사실상 같은 것이다. 성전 대신에 교회, 할례와 안식일 등 의식 대신에 세례와 성찬 등 의식, 율법 대신에 도덕이라고 말만 다를 뿐이지 본질상 똑같다. 기독교는 어떤 형태의 의식도 배제하는 것이며, 진정한 예배란 성전이나 교회에서 의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인도에 따라 어떠한 형태로든 드릴 수 있는 것이며, 참된 교회란 건물과 조직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신앙 공동체로서 보이지 않는 에클레시아라는 것을 논의해 보았다.
크리스천은 율법과 도덕을 준수하고 선행을 쌓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점을 따로 다루지는 않았으나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더구나 이러한 바울의 신앙만의 신앙은 적어도 말로는 부인하는 크리스천이 없을 정도로 이론상으로 이미 명백하다. 그런, 단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면 도덕은 지킬 필요도 없고 사랑이나 선행은 소용도 없지 않느냐는 의심을 갖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거나,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엇다(마 7 : 17-18)". 믿음은 인간이라는 나무를 좋은 나무로 만드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만드시는 것이다. 새롭게 좋은 나무로 태어난 인간은 자연스럽게 좋은 열매 즉 선행을 맺는다. 도덕도 지키고 선행도 하며 사랑도 베푼다. 그러나 믿음 없이는 선행이 있을 수 없다. 좋은 나무가 못 되었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못 맺는다. 맺는다면 위선의 열매뿐이다. 바울은 이러한 믿음과 사랑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갈 5 : 6)이라고 했다. 또한 동전의 양면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원래 깨끗하고 좋은 동전은 앞뒤가 다 깨끗하다. 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믿음에서 나오고, 참된 믿음은 참된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동전의 앞, 뒤를 떼어서 논할 수 없듯이 크리스천에게 사랑과 믿음은 표리일체를 이룬다.
결국 예수의 기독교는 유대주의도 아니고 교회주의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데 기독교의 현실은 어떤가? 교회주의가 기독교를 가리고 있다. 종교개혁으로 출발한 신교마저 교회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본 바 있다. 원래 어떤 잡신(雜神)이나 우상이나 인간이나 제도나 형식이나 집단에 얽매여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 속한 자(kristianos)들인 '크리스천(Christian)'들이 '그리스도(Christ)'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Christianity)'이다. 그런데 '크리스천'을 교회 다니는 사람(church-goer)'이 밀어내고 '그리스도'의 자리에 '교회(church)'가 앉아 '그리스도교'를 '교회교(Churchianity)'가 쫑아내 버렸다(여기서 '교회'는 앞에서 살펴본 '보이는 교회'이다). '그리스도교'의 간판은 바꾸지 않은 채, 그래서 루터는 교회주의의 황제인 교황을 '적(敵) 그리스도(Antichrist)'요 '하얀 악마'라고 불렀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영혼을 도둑질하는 교회주의 종교가들을 잡아넣으라며, 자신은 인류 최초의 크리스천이 되어야겠다고 좁은 문으로 좁은 길을 걸었다. 그래서 브룬너(E. Brunner)는 교회를 오해한 2천년 기독교사를 통탄하면서, "무교회 운동이 장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똑똑히 제시해 주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교회란 무엇인가? 새로운 교파의 교리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무교회란 교회주의가 가려 버린 '본래의,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독교'를 말한다. 원래의 기독교가 그대로 전파되고 있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대로 선포되고 있다면 무교회란 말이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기독교,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오해학 잘못 믿고 전하는 교회주의가 있기에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무교회주의가 생긴 것이다. '무(無)교회'의 '교회'란 물론 '보이는 교회'다. 하나님의 에클레시아 즉 진정한 교회, '보이지 않는교회' 아닌 '인간의 교회'요 '보이는 교회'요 거짓 교회다. 거짓 교회를 버리고 참된 교회를 찾자는 것이 무교회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께 그리스도의 자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무교회다. 무교회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원래의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무교회를 전하는 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독교를 진리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무교회를 주장하는 것은 바울이 전한 신앙만의 신앙의 복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바울이 전한 것이 이 무교회 신앙이요, 송두용이 평생을 바쳐 전한 것이 이 신앙만의 신앙이다.

(2) 그리스도만을 자랑한 바울과 송두용
이렇게 교회주의가 뒤덮고 있는 기독교계에서 무교회라는 좁은 길을 걸은 바울과 송두용은 어떻게 살아갔는가?
요즈음의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자랑거리가 참 많다. 돈이 많다, 공부를 많이 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 성서 많이 읽었다고 한다. 우리 교회는 참 크다, 신도가 많다, 열심이다,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과 송두용에게는 자랑거리라고는 그리스도밖에 없었다. 바울은 크리스천의 세 요건의 하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을 들고 있다(빌 3 : 3), 바울의 의견에 따른다면,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자랑하는 것은 불신이요,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크리스천이 아니다.
빌리비보서 3장 5-11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에 바울은 어떠했는가? 바울에게도 자랑거리가 많았다. 할례는 8일 만에 받았고, 종족은 이스라엘, 지파는 베냐민,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다. 율법은 바리새인이요, 인간적 열성으로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참된 교회)를 핍밥했으며, 율법으로는 흠잡힐 데가 없었다. 실제로 유대교에서 볼 때, 유대주의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의 이러한 점들은 무지무지한 자랑거리로서 기쁜 것이었다. 요즘에 보석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집에 있는 보물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바울의 바랑거리는 유대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보물단지였다.
그런데 바울은 뜻밖의 말을 하고 있다. "그 모든 자랑거리가 나에게 이익인 줄 알았는데 손해였다. 그리스도 때문에 과거에 손해라고 여기고손해라고 계산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는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빼앗겼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빼앗겼지만 단순히 그 모든 것이 내게 손해 정도였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냐고? 그 모든 것이 다 배설물이다. 똥이다." 바룽은 자기의 일곱 가지 자랑거리 외에 세상 사람들이 쫓아다니는 모든 것 - 돈도, 학문도, 명예도 다함께 똥이라고 한다.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여 마지않는 그 수많은 좋은 것들을 바울은 똥이라고 한다. 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위해서,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바울은 모든 좋은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얻게 된 바울의 심정은, 그의 신앙의 계기는 예수의 진주 찾는 장사꾼의 비유(마 13 : 45-4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주 장사꾼이 값진 진주를 찾으러 다니다가 제일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진주 하나를 샀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기독교의 매력이다. 기독교의 쉬운 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 갖고 크리스천은 사는 거이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지만, 그리스도 한분이 계시기에 바울은 살았던 것이다. 수천만 가지를 갖고 있는 우리보다 바울이 훨씬 더 위대하고 훨씬 더 강했던 것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장 중요한 한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바울이기에 역사를 뒤집어 놓을 수 있었고 참된 애국을 할 수 있었고 민족과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살리는 기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교계에서 착각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어떤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다 버린다고 하고(빌 3 : 8),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똥으로 여긴다고 했다(빌 3 : 10). 여기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머리로 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격적인관계이다. 머리로 아는 지식이라면 서기관, 바리새인, 성서학자, 신학박사가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우선 구약성서에서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셨다는 말씀이 나온다.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셔서 우리는 하나님께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이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바울이 인식의주체가 되어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아셔서 바울이 그리스도께 알려진다는 것이다(G. Friedrich, Der Brief an die Philipper, Das Neue Testament Deutsch, 1985, Band 8, S. 161). 여기서 바울은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며 "나의"라는 말을 유일하게 쓰고 있다.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안다고 할 때, '남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체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의' 그리스도에게 알려져서 그리스도와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일체가 되어 그의 피와 살을 먹어 그에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송두용 역시 자랑할 것을 많이 갖고 있었다. 맣은 재산, 깊은 학식,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을 선행 등등. 그러나 송두용은 바울처럼 그러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만을 얻었다. 그러기에 그 많은 사람들의 갓므에 평생동안 잊지 못할 복음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길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육을 신뢰하지 않은 바울과 송두용
바울은 크리스천의 마지막 요건으로서 육을 신뢰하지 않는 점을 든다(빌 3 : 3).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는 점과 일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에, 죽음까지도 다 이길 수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랑거리였다. 다른 자랑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창피한 것이였다. 기독교를 믿는다면서 예수 그리스도말고도 자랑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육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육이란 뭐냐? 희랍 사상에서 가르치는 이원론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 영혼은 좋은 것이고 육체는 나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올바르게 되기위해서는 나쁜 육체를 굴복시키고 영혼을 살려야 한다. 따라서 육체를 굴복시키기 위해 금욕이란 것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이렇게 영과 육의 이원론으로 보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은 인간 전체를 육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영, 인간은 육. 생래의 인간은 영적인 좋은 요소란 없는 존재, 오로지 영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영적인 것을 주셔야 가능성이 있는 존재, 따라서 크리스천은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자랑할 것이 없다. 이러한 히브리적 사유를 가진 바울은 여기서 무엇을 육이라고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그러나 가장 멋진 해석은 칼빈의 말이다. 육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육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 아닌 모든 것, 그게 육이다(Philippians,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Vol. 11. p.269).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아닌 것을 너무 많이 찾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아닌 것이란 다 육이다. 육이란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영적인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자꾸만 육에 매달리느냐?" 이것이 바울의 애타는 외침인 동시에 송두용이 이 땅에 있을 때 목숨을 걸고 외쳤던 말씀이다.

6. 한국 기독교와 두 스승의 한 신앙

한국 기독교는 자랑거리를 많이 갖고 있다. 그 양적인 팽창에서 수적인 증가에서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기록을 남길 수 있다. 단일교회로서 세계에서 제일 많은 신도를 가진 집단도 있다. 세계에 내놔도 손색 없을 훌륭한 교회건물들이 하늘을 찌르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세계적인 조직을 가진 집단이 한반도에서도 그 철통 같은 조직과 규율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의 훌륭한 재림 예수는 미국에 가서 탈세 혐의로 철창에 들어가 기독교 한국의 국위를 선양했다. 이미 천만명을 훨씬 넘어선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가 이미 한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임을 입증하고 있다. 막걸리 한잔과 고무신 한켤레 받고 찍었던 한 표를,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받고 찍을 수 있도록 경제발전을 시키신 공로를 갖고 계신 분께서 흉탄에 쓰러지셨을 때, 우리의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함께 당당히 그분의 명복을 빌 수 있었다. 그뿐이랴? 그 분이 살아 계셨을 때는 조찬 기도회로 그분의 식탁을 빛내 드린 것도 우리 기독교의 원로요, 1980년 8월 6일 아침,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살리실 분을 위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 기도회"를 올려드린 것도 우리 교계의 어른들이었다. 평신도라고 뒤떨어지랴? 새벽부터 밤중까지, 금식하며 철야하며, "당신의 나라와 의야 급할 것 있습니까? 남이야 상관 있겠습니까? 저에게는, 제 자식에게는 기필코 복을, 복을, 복을, 꼭 꼭 꼭, 반드시 주실 것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멘, 할레루야." 하는 성령폭발에 천장이 날아가고 벽이 깨질 듯한 교회와 기도원이 즐비하여 무당의 밥줄을 끊어 놓으며 잿밥을 위협한지 이미 오래다. 배운 자가 제구실 못한다면 학비가 아깝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면 왜 복을 주시기 않겠느냐? 복을 기원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성서적으로 털끝만큼의 잘못이 없다."고 예리한 논증을 펴시는 대석학도 자랑스럽다. 과연 바울을 부끄럽게 하고 예수로 침묵하게 하며 송두용을 바보로 만든다. 이루 다 열거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러한 자랑거리들은 바울과 송두용이 자랑한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인간의 장난이요, 육의 타락상이요, 권력에 꼬리치는 썩은 종교장사꾼의 작태다. 배부른 종교장사꾼에게는 바울의 신앙만의 신앙은 잠꼬대요, 송두용의무교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하는 진리는, 송두용이 전하는 복음은 그들의 장사를 망치는 거침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갈급하는 영혼들에게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심령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생명의 단비가 될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두 스승의 무교회 신앙과 신앙만의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이 민족의 앞날과 생사가 달려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울과 송두용을 이 한반도에 보내어 하시는 말씀이라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기원하는 바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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