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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송두용( CHANG)
2007.09.08 00:40

바울과 송두용[3-2] - 장 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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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바울과 송두용
- 두 스승과 한 신앙 -
1993. 4. 11 제7회 송두용 선생 기념회에서 말씀한 것에 가필한 것

장   문   강




3. 의식을 배제하는 영적 기독교

(1) 참된 크리스천
유대주의자, 의식주의자, 율법주의자를 경계하라는 바울의 격노한 외침은 계속된다.

우리들이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참된 크리스천)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으로써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며
육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빌 3 : 3)
바울은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저 개들, 악한 일꾼들, 짜른 자들을 경계하라. 저 유대주의자들의 의식주의, 형식주의, 율법주의를 경계하라. 저 악한 놈들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으려면 성서에 쓰여 있는 대로 율법에 따라 할례 같은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저 내시 같은 놈들은 자기들은 육체에 할례를 받고 의식을 지켰으므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 주는 영예로운 칭호---'할례 받은 사람(또는 할례자, 페리토메)'---를 갖고 있다고 자랑한다. 저 개들은 자기들처럼 율법에 따라 의식을 준수해야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참된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나 --- 바로 우리들이야말로 참된 의미에서 '할례 받은 사람'이다. 올바른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참된 크리스천이다. 어떠한 우리들이기에? 첫째, 하나님의 영으로써 예배하고, 둘째, 그리스도 예수만을 자랑하고, 셋째, 육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들이기에.
바울의 주장은 명쾌하고 분명하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의식주의, 율법주의를 공격하면서 참된 크리스천의 3대 핵심적 요소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으로써 예배하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육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참된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리스도에 속한 자' 즉 크리스천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라 적(敵) 그리스도의 자식이다.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말은 기독교를 믿는다면서 사실은 엉뚱한 우상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에 "아멘! 바로 제가 믿고 있는 ○○교가, ○○교회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희들이야말로 참된 크리스천입니다. 만세! 할렐루야!"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자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지나치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잘못 믿고 있다면 잘못 믿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출발이므로, 환자는 자기의 병을 깨닫는 것이 치료의 첫출발이요, 죄인은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이 용서받는 첫걸음이다. 스스로 건강한 환자에게는 편작(扁鵲) 같은 명의(名醫)도 힘을 못 쓰는 법이요, 스스로 의인인 죄인에게는 복음이 쓸데없는 법이다(마 9 : 12). 다만, 복음은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므로(롬 1 : 16), 그 능력에 의지하는 죄인은 살 것이다. 그러나 복음 아닌 것에 의지하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디에서 어떻게 믿든지 간에 자신의 믿음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복음과 일치하는가를 돌이켜보는 지혜와 겸손이 필요하다.

(2) 기독교, 유대주의, 교회주의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려면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할례와 안식일 등 의식을 지키며, 율법을 준수하고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믿었다. 모두 구약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하나님의 명령이라 믿고 인간적인 열과 성을 다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려면 교회나 성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세례와 성찬 등 의식을 지키며, 도덕을 준수하며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모두가 성서에서 근거를 댄다. 그리스도의 명령이라고 믿고 인간적인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보기에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고 있는가? 첫번째 유대인들의 견해를 유대주의라 한다면, 두번째 오늘날 교회(성당 포함) 중심의 견해는 교회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몸소 보이시고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파)와 기독교(파)가 다툰다고 하는데, 基督(기독)은 그리스도의 중국어 基利斯督(기리사독)에서 온 말이니 기독은 그리스도요 기독교 즉 그리스도교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질까?) 요컨대 예수의 기독교는 유대주의인가, 교회주의인가?

(3) 유대주의의 의식 : 할례
바울은 유대주의에 목숨을 걸고 반기(反旗)를 들었다. 그는 유대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인 할례에 격심한 반대를 한 것을 앞절에서 이미 보았다. 그런데 유대주의에 근거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성서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으로 쓰여 있는 것이다(창 17 : 10-14).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진다고까지 되어 있다.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나쁜 놈이었다. 성서를 무시하는 못된 놈이었다. 하나님의 적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외친다. 겉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요, 겉에 할례를 받는 것이 할례가 아니다. 오직 속이 유대인이라야 유대인이다. "할례는 마음에 받아라." 성서에 쓰여 있다고 기계적으로 문자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죽은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에 있기 때문이다(롬 2 : 28-29). 더 나아가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란 '카타토메'(katatome, 짜른자)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이야말로 '페리토메(peritome)'"라고 한다(빌 3 : 2-3). 이 '페리토메'란 단어는 ① (종교적 의식으로서) 할례(割禮), ② 할례 받은 상태, ③ 영적인 할례, ④ 할례 받은 사람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할례 받은 사람으로서 유대인"이 아니라 "참된 할례를 받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크리스천을 말한다(Walter Bauer, Griechisch-deutsches Woerterbuch, 1988, S. 1315). 따라서 "우리들이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새로운 언약의 백성 즉 크리스천"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바울은 "구약에서 말하는 육체의 할례는 그리스도로써 완성되었기 때문에 육적인 할례는 더 이상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죄악이다.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는 것이 참된 영적 할례인 것이다. 육적인 의식을 더 이상 고집하지 말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할례가 구약성서에 명기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의식으로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의 영적 의미를 살려낸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구약에서 육체의 할례와 마음의 할례를 구분하고 마음의 할례를 권한 것(레 26 : 41, 렘 4 : 4, 겔 44 : 7 참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할례의 영적 의미를 완성시킨 것이다. 하나님을 영으로써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할례라고 함으로써 "의식을 배제하는 영적 기독교"를 인류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기독교 이해는 그가 할례뿐만 아니라 유대인,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선민 등 구약의 개념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영적으로 승화시켜 완성시킨 것에도 잘 표현되고 있다.

이렇듯 의식을 배제하는 영적 기독교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항상 외쳤던 바울의 구원관과 딱 들어맞는다. 의식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과 일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인간에게 주어져서 의식이나 선행이나 어떤 인간적인 것이, 육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바울의 가르침과 일체가 된다.
창세기를 볼 때 이것은 더욱 밝게 드러난다. 할례라는 의식이 있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창 15 : 6). 의로움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옛 언약(구약)의 상징으로서 할례를 받을 것을 명령받는다(창 17장). 따라서 할례 이전에 구원을 받았으므로 할례라는 의식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거창한 교회에서 엄숙한 의식을 지키며 도덕을 준수하고 선행을 쌓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서 하나님을 믿기만 한 것뿐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만을 보시고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인정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였다.
할례가 유대교에만 있는 독특한 의식이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교, 콥트교(Coptic Christianity) 등 다른 셈족의 종교에도 있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4천년 고대 이집트에도 있었으며, 아프리카, 서아시아, 호주 등 태평양 지역에서도 퍼져 있다 한다.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할례라는 의식 자체가 구원의 요건이요 하나님을 믿는 일의 본질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유대주의가 옳다고 한다면 우상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할례와 같은 의식만 똑같이 지킨다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되어 버린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독이다.

원래 할례라는 의식은 이렇게 하나의 상징으로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언제부터인지 할례의 상징적 의미를 망각해 버리고 할례라는 의식 자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필수불가결한 요건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이하 G. F. Hawthorne, Philippians, pp. 125-6 참조). 그러나 이미 구약에 마음의 할례를 촉구하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다(렘 4 : 4, 겔 44 : 7, 레 26 : 41 등). 할례의 육적 의미가 영적으로 상승,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할례로 상징된 언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완전히 이루어졌다. 할례의 의미가 영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된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믿으면 만사 완성이다. 모든 것이 된다. 구원도 받을 수 있고 새 사람도 될 수 있다. 내 힘으로 준수하려고 암만 노력해도 안 되는 율법, 도덕의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된다. 죄와 죽음의 문제가 봄날에 얼음 풀리듯 자연스레 해결된다.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믿음은 열매를 맺는다.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갈 5 : 6), 의식을 배제하는 영적 기독교---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다.

이렇듯 기독교는 의식을 거부한다. 의식이 관여할 자리가 복음 안에는 없다. 따라서 참된 크리스천은 육적인 의식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구원을 위해서 의식이 필요하다거나 하나님을 믿는 일에는 의식이 필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정도를 넘어서 치명적인 죄악이다. 영적인 기독교를 망치기 때문이다. 믿음만으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훼방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공로 없이, 율법과 도덕의 선행 없이, 오직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기쁜 소식인 복음을 깡그리 부숴 버리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마 12 : 31-32).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개요 악한 일꾼이다. 제발, 제발 그런 사람들이 없기를!

(4) 교회주의의 의식 : 세례와 성찬
① 교회주의자들은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세례와 성찬은 행하라고 성서에 쓰여 있지 않으냐고. 그렇다. 유대주의자들도 예수와 바울에게 그렇게 대들었다. 사탄도 성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며 예수를 넘어 뜨리려 했다(마 4 : 6).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으로 거룩히 지키라고 한 안식일을(출 31 : 15, 신 5 : 12-15), 모세, 이사야, 느헤미야가 지키라고 한 안식일을(출 34 : 21, 35 : 3, 사 56 : 2-7, 58 : 13-14, 느 10 : 31), 왜 깨느냐고 예수에게 대들었다(안식일 밀밭 사건, 마 12 : 1-8, 막 2 : 23-18, 눅 6 : 1-5. 안식일에 병을 고침, 마 12 : 9-14, 막 3 : 1-6, 눅 6 : 6-11, 13 : 10-17). 그들은 구약성서와 그들의 전승(傳承)에서 수십 트럭의 증거를 예수에게 들이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대답한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예배)가 아니라 자비라는 것을 똑바로 알았어야 했다(마 12 : 7)." "나는(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막 2 : 28)." 바울은 외친다. "안식일 같은 문제로 어느 누구도 너희를 비난하지 못하게 하라. 그런 의식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상징)에 불과한 것이다(골 2 : 16-17)."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한다. 안식일로 상징된 것은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히 4장).
요컨대 예수와 바울은 성서에 쓰여 있다고 해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문자적으로, 죽은 문자로 지키지 않았다. 그 육적 의미를 죽이고 영적 의미를 살려 내어 본래의 하나님의 뜻을 실행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앞에서 다룬 문제이다. 앞의 논의를 읽고, 바울이 유대주의의 의식을 버리고 영적인 기독교를 주장한 것을 이해한다면, 그가 세례와 성찬이란 의식에 대해 어떻게 주장했을까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울은 세례와 성찬 같은 의식이 기독교에 다시 뿌리 박은 것을 보고 놀라며 통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을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에게 다시금 외칠 것이다. 저 '악한 일꾼들'을 경계하라고.

이것으로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는 유대주의든 교회주의든 모든 의식을 배제하는 영적 복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세례나 성찬에 미련이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카톨릭의 '일곱가지 성스러운 의식(七聖事: 칠성사)'이 성서에 근거가 없는 잘못된 것이라고 버린 종교개혁자들도 세례와 성찬은 남기는 입장에 섰으니 이해가 된다. 따라서 좀더 자세히 논의해 보아야겠다.

② 예수께서는 도대체 세례를 주시지 않았다(오 4 : 1-2). 예수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다(막 1 : 38). 바울은 많은 사람이 아니라 극소수의 몇사람에게만 세례를 준 것을 오히려 감사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낸 것은 세례를 주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라고 보내신 것이라고 한다(고전 1 : 14-17). 세례가 아니라 복음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③ 성찬은 어떤가? 과연 예수께서는 의식으로서 성찬을 제정하고 계속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셨는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성찬 의식을 제정하셨다고 믿고 열심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47 참조).
(I) 우선 신약성서 전체를 모두 살펴보자. 마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유다, 마가 등 신약성서 기자 거의 전부가 예수의 이 중대한 명령을 전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사도행전을 보아도 예수의 제자들이나 바울 등 초대 크리스천들이 빵과 포도주를 거룩히 먹는 성찬 의식을 지켰다거나 (특히) 전했다는 기록이 없다. (교회주의에서 갖다 붙이는 것이래야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같이 식사를 하고 기도를 했다는 정도의 기사인데(행 2 : 42, 46), 그것이 성찬 의식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성찬 의식을 지킨 것이라면 공동생활 의식도 지킨 것이다. 기도 의식도 지킨 것이 된다. 공동소유 의식, 판매 의식, 분배 의식, 모임 의식, 식사 의식 등을 지킨 것이 된다. 도대체 이런 식으로 된다면 의식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미욱한 자들이라도 예수의 11제자들을 비롯한 초대 크리스천들은 예수의 중요한 명령을 지키지도 않고 전하지도 않은 엄청난 죄악을 지었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의 죄악을 훨씬 훗날의 교회가 고쳤단 말인가? 더욱이 누가의 경우, 그가 쓴 누가복음에 나오는 성찬 제정 명령이 다른 사람이 첨가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사도행전에서 그 중대한 의식을 초대 크리스천들이 지키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침묵할 것이 아니라 엄한 질책을 했어야 했다.
(II) 교회주의에서 예수께서 성찬 의식을 제정하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제시하는 성서의 근거는 마태복음 26 : 26-29, 마가복음 14 : 22-25, 누가복음 22 : 14-20, 요한복음 6 : 51b-58, 고린도전서 11 : 23-26 등이다. 우선 마태, 마가, 요한의 복음을 잘 읽어 보자.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를 드시며 그것이 자신의 살과 피라고 하셨다는 말씀만 전하고 있다. 성찬 의식 제정 명령이 없다. 특히 공관복음서의 최초 원형으로 생각되는 마가복음에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로써 상징적으로 자신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을 뿐이지, 그것을 하나의 의식으로 제정하시고 반복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성찬식 제정으로 본다면 엄청난 비약이다. 예수는 "나는 ······이다" 하시며 여러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다 의식을 제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성찬 의식뿐만 아니라 포도나무 의식, 양 의식, 양의 문 의식, 목자 의식 등 수없는 의식을 만든 꼴이 되어 버린다(요 15 : 1-11, 10 : 1-10).
(III) 요한복음은 성찬에 대하여 한마디 말도 없다. 요한은 예수께서 최후로 만찬을 드실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는 말만 전하고 있다(13장). 이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14-16장)이나 대제사장의 기도(17장)에도 성찬은커녕 어떤 의식도 제정하거나 명령한 흔적조차 없다. 예수의 마지막 유언임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을 다시금 명백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 : 51b-58을 가지고 성찬식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관복음처럼 최후의 만찬때의 일이 아니다. 훨씬 그 이전 예수께서 5천명에게 빵을 먹이시자 육적인 빵을 구하여 예수를 찾아온 자들에게 영적인 빵이요 생명의 빵인 예수를 믿으라고 이른바 "생명의 빵" 설교를 하신 것의 맨 끝부분이다. 여기에도 역시 성찬식 제정의 명령이 없다. 더구나 성서의 원본(텐스트)을 연구한 볼트만 같은 성서학자는 6 : 51b-58 전체가 후대에 교회계통 사람들이 추가로 써 넣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R. 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 SS. 174-7 참조). 요한의 신앙과도 전혀 맞지 않는 부분이라고 한다. 바레트(C.K. Barrett)는 써 넣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나 요한이 성찬에 비판적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pp. 281-301. 이상의 볼트만과 바레트 등 성서학자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임세영, "생명의 빵(2) : 성찬식 제정과의 관련성 문제," 노평구 주필, "聖書硏究(성서연구)' 438호 1993년 1-2월, 5-9쪽을 참조).
(IV) 예수의 의식제정 명령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는 바울 계통의 문서인 누가복음 22 : 14-20과 고린도전서 11 : 23-26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예수께서 의식으로서 성찬을 명령하셨다는 부분은 후대에 써 넣은 것이라는 견해와 아니라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성찬식에 대한 쉬랄터, 랑, 콘쩰만 등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한 것으로 최정일, "성찬식", '聖書硏究(성서연구)' 제 439호 1993년 3월, 13-17쪽을 참조).
구체적으로 누가복음의 경우 19절 후반부와 20절 전체가 없는 것이 누가의 원문(원래의 텍스트)인데, 후에 여러 사람들이 써 넣어 여러가지 다른 형태로 19절 후반부와 20절 전체를 전하는 사본(寫本)들이 생기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플럼머, 클로스터만, 크리드, 이스튼, 셰퍼, 차드윅, 리니 등), 그에 반대하는 주장이 있다(예레미아스, 쉬어만, 알란드, 스노드그라스 등). 우리말 개역성서로 본다면 19절의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내 몸이라"가 원래 누가가 쓴 것인데, "너희를 위하여 주는"(희랍어 원문으로는 "이것은 내 몸이라" 다음에 나오는 말이다)과 "너희가 이를 행하며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이하 20절 끝까지를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성찬의식을 합리화하기위해 써 넣었다, 아니다 하는 문제이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부터 카톨릭과 성공회를 포함한 거의 모든 교파가 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24년 만에 '새 영어 성서'(New English Bible)를 완간(1970년)했고, 이어 다시 개정 작업을 시작하여(1974년) 15년 만에 '개정판 영어 성서'(Revised English Bible)를 완간했는데(1989년), 이 두 영국 성서가 본문에서 성찬제정 명령인 19절 후반부와 20절 전체를 아예 빼 버린 것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카톨릭의 경우 성체성사(성찬식)의 근거를 스스로 제거해 버린 것인데, 스스로 오른눈과 오른손을 찍어서 내버린 것인가(마 5 : 29-30)?
(V) 요컨대 성서의 원본을 보면 예수께서 성찬의식을 제정하시고 계속지킬 것을 명령하셨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본(텍스트) 연구에서 이론적으로 누가복음과 고린도전서의 명령 부분이 후대에 써 넣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명령의 의미와 맥락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즉 성찬의식이 누가가 전한 복음, 바울이 전한 복음과 의미상 양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人子: 인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누가의 복음과 성찬과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 : 9-14)를 보라. 금식하고 십일조를 바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의식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 세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십자가에 달릴 정도로 죄를 지었지만 구원받아 예수와 함께 그날 당장 낙원에 들어간 죄수를 보라(눅 23 : 39-43). 그저 예수께 매달린 것뿐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뿐이다. 여기에 성찬 같은 의식이 구원의 요건으로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할례와 같은 의식을 부정하고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복음을 전한 바울이 "아니다. 잘못 말했다. 신앙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성찬 의식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복음을 배반할 리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으로 거듭나고, 거듭나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신앙'(갈 5 : 6)을 부르짖은 바울이 성찬 의식으로 거듭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고 성찬 의식을 강요할 수 없다.
구태여 또 생각해 본다면 바울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의 참뜻을 오해했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할례, 세례, 공동식사 등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것을 마치 바울이 세례를 만들고 성찬 의식을 전한 것으로 크게 오해한 견해가 고린도전서와 누가복음에 묻어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육체의 육적인 할례를 부정하고 영적인 할례를 주장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할례라고 한 바울은 물로 하는 육적인 세례를 부정하고 영적인 세례를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세례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성찬에 관한 언급 역시후에 추가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당시 고린도사람들이 예배와 관련해 식사하는 것에 대해 복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주거나 그 영적인 의미를 살리려는 노력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바울은 아직 젖을 먹는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잘못 믿고 있는 것을 단정적으로 거부하기보다--그렇게 하면 바울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울며 다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므로--우회적으로 설명하며 그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성찬과 관련한 주의사항 직후에 바울은 방언에 대하여 인내심을 갖고 자상하게 무려 3장에 걸쳐 주의사항을 주는 것에서도 그런 태도를 역력히 볼 수 있다(고전 12-14장). 바울은 일만마디 방언보다 다섯마디 이성적인 말이 더 좋다고 하며 사실상 방언이 쓸데 없는 것이라는 것을 완곡히 설명하고 그들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고전 14 : 19). 이러한 바울이 일부 몰지가한 신도들이 주님의 성찬이랍시고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 원래 성찬이란 것이 있다면 긍정적인 의미에 합당한가 돌이켜 보라. 오히려 그 영적 의미를 깨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잘 생각해 보라는 주의를 한 것으로 이해해야 바울의 신앙과 심정을 제대로 파악한 것일 것이다. 오히려 성찬을 권한 것으로 이해하면 바울의 신앙과는 너무도 맞지 않는다.

④ 의식이 성서에 쓰여 있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율법적으로, 죽은 문자로써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것이라는 것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의식으로서 세례와 성찬에 대한 성서의 근거가 없음을 (적어도 대단히 미약함을) 보았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복음과 세례, 성찬 같은 의식은 전혀 양립할 수 없음을 보았다. 이제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보자.
카톨릭은 "은총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일곱가지 성스러운 의식(七聖事: 칠성사)을 오늘날까지 지켜 오고 있다(R. 로울러 외 '그리스도의 가르침 : 가톨릭 성인 교리서, 292쪽).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이 공식 견해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카톨릭의 의식에 반대했다. 다섯가지 의식이 성서에 근거가 없는 거시라고 하며 버렸으나, 세례와 성찬은 근거가 있다고 하며 남겼다. 루터는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변하지는 않으나 예수가 실제로 임재하신다고 카톨릭에 가장 가까운 주장을 폈다(共在說: 공재설). 쯔빙글리는 단지 상징일 뿐이라고 하며 루터의 주장에 반대했다(상징설). 칼빈은 예수의 희생의 효과가 임한다고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 같은 주장을 했다(영적 임재설). 이래서 프로테스탄트(신교)에도 두가지 의식이 남아 대부분의 교파가 지켜 오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 같은 성서학자들이 성서원문에 대해 연구한 결과가 종교개혁 당시에도 있었다면 종교개혁자들이 세례와 성찬에 대해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요, 개혁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안타까운 일이다.
성서의 가르침에 철저히 따르고자 했던 루터는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만의 신앙을 높이 부르짖은 그가 왜 의식의 본질에 눈을 못 뜨고 의식의 덫에 걸렸는지 안타깝다. 최소한 쯔빙글리가 "이것은 내 몸이다"의 "이다"는 "~과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라 "~을 상징한다. 나타낸다"는 뜻이라고 한 것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빵이 실제로 예수의 몸이라면 예수는 실제로 동시에 포도나무요 양이요 문이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 모순 아닌가(오 15 : 1-11, 10 : 1-10)? 칼빈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며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의식이라는 상징은 없어져야 한다면서도 할례를 대신하는 세례와 성찬을 남긴 모순을 범했다(The Epistle to the Philippians,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Vol. 11, p. 269).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할례 같은 불완전한 의식으로 자신을 믿는 것이 안타까워 세례와 성찬 같은 더 완전하고 새로운 의식을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못박으셨을까?

(5) 기독교의 거룩한 일
① 원래 성사(Sacrament)란 3세기 이후부터 쓰이기 시작한 말인데, 희랍어 뮈스테리온(musterion)과 라틴어 사크라멘툼(Sacramentum)의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M.K. Hellwing, "Sacrament,"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Macmillan, 1987, Vol. 12, pp.500-11 참조). 근본적으로 뮈스테리온에는 신비스런 제례(祭禮)의 '신비(神秘)'의 관념이, 사크라멘툼에는 군인의 '맹세'의 관념이 있다. 어느 것이 예수의 복음과 일치하는가? 어느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일치하는가? 예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명백하게 인간 예수로 역사에 등장한 하나님의 뜻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했는가, 남 모르게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이방종교의 신비의식을 전파했는가? 예수는 인간이 맹세를 하고 척척 지킬 수 있는 존재라고 맹세를 권했는가, 금했는가(마 5 : 33-37)?
② 도대체 무엇이 성사(聖事)인가? 무엇이 거룩하고 성스러운(聖) 일(事)인가? 애초부터 죄밖에 없는 육(肉)인 인간에게는 성스럽고 거룩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영(靈)인 하나님에게만 있다. 하나님만이 성스럽고 거룩하시므로, 하나님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은 성스럽지 못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역사가 다 성스러운 일이요 성사다. 그러나 인간은 성스럽지 못하므로 성스러운 일이란 할 수 없다. 오히려 더럽히기만 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인간이 하는 일에 성스럽다는 표현을 붙이고자 한다면, 성스러운 하나님과 직접 이어진 일만이 성스럽다고 해야 한다. 또한 인간이 하는 일을 성스럽다 한다면, 성스러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는 일이란 모두가 다 성스럽다 해야 할 것이다. 왜 하필 의식만 성스럽다고 하는가? 믿음으로 하는 모든 것이 성스러운 것이다. 믿음으로 하는 사랑, 믿음으로 하는 일, 믿음으로 하느 싸움(신앙전투), 믿음으로 겪는 고난--모두 성스러운 것이다. 믿음으로 밥 먹고 물 마시고 믿음으로 땀 흘리고 일하고 믿음으로 성서 읽고 공부하고--결국 인간이 믿음으로 하는 것은 모두 성스러운 것이다, 성사이다. 왜 하필 의식만을 성스럽다 하며 애지중지 하는가? 그러기에 종교개혁후 프로테스탄트는 근본적으로 성스러운 것과 근본적으로 속된 것의 구별이 없이 출발했다. 만인사제주의(萬人司祭主義)로 출발했다. 누구나 다 사제요 신부요 제사장이라고 했다. 성스러운 성인(聖人)이 있고 성스럽지 못한 크리스천이 있다는 구별에 찬성 못 했다. 나중엔 다시 카톨릭을 따라가는 모순을 보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에 성스럽다 하는가? 그렇다면 왜 다른 명령은 성스럽지 않다 하는가?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왜 성사가 아니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일은 왜 성사가 아닌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요 가장 중요한 일인데, 그 가장 중요한 일은 왜 거룩하다 않고 그것을 의식과 형식으로 바꿔치고 그것을 성스럽게 지켰다 하는가(요 6 : 29)?
왜 기껏해야 상징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의식에 빠져 더 중요한 복음을 간과하는가? 왜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가(마 23 : 24)? 왜 하나님의 귀한 자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바로 앞에 차려 주신 영적인 복음의 잔치에서 감사하며 맛있고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가? 왜 더럽고 지저분한 개가 되어 "육적 의식이란 찌꺼기 즉 하나님의 식탁에서 떨어진 찌꺼기"를 게걸스럽게 허겁지겁 먹고 앉았는가(J.B. Lightfoot, Saint Paul's Epistle to the Philippians." p.144)?
④ 다른 신을 믿는 종교에도 있는 세례와 성찬 같은 의식이 유독 유일신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요 기독교의 필수적 요건이라고 그래도 믿고 싶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다만 철저히 평생동안 죽을 때까지 성사를 지켜 보라. 세례 한번으로는 거듭난 기쁨이 덜할지 모르니 두번 세번 천번 만번 받아 보라. 한끼 성찬 갖고는 모자랄지 모르니 매일 수천번 먹어보라. 유대주의의 엄숙한 가르침에 철저히 따랐고 교회주의의 성스런 명령에 철저히 순종했던 바울과 루터의 체험은 침묵할 것이다. 신비한 의식의 효과에 성서는 다시 써야 할 것이다. 혹시 보는 눈이 있다면 그토록 철저히 많은 의식을 준수한 유대교와 카톨릭의 역사를 보라. 강도의 소굴로 변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보라. 깨끗한 돈만을 긁어 모아야 했던 베드로 성당을 보라. 세례로 거듭나고 성찬으로 예수의 피와 살을 먹고 산 거룩한 교황을 보라. 그로부터 영생 아닌 죽음의 독배를 받은 자들을 보라. 평생 독신인 그의 사생아들을 보라. 성직매매로 게트림하는 성직자의 불뚝한 배를 보라. 수녀원에서 죽은 유아들의 해골무덤이 부르짖는 기쁨을 들으라! 돈으로 천당에 들어가 믿음에 의한 구원 아닌 면죄부에 의한 구원을 노래하고 있을 영혼들의 우렁찬 찬송가에 귀를 기울이라! 동시에 성서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잘못 않는 '무류(無謬)의' 종교재판으로 화형을 당한 사람의 탄식도 들어보라.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듯이 절대 의식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을 다시금 체험하라.
⑤ 의식이란 것은 절대적이 아니라는 견해도 들을 수 있다. 또 의식이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의식이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니 상관 없다는 너그러운 입장이다. 그러나 난 반대다. 의식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왜냐? 영과 진리로 예배라하는 예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요 4 : 24). 하나님의 영으로써 예배하라는 바울의 말에 아멘하기 때문이다(빌 3 : 3). 예수만이 자랑거리가 되어야지 다른 어떤 것이라도 예수의 자리를 차지하게 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만 빛나도록 해야 하고, 다른 어떤 것도 십자가를 가리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이라는 육을 신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 된 예배란 무엇이냐에 관련된 문제이다. 더 나아가기 전에 유대주의와 교회주의의 의식을 배제하는 바울의 영적 기독교를 요약한 송두용의 외침을 들어보자(송두용, "기독교는 무엇인가," '聖書朝鮮(성서조선)' 제 127호 1939년 8월 9-10쪽. '신앙만의 신앙' 13-14쪽).
기독교는 의식이 아니다. 사람은 종교라면 벌써 의식을 연상한다. 그만큼 종교는 의식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기독교라면 우선 세례나 성찬 등의 의식을 생각함은 무리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례나 성찬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하여는 소위 기독신자 중에도 종종 오해하는 이가 있다. 특히 진실한 독신자 중에도 있음은 가탄가탄(可歎可歎)이다······
만약 종교가 의식이라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할 수 있다. 또 만약 기독교가 종교라면 의식과는 가장 인연이 먼 종교라 할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에 와서, 세상에는 비로소 의식 없는 종교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냐?


바울과 송두용( by M. K. CHANG),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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