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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21:36

김교신론 - 정태시[鄭泰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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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이 전] [다 음]


1. □ 김교신론[金敎臣論]/정태시[鄭泰時]

나라사랑과 인간사랑



김교신(金敎臣), 그를 아는 사람은 안다. 그러나, 그를 참으로 아는 이는 드물다. 그토록 아까운 사람임에도 왜 그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시대(時代)는 사람을 찾고 시대는 사람을 부르기 마련이다.
함석헌(咸錫憲) 옹은 《김교신전집(金敎臣全集)》(전6권)중 제1권《신앙(信仰)과 인생(人生)》(1975 재판본(再版本)의 책머리 간행사(刊行辭)(1964 초판본(初版本) 때 쓴 것)에서 김교신저작집(金敎臣著作集)을 펴내는 이유를 〈말씀이 그리워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뭔가? 말을 하고 글을 쓸 줄 아는 것이 사람이다. 말 없고 글 없어선 사람이 아니요, 삶 아니다. 죽어도 말은 해야 한다. 내 입으로 못하겠거든 남의 입, 산 입이 했던 것을 읽어도 좋고, 내 손으로 못하겠거든 남의 손이 했던 것을 옮겨보아도 좋다.
사실 내 입, 남의 입이 어디 따로 있으며, 남의 손, 내 손이 어디 따로 있느냐? 말도 한말이요, 글도 한글이다. 그것은 마음이 본래 네 마음 내 마음 따로가 아니요, 한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일찍 떠났기에 더욱 그가 그리운지도 모른다.
그럼 김교신(金敎臣), 그는 어떤 사람인가?
중국 고사를 보면 항우라는 장수가 있어서 힘은 산을 뽑아 던질 수 있고 기운은 세상을 덮어 누를 수 있다 하였다. 한 마디로 김교신은 그런 사람이다.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자. 어머니한테 한 조그만 거짓말 때문에 참회의 눈물을 비오듯 흘렸으며 수학여행 때는 학생들을 인솔하고 선죽교를 지나다가 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기도 했다고 한다. 또 탄광 수십 척 지하에서 눈동자만 유난히 빛나는 중학생 또래의소년들을 보고는 손수건 하나를 흥건히 다 적시기도 했다고 일기에 써놓고 있다.
그는 명분없이 손을 내미는 자에게는 가혹할이만큼 냉정했지만 나병환자나 중환자에게는 돈을 있는 대로 내고 연민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별다른 유산이라고는 없었다.
다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정릉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그것으로 생활(生活)의 낙을 삼았다. 근처 절의 목탁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고, 계곡에서 냉수마찰을 하고는 조용히 기도시간을 갖는 것이 그날그날의 빠뜨릴 수 없는 일과였다.
당시 그가 교편을 잡고 있던 양정고보(養正高普: 서울역두)까지 정릉고개를 넘어 자전거로 통학했다.
뿐만 아니라, 학교생활에서는 수업시간은 물론 박물실·지리실의 손질과 씨름대회, 마라톤대회 등 모든 특별활동에까지 참가 아니하는 것이 없었다. 그의 체력 과시와 함께 사제동행(師弟同行)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나 할까.
과외시간이 되면 뜻있는 학생들을 데리고 산과 들에 다니며 선조들의 행적을 일일이 일깨워주면서 나라사랑과 인간애의 마음을 생생하게 새겨넣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짊어진 크고 무거운 십자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서〉와 〈조선〉이다.
세상이 다 일어서서 핍박하더라도 자신을 던져 그 고귀함을 지키고 바르게 펴려는 것이 성서요, 이를 고스란히 바치고자 함이 한국 〈당시 조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이 〈성서〉와 〈조선〉은 둘이면서도 하나였다.
그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간행한 것도 바로 그런 뜻에서다.
그는 1927년 7월부터 1942년 3월까지 --- 그러니까 26세 때부터 41세 때까지 --- 158호에 걸쳐 매월 《성서조선》을 발간했는데, 여기 실린 것은 거의 대부분이 성서조선에 발표되었던 글이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하(日帝下)였기 때문에 총독부의 철저한 〈언론검열〉로 해서 그들의 눈길을 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158호 권두언 『조와(弔蛙)』(1942, 3)가 항일 민족사상을 풍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여 검열에 걸려 《성서조선》은 폐간에 이르고, 김교신(金敎臣)과 함께 함석헌(咸錫憲), 송두용(宋斗用), 유달영(柳達永) 등 12명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1년여의 옥고를 치른 〈성서조선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글은, 어떠한 수난 속에서도 이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신념(信念)을 암시한 것이다.
말하자면 《성서조선》은 민족정신의 고취와 독립정신의 앙양을 위해 끈덕지게 출판되었으며, 총독부는 총독부대로 전국적으로 창간호부터 압수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의 독자들까지 색출하여 검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여기 실린 글들은 단 한 줄도 자유롭게 그냥 씌어진 것이 아니다. 검열을 통과하는 동안 찢기고 깎이고 한 것들이다. 그런만큼 함축의 농도가 진하고 깊으며, 읽을수록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선생(先生) 스스로가 자기(自己)의 글을 부디 글줄의 사이(行間)를 읽어달라고 호소하였다. 당시의 우리 형편을 아는 이들은 눈물로 젖지 않은 글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김교신전집(金敎臣全集) 제1권(第1券), 유달영(柳達永)씨의 〈끝에 붙이는 말씀〉(후기)중에서)
그는 1901년 3월, 함흥의 유가(儒家)에서 태어나 1945년 4월, 광복을 눈앞에 두고 4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노동자 숙소(흥남 질소비료공장)에서 신앙과 애국을 외치다가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인생관(人生觀)과 민족의 구원(救援)을 위한 개혁적인 신앙은 이 나라 종교사(宗敎史)에 새로운 거화(炬火)이었으며, 정의(正義)와 사랑으로 억척스럽게 살아온 생활(生活)과 지성(至誠)을 다한 교육(敎育)은 장구한 세월 이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기에 족할 것이다.
우리가 새삼 그를 기리는 것은 그의 숭고한 정신과 이념을 이 괴로운 현실 속에 사는 민중의 가슴속에 불붙이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유달영(柳達永)씨의 전기(前記) 글에서 발췌)

필자가 처음 그를 만난 것은 그의 일생으로 치자면 만년에 가까운 때였는데, 처음 그를 대했을 때 그 큰 키에 흰 두루마기를입고 있었다. 그는 온화한 미소로 필자의 손을 잡고 마루로 오르게 했는데, 그의 이마가 어찌나 윤이 나는지 마치 늦가을 잘 익은 홍옥같이 반들거렸다. 웬지 그것이 당시 나의 젊은 가슴을 압도했다. 후에 안 일이지마는 사십대에 그 당시 최고급의 성경 주석을 거의 완전히 습득하였으며, 희랍어와 히브리어까지도 조예가 깊었으며, 밤에는 서구사회에서 방송되는 시사해설을 듣기도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해방 직후에 어느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는데 교재가 없는 때였기 때문에 《성서조선》을교재로 사용했었다.
최근 들어, 외솔회(최현배선생 기념사업회)에서는 정기간행물인 《나라사랑》(17집)에서 그 전지면을 「김교신 선생 추모집」으로 꾸며 그를높이 기리고 있다.

「그는 인생(人生)을 참 살라 했고 나라를 참 사랑하라 했으며, 인생을 참으로 사는 것이 참으로 가장 나라를 사랑한느 것이요, 신앙(信仰)에 사는 인생이 참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말이요, 글이요, 그렇게 살려 노력한 것이 그의 생애(生涯)다.」(함석헌(咸錫憲)씨의 전기(前記) 글 중에서)

그렇다고 그의 글이 도식적이거나 과시하는 그런 글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 옮긴 글들은 《신앙(信仰)과 인생(人生)》(상·하)의 두 권 중에서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것들을 뽑은 것이다.
자연(自然)에 대하여, 생활(生活)에 대하여, 인생(人生)에 대하여, 신앙(信仰)에 대하여, 그리고 조국에 대하여 그가 지닌 신념과 사상, 그리고 사랑을 접할 수 있도록 폭넓게 택했다.
김교신(金敎臣), 그는 신앙인(信仰人)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다. 그의 신앙은 편협되지 않으며 그의 믿음은 선동적이 아니다. 그는 오직 〈성서〉로만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일깨운다.
김교신(金敎信), 그는 교육자(敎育者)이다. 일생을 교단에서 학생들을 지도했지만, 그는 산교육 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믿는 바에 따라 〈인간(人間)〉을 키웠다.
그의 글이 사물(事物)에 대하는 것이든 자신의 내부(內部)의 소리든, 그것이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지 않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인생의 깊은 근저(根抵)와 신앙의 변함없는 진리, 그리고 타고난 교육자적인 기질에도 기인한다.
다시 함석헌(咸錫憲) 옹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이제 거꾸로 흐를 수 없는 역사 거꾸로 흐르는 듯해, 아주 사나운 여울목에 다다랐다. 길은 점점 더 좁고, 물결은 점점 더 높고, 거품은 점점 더 많다. 울음소리는 높다 높다 못해 꽉 막혀 끊어졌다. 앞서 간 사람의 글을 펴놓고 조용히 읽을 때다.」

정태시(鄭泰時)(공주교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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