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행동의 일관성

3. 농민전쟁의 유혈사태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3)

by scomsa posted Sep 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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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루터가 "평화 권고"로써 호소하고 직접 반란 지역에 가서 목숨을 걸고 설교를 했어도 농민들이 듣지 않는 것을 보고, 루터는 평화의 가능성이 없어진 것을 알고 농민들에게 더 비판적으로 되었지만, 자신의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113)
즉,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의 수가 많고 제후들은 군대가 부족하여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루터에게는 농민들의 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종의 의무를 어기고 반란을 일으켰고,그 죄를 복음으로 포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악마가 일으킨 강도요 살인자"였다. 강도와 살인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그들이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 통치자들은 농민들에 반대해야 하고, 신속히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14)
이러한 루터의 판단을 뒷받침하는 성공적인 실례가 있었다. 농민들이 약탈과 살인을 하는 혼돈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도망을 가거나 주저하고 있기 때문에 농민들의 만행은 계속 커 가고 있었는데, 만스펠트의 알브레히트 백작은 단호하게 농민전쟁의 유혈사태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조치를 한 것이다. 알브레히트 백작은 농민 폭도들을 공격하여 질서를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광부들이 반란에 참여하는 것을 차단하여 유혈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초기에 방지하였다. 그는 "갑옷을 입은 당시 최초의 사람"으로서 성공적인 개입을 했던 것이다.115)
이러한 성서적 판단과 실증 사례 속에 루터는, 농민들의 반란이 시작되자마자, 제후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신속히 대응해야 농민전쟁의 유혈사태를 최대한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116)
1525년 5월 3일 루터는 농민들에 대한 조치를 망설이고 있던 요한 공작

113) Brcht, op. cit., S.178.
114) Brecht, op. cit., SS.178-9.
115) WA 19,279. Franz, Der deutsche Bauernkrieg, 4th ed.(Darmstadt, 1956), 261.
116) LW 46,75. WA 18,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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