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행동의 일관성

2. 농민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6)

by scomsa posted Sep 26, 200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전]       [다음]

많은 사람들을 배척한 것으로 생각되지도 않았고, 제후들에게 아첨한 것으로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평화 권고"가, 관련된 사람들 모두와 최고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룬 것이었고, 또는 피상적으로만 봐도, 평화를 유지할 협상을 다룬 것이었다.91)

루터는 아이슬레벤 여행중(1525년 4월 16일부터 5월 6일까지)에 농민들의 소요가 있는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반란을 반대하는 설교함으로써 농민전쟁의 확산을 막고자 노력하였다.92) 4월 21일 하르쯔(Harz)의 슈톨베르크(Stolberg), 5월 1일 장어하우젠(Sangerhausen) 근처의 발하우젠(Wallhausen), 5월 2일 노르트하우젠(Nordhausen), 5월 3일 바이마르(Weimar), 5월 4일 아이슬레벤 근처의 제부르크(Seeburg) 등, 5월 5일 제부르크에서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비텐베르크로 향하기 전까지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5월 1일 발하우젠에서 "거짓 예언자들"(falschen Propheten)에 대해서 설교한 루터는 노르트하우젠에서, "평화 권고"에서처럼, 시련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권하며 그리스도의 그림을 가리켰지만, 농민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항의의 표시로 종들을 울려 댔다. 칼이 있었더라면 유혈사태가 일어날 상황이었다.93) 루터는 목숨의 위협가지 받아가면서 설교했지만, 농민들은 가르침을 받고자 하지 않았다. 이러한 튀링엔 농민들에 대해서 루터는, "나는 그들 가운데 있었고 내 목숨과 팔다리가 위험한 가운데 그들을 빠져 나왔다"고 했다.94) 루터 자신의 눈에는, 농민 한 사람에 10만의 악마가 있는 것이 보

91) Brecht, op. cit., S.177.
92) 루터의 아이슬레벤 여행(1525년 4월 16일부터 5월 6일까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 Christiane Griese, "Luthers Haltung im Bauernkrieg 1524/25," Ph.D. Dissertation, (Karl-Marx-Universitat, 1986), 68-86.
93) WATr 5, no.6429.
94) WA 19,278.

[이전]       [다음]


Articles

5 6 7 8 9 10 11 12 1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