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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차례,연보
2007.09.22 22:19

53.연보[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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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이 전]


53. ◆ 연보[年譜]

1901년 4월 18일(음력 3월 30일) 함흥 사포리(沙浦里)에서 유가(儒家)의 후손인 부(父) 김염희(金念熙)와 모(母) 양신(楊愼)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남.
1903년 부친 김염희(金念熙) 21세로 요절.
1912년 함흥에서 청주(淸州)한(韓)씨인 한매(韓梅)와결혼(2남 5녀를 낳음).
1916년 함흥 공립보통학교 졸업.
1919년 함흥 공립농업고보 졸업.
1919년 일본(日本) 동경(東京)세이코쿠영어학교(英語學校) 수학.
1920년 일본(日本) 동경(東京)에서 노방(路傍)설교를 듣고 입신(入信)을 결심.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음.
1921년 교회의 내분(內紛)을 목격하고 교회를 떠남. 그 무렵부터 일본의 위대한 애국자요, 종교사상가이며, 기독교의 새로운 개혁자(改革者)로서 후에 무교회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우찌무라 칸조오(내촌감삼: 內村鑑三) 문하에서 종교사상에 심취함(1921~27). 이 시절에 그의 신앙(信仰)과 인생관(人生觀), 구국(救國)의 이념(理念)이 확립되었으며, 이때부터 일생을 한결같은 정신(精神)으로 일관했음.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영어과 입학. 그 이듬해에 지리·박물학과로 전과(轉科)함.
1927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함.
1927년 동경 유학 당시 같은 우찌무라의 문하였던 함석헌(咸錫憲),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편집인), 양인성(楊仁性), 유석동(柳錫東) 등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간행함. 이는 순수한 기독정신을 이 민족(民族)의 밑바탕으로 하는 것만이 조국(祖國)을 구해 내는 유일한 길이라 믿고 구국운동으로 시작한 것임.
1928년 양정고보(養正高普)로 옮김(여기서 1940년까지 역임했음).
1929년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과 교유함. 이 무렵, 애국지사 유영모와도 깊은 교우관계를 가짐.
1930년 「성서조선(聖書朝鮮)」 제16호부터 단독 책임 주필(主筆)로 출판비는 물론 집필·검열·교정·배달에 이르기까지 초인적(超人的)인 노력을 계속했음(폐간 때까지). 그 무렵부터 서울에서 〈성서연구회〉를 개최, 매년 1회 1주간의 동기(冬期) 성서집회를 (10여년간) 계속했으나 무교회주의자라는 이유로 한국 교회의 이단자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게 교계(敎界)가 강단(講壇)을 제공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 청년회 등에서 장소 제공을 거부함으로써 성서집회는 대체로 가정집회 형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회원도 1~20명을 넘지 못했으며, 한때 그의 서재에서는 1인 상대의 강의가 수년 계속된 일도 있었음. 그는 기독교 진리와 신앙의 참다운 터득이란 수년에 한두 사람, 십년에 너댓 사람 있을까 말까한 것이라며 오로지 성서연구에만 몰두하며 회원수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음.
1933년 저서 「산상수훈연구(山上垂訓硏究)」발간. 이는 1931년~32년 2월까지 13회에 걸쳐 「성서조선」에 발표(發表)한 것임.
1935년 유달영(柳達永)을 시켜 여류 농촌운동가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교육자이기도 한 최용신(崔容信)의 일대기 「최용신소전(崔容信小傳)」을 집필케 하여 간행함.
1940년 함석헌(咸錫憲)과 공저(共著)로 「우찌무라 칸조오와 조선(朝鮮)」(日文)을 간행함. 이 무렵 경기고보(京畿高普)로 자리를 옮겼으나 불온분자라 하여 6개월만에 쫓겨났으며, 호수돈여고보에 부임했으나 역시 오래가지 못했음.
1941년 개성의 송도고보(松都高普) 교사로 부임함. 그러나 「성서조선」에 불뿜는 듯한 언동이 학교관리자인 일본인 눈에 거슬리어 오래 근무하지 못했음.
1942년 「성서조선」 제158호에 발표한 단문(短文)인 권두언 「조와(弔蛙)」가 검열에 걸려 함석헌(咸錫憲), 송두용(宋斗用), 유달영(柳達永) 등 12명의 동지들과 전국의 수백 지우(誌友)·동지(同志)들이 함께 피검되었으며, 이들 12명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른 〈성서조선사건〉이 있었음. 「성서조선」은 창간 당시부터 민족정신의 고취와 독립정신의 앙양을 위해 끈덕지게 출판되었으며, 거의 매호마다 총독부의 검열에 문제되어 그때마다 매월 폐간의 결의로 임했으며, 총독부는 책이 나오기 바쁘게 전국적으로 압수에 혈안이었고, 전국의 독자(讀者)들마저 검거하기까지 했음. 결국 「조와(弔蛙)」가 성서조선사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는데, 이는 어떠한 수난(受難) 속에서도 이 민족(民族)은 망(亡)하지 않는다는 신념(信念)을 암시한 것으로 항일민족(抗日民族)사상을 풍유적으로 표현한 것임.
1943년 불기소로 출옥, 전국 각지로 순회하며 신앙 동지들을 격려함.
1944년 흥남 일본질소비료공장에 끌려가서 강제노동을 당하면서도 한국인 노무자 3천여 명의 복리를 위해 교육·의료·주택·대우 등의 개선에 진력하는 한편, 신앙운동과 독립정신을 동포들에게 고취시킴.
1945년 4월 25일, 흥남질소비료공장 노동자 숙소에서 신앙과 애국을 외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 45세의 아까운 나이에 급서(急逝)함.
※ 추기(追記)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拒否)했으며, 일제의 심한 국어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수업했으며, 피검되었을 때 일본천왕은 신(神)의 피조물(被造物)에 불과하며 〈황국신민서사〉는 〈망국신민서사〉가 될 것이라고 검사의 심문에 답하여 그들을 격노케 했으며, 일본이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킨 것은 어린애가 호랑이를 탄 격으로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대답함으로써 그들을 떨게 했다. 광복후, 그를 기리는 신앙 동지와 제자들에 의해, 해마다 그의 기일(忌日)에 추모 강연회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소규모의 집회를 가지고 있다. 특히 서울의 노평구(盧平久)씨는 그의 신앙과 사상을 이어받아 「성서연구」를 현재까지 5백여회 간행했으며 하기 성경집회도 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평구(盧平久)씨와 함석헌(咸錫憲), 송두용(宋斗用), 유달영(柳達永), 홍승면(洪承勉) 등이 힘을 모아 「김교신전집(金敎臣全集)」(전6권)을 발간하여 그의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에 힘썼으며, 그의 생애를 추모하여 엮은 「김교신(金敎臣)과 한국(韓國)」(노평구 편)이 동지·후배·제자들 70여 명의 힘으로 이루어졌는데, 일본인(日本人)이 일본(日本)에서 일본말로 간행하기도 했음을 아울러 밝혀 둔다. (편집자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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