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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20:59

한국의 무교회-유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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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이 전] [다 음]


한국 무교회

유 희 세           

처음에
나는 일본 기독교 쌍서(雙書) '무교회사II''계승의 시대' 중의 '한국 관계'를 쓰도록 부탁을 받았다. 그렇다. 한국에 한국 무교회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기독교 쌍서 항목에 편입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교회사I'의 머리말에 "무교회란 우치무라에 의해 창시된 복음적 기독교의 일본적 전개이고"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만일 이것이 진리라면 이 일본적 전개라는 영역 속에 한국 관계가 포함될 여지는 없다.

루터가 발견한 복음이 순식간에 전 유럽에 퍼지고 세계사의 방향을 바꿔 버렸는데, 그것은 복음적 기독교의 독일적 전개이었을까. 누구나 다 알거니와, 그의 복음은 그의 탑(塔)의 경험에 근원을 갖는다. 그것은 독일적인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서의 바울의 신음을 추체험(追體驗)한 것이 아닐는지. 우리는 '구안록'의 마무리 말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밤 어둠 속에서 우는아기, 빛이 그리워 우는 아기, 우는 것밖에 할 말이 없는(데니슨 "인메모리엄") -- 우치무라에 의한 바울에의, 루터에의 강렬한 추체험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우치무라의 창시도 아니고, 일본적 전개도 아니다. 훨씬 그것들 이상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김교신의 복음과 같은 거이다.

그러므로 나의 바람은 이 '무교회사'는 다만 '일본 무교회사'이었으면 한다. '일본적 전개'가 그대로 무교회라면 한국에는 그런 것은 없으며 또 일본을 빼고는 세계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일본 무교회사의 제2기, 계승의 시대 -- 우치무라 사후에서 '45년 패전까지'는 그대로 한국 무교회사에 있어서 제1기, 생성의 시대에 해당된다. 이 시대에 한국 무교회의 지도자의 한 사람이며 그 이후 사실상 무교회를 떠난 함석헌은 전에 이렇게 말했다. "우치무라를 알게 된 것은 일본 침략 반세기를 보상할 수 있다." 더욱 그는 어느 무교회 잡지에 대해서 "일본적이란 말이 귀에 거슬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교신은 이 일본적이란 것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결코 거기에 흡수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한국 무교회를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그의 '성서조선' 창간사('27. 7.) 중에 다음 1절이 있다. "무어라 해도 나는 조선사람이다. '성서조선'아, 너는 조선 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로 가라"고.

그러면 '일본적'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우치무라의 '첫 꿈'은 분명히 무교회의 세계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은혜의 이슬'은 땅 끝까지 이르는 무교회와 동일하게 여겨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북으로 서로 동으로 뻗어 가는 은혜의 이슬은 과연 '일본적 전개'를 거친 것인가, 어떤가? 그것은 아무래도 좋겠지만 먼저 말한 함석헌에 있어서와 같이 거절 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변질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일본의 침략에서 해방되었을 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었던 것이다. "데라우치[寺內(사내)] 총독은 죽었지만 우치무라[內村(내촌)] 총독은 문서를 통해, 한국 우치무라 당을 통해서 한국 교회에 군림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우치무라의 문장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무사도는 일본 최선의 산물이다·······. 무사도의 대목(臺木)에 기독교를 접붙인 것, 그것은 세계 최선의 산물이고 이것에 일본만 아니라 전세계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세계는 필경 기독교에 의해서 구원될 것이다. 게다가 무사도 위에 접목된 기독교에 의해서 구원될 것이다."('15. 1.)
이 문장에 의하면 1907년 1월의 '첫 꿈'에 있어서의 '은혜의 이슬'이란 무사도에 접목된 기독교라는 것이 된다. 이 접목의 비유는 로마서 11장에서의 비유와는 반대가 된다. 성서에서는 성스러운 대목에 야생의 올리브를 접목하게 되어있는데, 우치무라는 야생의 올리브인 일본 무사도에 성스러운 대목을 접붙이는 것으로 들린다. '은혜의 이슬'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우치무라의 복음'의 우치무라에 의한 오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김교신이 우치무라에게서 배워서 우리들에게 전한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치무라의 오해라고 생각하는 나의 판단이 오해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우치무라의오해는 그가 일본사람이라는 한계(예를 들면 '2개의 J') 때문이고, 그 오해에 대해 일본의 무교회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일본의 여러분이 일본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5장이 전하는 예루살렘 회의는 복음적 기독교의 유대인에 의한 유대적 전개가 유대적 오해를 부르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경계하는 것이 아닐는지, 만일 그렇다면 한국의 무교회는 무교회의 세계성을 파악하고 전개시키기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한국 무교회의 생성의 시대사를 보려 한다.

1. 진리의 진전
한국 무교회사는 1930년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1920년대에 동경 유학의 조선인 학생 중에 전후해서 우치무라의 주일 집회에 출석한 자 6인조가 1927년 7월 '성서조선'이란 전도잡지를 발행하고, 소위무교회 전도를 시작했다. 그것은 월간이 아니었고 김교신의 주필도 아니었다. 1930년 3월에는 제15호까지 나오고 폐간의 위기에 처했었다. 소위 무교회 전도의 워밍업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30년 5월 제16호부터 김교신 주필이 되고, 그 3월 하순에 우치무라가 소천하셨다. 그 7월에는 조선 장로회 평양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에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공격하는 논문이 실렸다. 당시 평양은 조선에서의 개신교의 '메카'였다. 그 공격의 요점은 둘로, 하나는 우에무라[植村正久(식촌정구)]의 무교회 공격 '영계의 난신 적자'와 같은 취지로 '영계의 아나키즘'이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일본적'이므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김교신의 논박은 그 해 8월에 발표되었는데, 그는 우치무라의제자로 불리우는 것을 자랑하고, 무교회와 일본적인 것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우치무라 간조가 무엇이 아니더라도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인 것만은 처음부터 나는 알았다. 일본의 애국자로서 일본을 열애하게 하라, 미움이 생길 리 없고 거기에는 가장 아름다운 미(美)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애국자가 일본의 잃어버린 양을 찾고자 심혈을 기울이는 집회장에 외방 사람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송구하고 너무나 엄숙한 일이었다. 당시에 나의 감상은 '성서지연구' 제268호('22. 2.) 48쪽에 24일 일기에 기재되어 있다. 나도 그 누구처럼 '불구대천'의 철심을 품고 동해를 건넜던 자다······.
김교신은 우치무라의 복음이 일본적인 것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지 않을뿐더러 거기에 훌륭한 미(美)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조선'에의 엠비션(옮긴 이: Ambition인 듯)에 가슴을 설레이었던 것이다. 김교신은 무교회의 일본적 측면을 무교회 자체와 혼동할 염려가 있을 경우에는 용어에 신중을 기했던 것 같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10년에 걸쳐 우치무라 선생에게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었다. '성서'였다. '복음'이었다. 가령 우치무라 선생 심중에 무교회주의라는 것을 건설 고취하려는 생각이 있었다하더라도 내가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다. 성서의 진리였다."('36. 9.)
그는 자시의 신앙 형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반성한다.
"나는 우치무라 간조 선생에 의해 신앙의 골격이 세워졌고 쓰카모토 선생에 의해 성서의 학문적 연구의 실마리를 찾은 것인데, 거기에 아사노[淺野猶三郞(천야유삼랑)] 선생의 조선사람 한사람 한사람 상대의 강의와 하숙집을 돌면서 하는 전도에 실제 접하며 전도자의 인내와 신종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예전에 실망 낙담해 버렸을 것이다."
1940년 5월 우치무라 선생 10주년 기념에 그는 '우치무라 간조 선생'이란 글을 썼는데 (1) '우인 관계'에서는 교회의 원로 고(故) 김정식의 말을 인용해서 "우치무라 선생은 많은 조선 기독교도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조선 기독교회의 은인이었다.'라고 말하고 (2) '독자 관계'에 있어서는 '특히 무교회주의와는 많이 거리가 멀어 보이는 조선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의 지도자 중에서까지도 우치무라 선생의 잡지 및 전집 등이 깊이 음미되고 있는 사실이 분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했으며, (3) '제자 관계'를 말하고, 마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컨대 현대 일본에 있어서 가장 놀랄 만한 힘은 우치무라 선생을 통해서 전해진 신앙과 사상이다라고, 우리는 본다. 마치 지대(地帶) 구조상 남만(南灣), 북만(北灣)의 양 산계(山系) 위에 일본 열도가 성립되어 있는 것같이 일본 혼의 저변을 관통하는 척추가 되는 것은 이 신앙 사상이다.우리도 이 신앙에 대해 태백, 소백산맥과 같이 반도가 의지해 서야 할 영적 척추로삼고자 한다······."
김교신의 이 발언은 참으로 우치무라의오해를 수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교신에게 그와 같은 자각은 없었을지 모른나, 사실은 그렇게 되어있지 않은가? 우치무라를 통해서 전해진 신앙과 사상은 일본 혼의 밑바탕을 관통하는 '척추'이고, 한국이 의지하여 서야 할 척추라고 하는 것은 우치무라의 접목법이 아니고 성서의 접목법이다. 이것은 한국 무교회의 생성기에 있어서 위대한 발견이며,진리의 진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교신은 한국전도 중간에 이 진리를 발견하고, 1940년 5월의 상기 논문에서이 진리에 서서, 일본의 무교회를 재해석한 것이다.

김교신이 "영원한 의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고 말할 때('35. 4.) '성서 위에' 중 '성서'란 '우치무라 선생을 통해서 저해진 신앙과 사상'과 동일, 그리스도와 동일하고 로마서 11장 16절의 '거룩한 뿌리(대목)'와 동일하다. 접목될 야생 올리브는 일본이며, 조선이고, 땅 끝까지 이르는 세상의 나라들이다. 우치무라의 '첫 꿈'은 '이 세상의 왕국은 변화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었다'라고 끝맺는다. 그러므로 '조선의 성서화'란 조선의그리스도 왕국회의 이상이고, 조선과 성서의 동일시이고, 조선과 그리스도 왕국의 동일시이다.

한국 교회사 학자 민경배 교수는 '한국 민족교회 형성사론'(연세대학출판부 '74년) 중에서 '한국교회 종파의 계보'라는 장을 설정하고 그 중에 '무교회주의의 종파'라는 항에 '김교신의 성서연구회'라는 절이 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김교신이 우치무라 간조 문하에 들어간 것은 1920년이었다. 당시 우치무라는 반군국적인 진실한 기독자였으며 그의 참으로 열정적인 애국심의 충성은 김교신에게도 '성서를 통해서의 조선의 구원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적 기독교신앙을 일깨운 것이다.

2) 김교신은 애국을 천박한 정치적 차원에서 여과해서 순 영적인 민족 구원의 확신으로 이끌어 간 것이다. 이 백성에의 최애의 표시의 양식으로서 가장 귀하고, 가장 절실한 선물 구신약성서 한 권을 주기 위하여 1927년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동지 6인이었다.

3) 여기에 그들의 순정과 백성에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1939년 말 한국 교회가 일제의 탄압을 피하지 못하고 모두 이질화의 길을 걸을 때 김교신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 그리하여 천 명은 왼쪽에 만 명은 오른쪽에 쓰러져 갈 때에 본지는 시종일관 주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라고. 일본 경찰도 "성서조선의 일당이야말로 경솔하게 결사를 하려는 정도의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이상으로 조선 민족 백 년, 아니 오백 년 후를 계획하는 최악질의 자들이다."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김교신으로 살았으며, 1945년 4월 흥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4) 그를 기구적(機構的)인 의미에서 교회에 반대하는 무교회주의자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은 1937년 이후이다. 그의 이와같은 입장의 근거가 세 가지 있다. ① 구원은 교회 소속여하의 문제가 아니고 신앙 문제라고 보고, 루터적 의미에서의 교회 혁명 이상의 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 ② 선교의 요청으로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는 교회의 안팎을 불문하고 힘을 합하여 싸워야 할 시대가 되었다는 자각. ③ 한국의 기독자로서기성교회의 교우들과의 혈연 의식이다.
5) 그는 기독교로써 민족의 종교를 확립시키려 하였고, 교회 밖에 대한 선교와 구원 방편의 소재가 광활하게 편재함을 역설했지만, 독립교회나 종파의 의식적인 형성을 멀리 피해온 것은 사실이다.
6) 그는 1930년부터 서울에서 성서연구회를 개최하고, 매년 1주일간에 걸쳐 동계집회와 함께 이후 10년간 계속했다.
그러면, '성서조선' 창간에서 종간에 이르는 158호에 담긴 신앙과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나? '무교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한 문장 속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 문제는 본지 그 동안 매호에서 논한 바이고 앞으로 종간호까지 논할 제목이다. 그러나 실은 본지 전체가 차례에서 광고란에 이르기까지 무교회 신앙의 덩어리임을 알아차려야 한다."('36. 3.)

동인 6인중 3인은 얼마 뒤에 탈락하고, 종간까지 이른 사람들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3인이었다. 기미교신은 동경고등사범 졸업 ; 지리박물 전공이고,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 졸업 ; 윤리 역사 전공, 송두용은 동경농대 중퇴이다.

김교신의 최대 업적은 당연히 성서연구 그것이다. 1931년 1월부터 1932년 2월까지 13회에 걸쳐 산상수훈 연구를 완성했다. 이것은 한국 교회사가 낳은 유일한 세계적 명저라고 어떤 이는 말한다. 1932년 3월에서 1937년 9월까지 29회에 걸친 구약성서 개요를 완성했다. 1938년 2월에서 1941년 6월까지 14회에 걸쳐 골로새서 강의 완결. 1941년 7월에서 1942년 3월까지 8회에 걸쳐 데살로니가전서 강의, 미완성인 채로 성서조선사건으로 폐간되어 붓을 꺾게 되었다.

함석헌의 최대 업적은 김교신의 조선지리고에 호응해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의 강의다.

소두용의 최대 업적은 완전히 목숨을 걸고 부딪친 '신앙만의 신앙'의 생활의 자체였다. 사람들은 '멧돼지 신앙', '베드로 신앙'이라고 말한다.


2. 전도와 집회의 형성

이 시대의 후반에 있어서 김교신은 선언했다. '우리들을 이용하라'('40년 1월)고. 이 '우리들'이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3인이다. 이 시대의 한국 무교회는 그야말로 삼두마차의 질주를 보는 느낌이다. 김교신은 선언의 처음에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에는 남을 이용하려고 밤낮으로 책략을 짜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는 남에게 이용당하려고 주야로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 있다. 다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용되려고 하는 것이니 잘 생각하고 이용하시라."
전도의 어려움은 교회측의 방해보다도 총독부 당국의 탄압과 박해가 보다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고통은 심해졌다. 참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에 가서는 폐간, 체포, 투옥에 이른 것이다. 1942년 3월부터 1943년 3월까지 만 1년간 그들은 옥에 갇혀 있었다. '성서조선'을 빼앗긴 김교신은 순회 전도를 해보기도 하고, 만주의 일각에서 동지를 규학하여 보려고도 했었으나 1944년 7월부터 흥남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입사하여 3천명 한국인 노무자의 복지업무를 책임지고, 겸해서 교우들을 거기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1945년 4월 발진티푸스에 걸려 급서했다. 지회 형성의 자취는 1930년 5월부터 1941년 1월까지 김교신의 일기로서 '성서조선'에 연재되어 전집에 2권, 연 950쪽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 잇다. 공동체 형성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나, '성서조선'에 연결되는 에클레시아의 형성의 과정이다.

에클레시아 형성에 있어서 특필할 것은 남해의 낙도 소록도에 있는 나병 요양소에 환자들의 참가다. '성서조선'에 의한 소록도 전도의 기록은 익히 한 권의 책이 된다. 그 차례는 김교신 선생의 글(5편) 나(癩) 신우들의 문집(100여 쪽에 이르는 약 30편), 김교신 선생의 일기 중에 소록도에 관한 부분(약 90쪽)으로 되어 있다. '성서조선' 제59호('33. 12.)의 통신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소록도의 지우로부터의 통신에 접하여, 이렇다면 잡지 구독의 관계가 아니고 연모하는 자들 사이의 친전 봉함 편지를 접수한 느낌이 든다. 친히 만나볼 기회는 없을는지 모르지만 소록도는 나의 뜰 분재보다도 가까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세상의 부자나 학자들은 돌보지 않을지 모르지만, 소록도의 한 사람의 친구를 위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성서조선'은 건전한 복음지라고 말할 수 있다."
김교신의 이와 같은 나환우를 향한 전도에 대해서 교회측에서는 즉각 박해가, 그것도 김교신의 복음을 사모하는 불쌍한 나환우들에게 가해졌다. 김교신은 주님의 긍휼을 기구하고, 나환우에 대한 사랑은 더욱 불붙었다.(이하 생략)

('93. 8. 무교회사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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