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Social Fairness

바울과 송두용( CHANG)
2007.09.08 00:37

바울과 송두용[3-1] - 장 문 강

조회 수 848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3-1]

바울과 송두용
- 두 스승과 한 신앙 -
1993. 4. 11 제7회 송두용 선생 기념회에서 말씀한 것에 가필한 것

장   문   강


1. 한국 기독교의 두 스승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던 바이런의 일생은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자신의 죄를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을 깨달은 자의 삶은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산다면 죄 때문에 영원한 파멸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담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인생의 방향을 180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탕자처럼 일어나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눅 15:11-32). 아버지께서는 나를 기꺼이 받아 주셨다. 예수는 단순히 나를 돕는 친구에서 나의 '구원의 주'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나 같은 죄인도 단지 믿음만으로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놓치면 안 되었다. 놓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더 깊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에 "믿기만 하라"며 성서를 가르쳐 주셨던 송두용 선생님이 생각났다. 장봉의 푸른학원으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여전히 '신앙만의 신앙'의 외길을 걷고 계시는 송 선생님은 과연 나의 영의 아버지요 큰 스승이었다. 그날밤 고요한 가운데 밝은 달과 함께 찬연히 빛나던 샛별은 어둠 속을 비추는 진리의 등불이자 축복의 상징이었다. 나는 어둠의 죄악을 청산하고 신앙의 걸음마를 시작하였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되었다. 성서의 말씀은 달았다. 송 선생님의 신앙증거와 노평구 선생님의 성서강의가 맛이 있었다. '김교신 전집' '성서연구' '성서신애'가 눈을 뜨게 하였다. 모세와 엘리야, 바울과 요한의 외침이 들려왔다. 단테와 밀튼, 파스칼과 키에르케고르, 희랍어와 히브리어·······, 정확히 20년 전의 일이다.
돌이켜 보면 여전히 부족한 죄인이요 스승을 욕되게 하는 제자이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 이제 막연히 배우기만 할 수는 없는 나이가 되었다. 인생의 숙제를 해야 되는 때가 온 것이다. 마침내 이진구 선생님께서는 '송두용 선생 기념회'에서 말씀을 하라고 하셨다. 젊은 사람도 공부한 것을 발표하라고 하시는데, 거역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기회에 선생님의 신앙을 다시금 '정리'해 보자는 욕심도 생겼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선생님을 모르는 것이었다. 제자가 스승을 모른다? 자식이 아버지를 모른다? 참으로 어이없고 참담한 일이었다.
두 달 남짓 짓눌렸다. 기념회는 다가오는데 도대체 무엇을 발표해야 하나? 머리를 짜 봐도 모르겠고 고심을 해도 알 수 없었다. 나의 불신과 게으름을 탓해도 어쩔 수 없었고 공연히 발표한다고 했다고 후회해도 별 도리 없었다. 날짜만 닥쳐 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바울의 빌립보서 3장이 생각났다. 2절부터 11절. 바울의 유대주의에 대한 경고(2-4절), 불신시대의 바울(5-7절), 신앙의 바울(8-10절), 앞으로의 희망(11절), 바울이 빌립보 집회의 신자들에게 유대주의자들의 의식주의, 형식주의, 율법주의를 경계하라고 하면서, 올바른 복음, 올바른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다. 이것은 바울의 신앙과 생애의 요약이요 정수(精髓)였다. 또한 동시에---송두용의 신앙과 생애를 간추린 것이요 그 뼈대였다. 이 이상 송두용을 잘 설명하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울이 송두용의 신앙과 생애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송두용이 바울의 신앙과 생애를 백퍼센트 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바울과 송두용, 이 두 스승은 같은 신앙으로 같은 길을 걸으신 것인데, 그것을 따로 놓고 생각했으니 문제가 풀릴리 만무하였다. 바울의 신앙만의 신앙을 깊이 이해하고 그대로 따랐던 송두용은 바울의 신앙을 이해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요, 바울은 송두용의 무교회 신앙을 이해함으로써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문제가 풀려 '하나님의 종에 관한 말씀이요 하나님 자신의 진리에 대한 발표이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시오'하며 부족한 대로 기념회 발표의 숙제를 끝냈다. 그런데 또 그게 아니었다. 숙제발표의 긴장된 땀이 식기도 전에 이진구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거 원고로 해서 줘." 산 넘어 태산이었다. 더구나 몇 몇 분들의 격려는 차라리 채찍이요 차꼬였다.

"웬 넋두리가 이렇게 기냐, 별 얘기도 못할 녀석이" 하고 나무랄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못난 놈이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별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관한 이야기이다. 진리에 대한 말씀이다.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송두용이라는 두 일꾼을 한국 기독교에 보내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떤 역사를 하시는가 살펴 보자는 것이다. 더구나 송두용이 김교신(金敎信)과 함께 믿었던 '무교회(無敎會) 신앙' 하면, 아직도 뭔가 꺼림칙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고 이단이라고 몰아치는 분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일제말의 시련을 극복하는 꽃다운 신앙의 향기를 영원히 우리 민족교회사에 남겼다"(閔庚培: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개정판 365쪽)며 앞으로 한국 기독교가 나아갈 길은 무교회밖에 없다고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 또한 "무교회가 빨리 커가야 한국교회도 훌륭하게 될 수 있다"(김우현 목사의 말씀, 노평구 "김우현 목사님과 무교회" '두산 김우현 목사: 그 신앙과 사상' 전택부 편저 332쪽)는 견해에 아멘하는 분들도 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야 할 일이요, 인간은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신 앞에 선 단독자(單獨者)'로서 고개를 숙이고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경고대로 이미 시대의 집단 병리 현상이 되어 버린 구경꾼이나 군중이나 교회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본다면 오히려 거쳐 넘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Perry Lefevre, Man: Six Modern Interpretations, '現代(현대)의 人間(인간)이해' 이종성역, 75-79쪽 참조). 그러기에 부족한 이 글을 쓰게 되기까지 나 나름대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은 일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기념회에서처럼 빌립보서 3장 2-3절을 중심으로 해서 위의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성서구절에 나타난 바울의 신앙을 고찰하고 송두용의 신앙과의 일치점을 보며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보고자 한다. 2절에서 복음을 위한 두 스승의 싸움을 생각하고, 3절에서 할례·성찬·세례 등 의식과 구원 내지 복음의 문제, '하나님의 영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와 참된 교회의 문제, 영적 기독교의 본질을 살펴 본 후, 결론을 맺어 본다.
인용되는 성서 본문은 원문에 따라 주로 그 의미를 명확히 하려는 글쓴이의 개인번역이다. 송 선생님에 대한 경칭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미 역사적 인물이 되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겉치레와 모든 육적(肉的)인 것을 거부했던 참된 크리스천에게 어울리는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은 스승일 수 있으나 송두용은 아직 모르겠다는 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는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인으로서 민족의 스승을 스승으로 못 모시는 분들을 위하여, '만나야 할 사람'을 아직 못 만난 분들을 위하여, 진리에 갈급하되 아직 참된 진리를 못 찾은 분들을 위하여, 참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목마른 분들을 위하여, 부족한 글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친다.


2. 복음을 위한 싸움

송두용은 '聖書硏究(성서연구)'주필인 노평구 선생님이 주최하는 새해와 여름의 합숙 성서집회에 참석하여 노 선생님과 자주 '싸움'을 하였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아주 재미가 있어서 은근히 싸움이 안 붙나 하고 기대도 하고, 어떤 이들은 아예 싸움을 붙여 보려고도 했다 한다. '연로하신 두 어른이 싸우시다니 점잖지 못한 일이다. 더구나 그걸 재미있어 하다니 고얀 놈들이다.' 하실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두 분의 '싸움'은 세상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감정다툼이나 이해대립 또는 교파싸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진리를 위한, 복음을 위한 싸움이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무엇이 진리냐, 복음이란 무엇이냐를 밝히기 위해 하는 싸움이었다. 싸움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토론이요 논쟁이었다. 무엇보다도 두 분의 상호 신뢰와 사랑에 기초했기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격렬한 신앙의 '싸움'이 끝난 후에는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사랑의 코이노니아(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진리를 위한 싸움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많은 싸움과 대결을 본다. 하나님의 종과 바알의 종과의 대결,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싸움,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므로, 먹느냐 먹히느냐 식으로 처절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리와 거짓이, 빛과 어둠이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예언자 엘리야가 홀로 오직 야하웨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서서 수많은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을 하고, 그 거짓 예언자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죽여 버리는 무서운 이야기는 우리의 피와 살을 뚫고 뼈를 꺾는다.

엘리야처럼 바울도 전 세계를 향해서 오직 복음 하나만을 들고 야하웨 하나님 앞에서 싸웠다. 이러한 싸움의 한 끝이 빌립보서 3장에 전개되고 있다. 이때 바울과 싸우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유대교 신자들이었는가 또는 유대주의적 크리스천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대립이 있다. 유대교 신자들이었다면, 하나님을 믿으려면 구약에 쓰여있는 대로 율법을 지키고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유대주의적 크리스천이었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갖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약성서에 쓰여있는 대로 율법을 지키고 의식을 행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었느냐 하는 신학상의 논쟁에 우리가 뛰어들어 발목을 잡혀 신앙을 못 배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의식주의·형식주의·율법주의를 고집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이라 하기로 하고 논의를 계속한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의 복음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고 복음을 전하는 데 대해(빌 3 : 9 참조), 전혀 그럴 수 없다고 펄쩍 뛰며 성서를 보라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유대주의자들이 빌립보 집회에도 나타나, 바울이 전한 복음을 뿌리째 뽑으려는 위험천만한 사태를 맞아 격분한 바울은 빌립보의 크리스천들에게 신랄한 경계의 말씀으로써 3장을 시작한다. 신앙 안에서 얻는 참된 기쁨을 전하는 빌립보서의 잔잔한 흐름에 때 아닌 격랑이 인 것이다. 맑던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는 것이다.(말투가 너무 급변하여, 두개의 편지가 하나의 빌립보서로 편집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경계하라, 저 개들을.
경계하라, 저 악한 일꾼들을.
경계하라, 저 짜른 자들을(내시들을). (2절)
저 '개들', '악한 일꾼들', '짜른 자들'(내시들)이라니? "점잖은 바울이 진리를 전하면서 점잖지 못하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나?" --- 의심이 갈 수 있다. 특히 우리 동양에서는 점잖은 것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 같다.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보다 군자처럼 조용하고 점잖게 형식적 예절을 지켜 가면서 말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말로는 진리가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형식적 예절에 매달리는 경우도 많이 본다. 이런 현상은 이른바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듯하다. 거의 체질적으로 점잖지 못한 것은 참지 못하는 '점잖고 예절 바른 백성'인가?
그러나 바울은 '점잖고 예절 바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선배인 대사도 베드로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면책(面責)한 자였다(갈 2:11-14 참조). 송두용의 "기독교의 본질"('信仰(신앙)만의 信仰' 29 54쪽)이란 긴 글을 보면, 오히려 그 사건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읽어 내고 있다. 바울은 왜 점잖지 못하고 무례하게 자기의 선배-베드로의 잘못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면책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여기에 진리가 있다. 기독교의 본질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송두용의 복음 이해는 바울의 복음 이해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토록 심한 말을 하며 격분하는가? 자기 감정이 상해서, 자기 이익에 해가 와서, 자기 명예에 손상이 가서, 뭔가 자기 뜻대로 안 돼서 격분하는가? 아니면, 헌금이 적게 들어와서, 교회당이 작아서, 신도가 줄어들어서? 아니면 예수 믿는다며 교회에 안 나오며 세례·성찬에 무관심한 자가 있어서? 아니다. 아니었다. 바울은 그러한 인간적이고 사적인 분노에 몸을 떠는 자가 아니었다. 바울은 '진리를 위한, 복음을 위한 공적인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노평구 '기쁨의 빌립보서' 340쪽). 바울은 그의 복음에 반대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단순하고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격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단지 할례를 받느냐 마느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진리냐 거짓이냐, 기독교의 복음이 사느냐 죽느냐, 기독교가 복음 위에 서느냐 의식 때문에 쓰러지느냐,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뜻이 이 땅 위에 구원의 기쁜 소식(즉 복음)으로 전파되느냐 아니면 또 하나의 질곡과 차꼬로 변질되느냐 하는 너무나도 중차대한 문제이기에 신랄한 비판으로 경계를 촉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개'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들이라고, 또는 야하웨의 율법을 모르는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이방인(외국인)들에게 썼던 말이다. 이제 바울은 그 치욕적인 말을 유대주의자들에게 돌려 보내고 있다(Gerhard Friedrich,
Der Brief an die Philipper, in Das Neue Testament Deutsch, Band 6, s. 160). 또한 저 '악한 일꾼들'을 경계하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분노의 구체적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일꾼'이란 전도자를 의미한다. 원래 유대인 전도자들은 "스스로를 '선한 일꾼들'(칼루스 에르가타스 [외국어 표기 생략])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많은 죄인들을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자부하기에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오히려 '악한 일꾼들'(카쿠스 에르가타스 [외국어 표기 생략])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다닌다고 하지만, 선한 일꾼이 아니라 악한 일꾼이요, 계속적인 경계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해서도 아니었고, 그들에게 인간적인 열심이 부족해서도 아니었고, 그들의 의도가 전적으로 나빠서도 아니었다. (G. B. Caird의 견해를 G.F. Hawthorne, Philipp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3, p.127에서 참조). 그것은 그들이 전한다는 말씀이, 메시지가, 그들이 전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도리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있다. 막고 있다. 오히려 복음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갖고는 안 된다. 봐라, 성서에 쓰여 있지 않으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의식을 지켜야 한다.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것이 왜 잘못이냐? 할례든 의식이든 율법이든 선행이든 모두가 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나 이러이러한 훌륭한 일 했소"하며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다.(눅 18:11~12)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의 즉 믿음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빌 3 : 9)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교만이다. 죄악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고 섬기는 우상종교이다. 너무나 무서운 죄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설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면서"(마 23 : 15)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할지라도 '진리를 위한, 복음을 위한 공적인 분노'를 폭발시키는 '악한 일꾼'이요, '개'였던 것이다.

바울은 덧붙인다. '저 짜른 자들'을 경계하라고. 우리 개역성서에 '손할례당(損割禮黨)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카타토메([외국어 표기 생략])'란 말은 원래 '할례'를 의미하는 '페리토메([외국어 표기 생략])'를 가지고 바울이 만든 모욕적인 말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고집하는 할례는 올바른 의미의 할례가 아니다. 영적인 의미가 빠진 할례는 짜르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은 '할례자'(페리토메)가 아니라 '짜른자들'(카타토메), '내시들'에 불과하다. 그렇게 할례가 중요하다면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아주 짤라 버리라고 해!"(갈 5 : 12)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계 3 : 15) 세대는 "그까짓 할례, 성서에도 나와 있는 데 좀 받지, 뭘 그렇게 성을 내고 그러나"하며 바울은 소견이 좁다고 나무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할례와 같은 의식의 문제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복음의 생사가 관련된 문제로서 기독교사에서 항상 제기되어 왔다. 초대 기독교에서도 이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회의를 했다. 천만 다행으로 바울의 '신앙만의 신앙'으로 해결이 되었다(행 15 : 1-32). 종교개혁 시대에도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이 문제로 대립되었다. 루터·칼빈·쯔빙글리의 견해도 각각 달랐다. 오늘날은 어떤가? 큰 문제이다. 다음 3절을 공부할 때에 자세히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이토록 격렬히 복음을 위해 싸웠던 바울의 외침이 잠자던 우리의 영혼을 깨울 때, 그의 진리를 위한 일생의 숨결이 우리의 뺨에 닿을 때, 우리는 송두용의 외침과 숨결을 기억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앙과 복음적인 진리 일변도로 철저히 80평생을 사신 "송두용의 생애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노평구, '고별사", "신앙만의 생애").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 믿고 '복' 받는다 하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복'을 주지 않을 수 있느냐 하면서, 하나님께 세상의 '복'을 '요구'한다. 그러나 송두용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였다(마 6 : 33).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므로 그 하나님의 일에 평생을 바쳤다(요 6 : 29). 그러므로 하나님께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였다. 나 같은 죄인도 구해 주신 은혜의 복음에 너무나 감사해서 '순종'하며 살다보니, 은혜에 의해서 가난하게 된 '은빈(恩貧)'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송두용, "믿는 자의 가난", '성서인생' 1955. 6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송두용은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들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른바 크리스천을 포함한 세상사람들이 그렇게 안달하는 재산이나 돈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며 복음을 전하다 보니 그 많던 재산을 다 남에게 주게 되고 자신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남들은 예수 믿도 복받는데, '송두용은 예수 믿고 가난뱅이가 되었는데 은혜라니! 말년에는 집 한 칸, 변변한 옷가지 하나 없었다. 그러나 예수가 말씀한 진정한 복, 하나님의 복은 '가난한 자'인 송두용에게 있었다(눅 6 : 20). 세상사람들에게는, 또한 세상의 복을 추구하는 엉터리 크리스천에게는 없는 복이 송두용에게는 있었다. 참된 크리스천이 아니면,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는 크리스천이 아니면 이해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복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송두용이 격분하는 때가 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심한 꾸중을 하는가 하면 세상에 대해서도 사자후를 토할 때가 있었다.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복음을 오해하고 복음에 반역할 때에는 '복음을 위한 공적인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송두용의 신앙생애는 바울의 생애와 같이 복음을 위한 싸움으로 관철되었다. 바울이 유대주의·의식주의·율법주의와 홀로 복음 하나만을 들고 하나님 앞에서 싸운 것처럼, 송두용은 교회주의·의식주의·도덕주의와 홀로 복음 하나만을 들고 하나님 앞에서 싸운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바울의 싸움, 송두용의 싸움이 있는가? 복음을 위한 싸움, 진리를 위한 전투가 있는가? 크리스천이 복음 안에서 살고 있다면, 교회가 복음 위에 서 있다면, 복음의 적과의 싸움은 불가피한 것 아닌가? 원수가 미워서가 아니라 원수를 복음 안에서 살리기 위해, 원수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복음을 위한 싸움은 더욱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 아닌가? 바울의 제자들에게, 송두용의 (영적) 식구들에게 이러한 싸움이 있는가 없는가?
만일 그러한 싸움이 없는 크리스천이 있고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인간의 눈에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이미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부터, 그가 그토록 결사적으로 전한 복음으로부터 떠난 것이 아닌가? 바울이 전한 복음 아닌 '다른 복음'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갈 1 : 6-10)? 이미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눅 14 : 25, 마 5 : 13) 하나님의 제사장이어야 할 크리스천이 세상과 적당히 손을 잡고 바알의 제사장과 같은 제단에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며 살을 섞고 같은 꿈을 꾸는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 아닌가?
긴 말이 필요없다. 신자 천만명을 자랑하는 한국 기독교는 바울이 경계하라고 한 개들, 악한 일꾼들, 짜른 자들을 잘 경계하며 바울의 복음 위에 서 있는가? 유대주의자들, 의식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과 잘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과 야합하고 있는가? 아니면 '개'요 '악한 일꾼'이요 '짜른 자'가 되어 버렸는가? 성서를 펴 놓고, 마음 깊은 곳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單獨者)로서 회개할 일이다.


바울과 송두용( by M. K. CHANG), 외

바울과 송두용(by M. K. CHANG)과 그외 기타 글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조회 수
11 그외 글들 무교회 신자의 비사회성에 대한 비난에 대해-노평구 2009.01.01 7724
10 그외 글들 루터와 김교신의 "하나님"과 "신앙" - 장문강 file 2009.01.01 9296
9 그외 글들 하늘에 국적을 둔 자 - 다까하시 ·사부로[高橋三郞] 2007.09.22 7989
8 그외 글들 하나님 나라의 도래 - 다까하시 ·사부로[高橋三郞] 2007.09.22 7040
7 그외 글들 시냇가에 옮겨진 나무 - 다까하시 ·사부로[高橋三郞] 2007.09.22 7493
6 그외 글들 성례권(聖禮權)의 개방(開放)을 논(論)함 - 유 원 상(劉 源 相) 2007.09.22 6718
5 그외 글들 찌든 빨래의 눈물과 은혜의 길 2007.09.08 8420
4 관리자 추천글 하나 키에르케고르의 인생 3단계론과 우리의 신앙 1 2007.09.08 10426
3 바울과 송두용( CHANG) 바울과 송두용[3-3] - 장 문 강 2007.09.08 7474
2 바울과 송두용( CHANG) 바울과 송두용[3-2] - 장 문 강 2007.09.08 8059
» 바울과 송두용( CHANG) 바울과 송두용[3-1] - 장 문 강 2007.09.08 8481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allbaro.net since 2007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